마패묘원유지
馬牌苗圃遺址
규모
남북: 300m, 동서: 100m
입지
유지는 마패묘포(馬牌苗圃)사무실 서남쪽에 있는데 월정향(月睛鄕) 마패(馬牌)1대(隊)와는 약 400m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산등성이의 완만한 비탈과 접해있고, 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은 반원형(반호형(半弧形))의 산등성이이며, 북쪽은 비교적 넓게 트인 평지이고, 동쪽으로는 길림성(吉林省) 도문시(圖們市)에서 백룡(白龍)으로 향하는 도로와 인접해 있으며, 다시 동쪽으로 약 750m 떨어진 곳에는 도문강(圖們江)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간다.
유적개관
유지는 일찍이 경작지로 개간되었고, 또한 묘상(苗圃) 정리, 저수지 축조, 육묘(育苗) 등을 통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유물개관
1985년 봄에 주문물보사대(州文物普査隊)가 조사할 때 동서 100m, 남북 300m 범위 안에서 암키와 1점, 그물무늬와 원권(圓圈)무늬 도기잔편 각 1점, 도기(陶器) 구연(口沿) 6점, 그릇 손잡이(기이(器耳)) 1점, 그릇 밑바닥(기저(器底)) 등이 수습되었다.
해설
마패(馬牌) 육묘장 사무실 서남쪽에 있는데 월정진(月睛鎭) 마패 1대(隊)와는 약 400m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산등성이의 완만한 비탈과 접해있고, 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은 반원형의 산등성이이며, 북쪽은 비교적 넓게 트인 평지이고, 동쪽으로는 길림성(吉林省) 도문시(圖們市)에서 백룡(白龍)으로 향하는 도로와 인접해 있으며, 다시 동쪽으로 약 750m 떨어진 곳에는 도문강(圖們江)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간다.
유적은 일찍이 경작지로 개간되었고, 또한 묘상(苗床) 정리, 저수지 축조, 육묘(育苗) 등을 통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육묘장 관계자에 의하면, 일찍이 개간할 때 곳곳에 깨진 돌과 기와조각이 널려 있었고, 퇴적된 토기조각 중에 완전한 토기 항아리, 토기 동이 등이 있었으며, 육묘장으로 용도를 변경할 때 많은 기와조각과 토기조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출토된 유물 중 몇 점은 발해 시기에 비교적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유물이다. 이밖에 유적 안, 특히 서남쪽에서 모래 섞인 거친 토기조각 잔편 약간과 석기 등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원시사회 유적에 속하는 것이다. 위에서 서술한 유물에 근거하면, 이 유지는 발해 시기에 속한다. 일부 원시사회 유물은 이 일대가 원시사회 인류의 거주지 또는 활동지로서, 발해 유적 아래쪽에 원시문화 유적이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1985년 봄에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문물조사팀이 조사할 때 동서 100m, 남북 300m 범위 안에서 암키와1점, 삼베무늬와 고리점무늬 토기조각 각 1점, 토기 입술 6점, 그릇 손잡이 1점, 그릇 밑바닥 등이 수습되었다.
유적은 일찍이 경작지로 개간되었고, 또한 묘상(苗床) 정리, 저수지 축조, 육묘(育苗) 등을 통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육묘장 관계자에 의하면, 일찍이 개간할 때 곳곳에 깨진 돌과 기와조각이 널려 있었고, 퇴적된 토기조각 중에 완전한 토기 항아리, 토기 동이 등이 있었으며, 육묘장으로 용도를 변경할 때 많은 기와조각과 토기조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출토된 유물 중 몇 점은 발해 시기에 비교적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유물이다. 이밖에 유적 안, 특히 서남쪽에서 모래 섞인 거친 토기조각 잔편 약간과 석기 등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원시사회 유적에 속하는 것이다. 위에서 서술한 유물에 근거하면, 이 유지는 발해 시기에 속한다. 일부 원시사회 유물은 이 일대가 원시사회 인류의 거주지 또는 활동지로서, 발해 유적 아래쪽에 원시문화 유적이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1985년 봄에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문물조사팀이 조사할 때 동서 100m, 남북 300m 범위 안에서 암키와1점, 삼베무늬와 고리점무늬 토기조각 각 1점, 토기 입술 6점, 그릇 손잡이 1점, 그릇 밑바닥 등이 수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