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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성씨록(姓氏錄)』 에서 이르기를, 지노직(志怒直; 시누노아타히)의 넷째 아들...]

『성씨록(姓氏錄)』 에서 이르기를, 지노직(志怒直; 시누노아타히)의 넷째 아들 도녜직(刀禰直; 도네도아타히)은 무화숙녜(畝火宿禰; 우네비노스쿠네), 황전정기촌(荒田井忌寸; 아라타위노이미키), 장원기촌(藏垣忌寸; 구라카키이미키노) 등 세 성의 시조라고 하였다.
 
【주석】
1. 성씨록왈(姓氏錄曰)
이 일문은 〈판상계도(坂上系圖)〉 도녜직(刀禰直)조에 인용된 것으로, 우경 제번(상) 「판상대숙녜(坂上大宿禰)」 조(812)의 일문이다. 현재 초략본의 해당 조에서는 후한(後漢) 영제(靈帝)의 아들 연왕(延王)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2. 지노직(志努直)
지노직에 대해서는 [일문11] 지노직(志努直) 항목 참조.
3. 도녜직(刀禰直)
〈판상계도(坂上系圖)〉에서는 지노직의 아들이자 아소나직(阿素奈直)의 아우로 도녜직을 언급하고, 그 말미에 이 일문을 기록하였다.
4. 무화숙녜(畝火宿禰)
무화(畝火; 우네비)라는 씨명은 대화국(大和國) 고시군(高市郡) 무방(畝傍),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강원시(橿原市) 무방(畝傍)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무화숙녜씨에 대해서는 우경 제번(상) 「무화숙녜(畝火宿禰)」 조(819) 참조. 해당 조에서는 판상대숙녜(坂上大宿禰)와 조상이 같으며 도하직(都賀直)의 3세손인 대부직(大父直)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5. 황전정기촌(荒田井忌寸)
황전정(荒田井; 아라타위)이라는 씨명은 미장국(尾張國) 애지군(愛智郡) 황대향(荒大鄕), 즉 현재의 애지현(愛知縣) 명고옥시(名古屋市) 명해정(鳴海町) 부근으로 추정되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황전정기촌의 원래 성은 직(直)이고 연(連)을 거쳐 기촌이 되었다. 천무(天武) 11년(682)에 왜한직(倭漢直) 등과 함께 연이 되었고(『일본서기』 天武 11년 5월 갑진조), 천무 14년(685)에 왜한련과 함께 기촌이 되었다(『일본서기』 天武 14년 6월 갑오조).
황전정직이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로는 황전정직비라부(荒田井直比羅夫, 『일본서기』 白雉 원년 10월조 등)가 있고, 황전정기촌이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로는 황전정이미길을마려(荒田井伊美吉乙麻呂, 天平 17년 4월 26일부 『安都年足狀」, 『대일본고문서』 25-124), 황전정기촌기거리(荒田井忌寸紀巨理, 延曆 6년 6월 26일부 「珍財帳」 『平安遺文』 8-3199)가 있다.
황전정직비라부(荒田井直比羅夫)는 왜한직비라부(倭漢直比羅夫)나 왜한직황전정비라부(倭漢直荒田井比羅夫)로도 표기한다. 그는 대화(大化) 원년(645)에 소아석천마려(蘇我石川麻呂)가 신들에 대한 제사를 먼저 지내고 정사를 의논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과 관련하여 신에게 바칠 폐백을 부과하는 문제로 미장국(尾張國)에 파견된 적이 있으며(『일본서기』 大化 원년 7월 경진조), 대화 3년(647)에는 난파(難波) 지역에 수로를 굴착하다가 중지하였으며(『일본서기』 大化 3년 是歲條), 백치(白雄) 원년(650)에는 궁의 건설과 관련하여 궁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일본서기』 白雉 원년 10월조).
6. 장원기촌(藏垣忌寸)
장원(藏垣)이라는 씨명은 창장(倉墻; 구라카키)·양원(椋垣; 구라카키)·창원(倉垣; 구라카키)라고도 표기하며, 대화국(大和國) 고시군(高市郡) 일대의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장원기촌의 본래 성은 직(直)이었는데, 연(連)을 거쳐 기촌이 되었다. 경운(慶雲) 4년에 주세료조(主稅寮助) 종6위상 양원직자인(椋垣直子人)이 연이라는 성을 받았으며(『속일본기』 慶雲 4년 2월 신묘조), 화동(和銅) 2년에는 양원기촌자인(椋垣忌寸子人)으로 보인다(『속일본기』 和銅 2년 정월 병인조).
장원직(藏垣直)이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로는 창장직마려(倉墻直麻呂, 『일본서기』 天武天皇 원년 7월 壬子條)가 있으며, 기촌으로 바뀐 이후의 인물로는 양원기촌자인의 다른 이름인 창원기촌자수(倉垣忌寸子首, 『속일본기』 和銅 6년 4월 을묘조)를 비롯하여, 양원이미길(椋垣伊美吉, 天平 5년 「右京計帳」, 『대일본고문서』 24-16)을 비롯하여 양원이미길기리매(椋垣伊美吉己里賣, 상동) 등 다수가 『영락유문(寧樂遺文)』, 『속일본기(속일본기)』, 『평안유문(平安遺文)』 등에 보인다.
장원기촌가마려(藏垣忌寸家麻呂)는 천평(天平) 3년(731)에 종8위상 내장소속(內藏少屬)으로서 고시군(高市郡)의 군사(郡司) 소령(少領)에 임명되었고, 천평 11년(739)에는 대령(大領)에 임명되었다(『속일본기』 寶龜 3년 4월 경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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