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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진기촌(秦忌寸; 하타노이미키)

진기촌(秦忌寸; 하타노이미키)
 태진공숙녜(太秦公宿禰; 우즈마사노키미노스쿠네)와 같은 조상이고, 공만왕(功滿王)의 후손이다.
 
【주석】
1. 진기촌(秦忌寸)
진기촌씨는 중국 진 시황제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그 계보 관계가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 15년(471)조에 웅략천황이 많은 견직물을 헌상한 진주공(秦酒公)에게 우즈마사(太秦)이라는 씨족의 이름을 내렸다는 경위를 밝히고 있다.
한편 진씨를 중국 왕조 진 시황제의 후손으로 칭하게 된 배경으로 『삼국지』 「위서」한전에 진한인(辰韓人)은 진의 망명인으로 고역을 피하여 한국에 왔으며 언어가 진어(秦語)와 유사하여 진한(秦韓)이라고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설에 의하면 진씨는 신라로부터 왔지만 원출자는 중국 왕조의 진이라는 것이다. 진의 훈독이 하타[波陀]였듯이 원래 하타라는 말이 있었고 후에 이를 진(秦) 자로 붙였다고 생각된다. 하타라는 말에 대해 『신찬성씨록』 좌경 제번(상) 「태진공숙녜(太秦公宿禰)」 조에는 “진왕(秦王)이 바친 실, 솜, 명주, 비단은 짐이 입으니 부드럽고 피부에 따듯해서 파다(波多)를 성으로 하사하였다.”라고 하고, 『고어습유(古語拾遺)』 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또 범어로 ‘pata’는 견포(絹布)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명주를 짜는 사람을 복부(服部), 진씨(秦氏)라고 칭하고 명주를 짜는 도구도 하타라고 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서기』 천무기(天武紀) 12년(683) 9월조에는 진조(秦造)가 연(連) 성을 받았고, 동 천무 14년(685) 6월에는 기촌(忌寸)으로 개성하였다. 섭진국(攝津國)의 진기촌씨(秦忌寸氏)에 대해서는 『속일본기』 신호경운(神護景雲) 3년(769) 5월조에 섭진국(攝津國)의 풍도군(豐島郡), 서성군(西成郡)에 거주하는 진정수소족(秦井手小足), 진신도(秦神島), 진인광립(秦人廣立) 등이 진기촌(秦忌寸)의 성을 받고 있다.
한편 『속일본기』 천평(天平) 20년(748) 5월조에는 우대사(右大史) 정6위상 진노(秦老)등 1,200여 명에게 이미길(伊美吉)의 성을 주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신천성씨록』산성국 제번 「진기촌(秦忌寸)」 조(914)에는 “천평 20년에 경기(京畿)에 있는 자에게 모두 새로 이미길(伊美吉)의 성을 주었다”라고 한다. 즉 이미길 성은 기내(畿內) 거주의 특정 씨족에게만 주어졌고, 기촌(忌寸)과는 같은 성이었다. 이미길 성은 천평보자(天平寶字)3년(759) 10월에 혜미압승(惠美押勝, 藤原仲麻呂)이 ‘미(美)’를 사용했기 때문에 기촌으로 통일하고, 그 후에는 기촌의 성만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혜미압승의 사망 이후가 되면 다시 이미길의 성을 사용하게 된다. 『일본문덕천황실록』 천안(天安) 원년(857) 정월 경신조에 “민기촌(民忌寸), 내장기촌(內藏忌寸), 평전기촌(平田忌寸), 산구기촌(山口忌寸), 문기촌(文忌寸), 대장기촌(大藏忌寸), 회전기촌(檜前忌寸), 천원기촌(川原忌寸), 곡기촌(谷忌寸) 등 59씨에게 기촌(忌寸)에서 이미길(伊美吉)로 개성해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기촌씨 일족으로는 『정창원문서』 에 진이미길계수(秦伊美吉繼手, 天平勝寶 9년 4월 「西南角領解」, 『大日本古文書』 13-220), 진기촌풍수(秦忌寸豐穗, 天平寶字 8년 10월 3일부 「造東大寺司移」, 『大日本古文書』 5-5) 등이 있다.
2. 태진공숙녜(太秦公宿禰)
태진공숙녜에 대해서는 좌경 제번(상) 「태진공숙녜」 조(740) 참조.
3. 공만왕(功滿王)
공만왕에 대해서는 좌경 제번(상) 「태진공숙녜」 조(740) 공만왕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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