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준(陳遵), 왕립(王颯)이 사신으로 가고 선우는 한과의 관계를 드러내며 흉노의 힘을 과시하고자 함
경시 2년(24) 겨울 한은 중랑장 귀덕후(歸德侯) 왕립(王颯)
주 001, 대사마호군(大司馬護軍)주 002
진준(陳遵)
주 003
[호도이시]선우 여는 교만하여 [다음과 같이] 진준과 왕립에게 말하였다. “흉노는 본래 한과 형제이다. 흉노의 [역사 가운데] 중간 시기에 난리가 발생하자 효선황제의 도움으로 호한야선우가 즉위하였다. 그래서 칭신하고 한을 존숭하였다. 지금은 한에서 또한 큰 내란이 발생하여 왕망에게 [황제의 자리가] 찬탈되자, 흉노 또한 군대를 내어 왕망을 공격하여 그 변경을 텅 비게 함으로써, 천하에 소동이 일어나 한을 그리워하도록 하였다. 왕망이 마침내 패하고 한이 다시 흥기한 것은 또한 나의 힘이니 응당 나를 다시 존숭해야 한다!” 진준은 [선우와] 서로 버티었는데 선우는 끝내 이 주장을 견지하였다.
그 이듬해 여름 [사신 일행은] 돌아왔다. 마침 적미(赤眉)주 004[군]이 장안으로 진입하였고 경시제 주 005
각주 003)
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냈다. 선우에게 한의 과거 규격에 따른 옥새와 인장 끈, 그리고 왕·후 이하의 인장과 인장 끈을 사여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아직] 남아 있던 운과 당 등의 친속과 귀인 등 시종자들도 보냈다.陳遵(?∼25) : 字는 孟公이고 杜陵 사람이다. 祖父는 宣帝와 元帝 때 太原太守, 京兆尹, 廷尉 등을 역임한 陳遂다. 陳遵은 어려서 고아로 자랐으며 성품이 활달하고 얽매이는 것이 없었다. 키가 8척 여에 달하고 긴 머리에 큰 코를 지닌 훌륭한 용모였다. 公府掾史를 거쳐 三輔의 郁夷縣令이 되었고, 그 후 校尉로 趙朋 등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嘉威侯로 봉해졌다. 그의 명성이 높아 京師에 오는 郡國 豪傑들이 모두 그의 집에 찾아왔는데, 술을 매우 좋아하였다. 傳記를 대략 섭렵하고 文辭에 능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王莽은 그의 재능을 아껴 哀帝와 平帝 시기에 河南太守로 기용되었다. 임기 중 과부 집안에 들어가 음주하고 문란한 행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免官되었다. 오래 뒤 다시 九江과 河內의 都尉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면관된다. 그 후 王莽이 패망한 뒤, 更始帝의 군대가 장안에 들어왔을 때 대신들이 陳遵을 大司馬護軍으로 추천하였다. 그리고 王颯과 함께 匈奴에 出使하였다. 使行에서 돌아올 때, 마침 更始帝가 패하여 陳遵은 朔方郡에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술에 취한 채 피살되었다. 그의 열전이 『漢書』 권92 「游俠傳」에 있다.
[호도이시]선우 여는 교만하여 [다음과 같이] 진준과 왕립에게 말하였다. “흉노는 본래 한과 형제이다. 흉노의 [역사 가운데] 중간 시기에 난리가 발생하자 효선황제의 도움으로 호한야선우가 즉위하였다. 그래서 칭신하고 한을 존숭하였다. 지금은 한에서 또한 큰 내란이 발생하여 왕망에게 [황제의 자리가] 찬탈되자, 흉노 또한 군대를 내어 왕망을 공격하여 그 변경을 텅 비게 함으로써, 천하에 소동이 일어나 한을 그리워하도록 하였다. 왕망이 마침내 패하고 한이 다시 흥기한 것은 또한 나의 힘이니 응당 나를 다시 존숭해야 한다!” 진준은 [선우와] 서로 버티었는데 선우는 끝내 이 주장을 견지하였다.
그 이듬해 여름 [사신 일행은] 돌아왔다. 마침 적미(赤眉)주 004[군]이 장안으로 진입하였고 경시제 주 005
각주 005)
는 패하였다.更始帝 劉玄(?∼25) : 兩漢 교체기 綠林軍이 건립한 更始 정권의 皇帝이다. 字는 聖公이고 南陽郡 蔡陽 사람으로 光武帝 劉秀의 族兄이다. 王莽시기 법을 어기고 平林에 망명하였다. 地皇 3년(22) 綠林 농민의 반란군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23년 綠林軍이 王莽의 將領 甄阜 등을 격파한 뒤, 劉玄을 更始將軍으로 추대하였다. 그 뒤 劉氏 宗室이란 이유로 황제로 추대되고 更始라고 建元하였다. 이해 6월 宗室의 諸將을 크게 봉건하였다. 반란군이 昆陽 대첩에서 승리한 뒤, 洛陽과 三輔 지방을 공략하자, 각지의 豪强이 다투어 王莽의 牧守들을 살해하고 한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更始의 政令에 따랐다. 王莽이 敗死한 뒤, 更始帝는 수도를 洛陽에서 長安으로 옮겼다. 그 뒤 劉玄은 政事는 趙萌에게 위임한 채 궁정의 사치스런 생활에 빠져들었고 그 결과 離叛者가 속출하였다. 25년 10월 赤眉軍이 장안을 압박하자 劉玄은 申屠建 등 중요한 將領들을 죽이고 투항하였으나 얼마 후 살해되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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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陳遵(?∼25) : 字는 孟公이고 杜陵 사람이다. 祖父는 宣帝와 元帝 때 太原太守, 京兆尹, 廷尉 등을 역임한 陳遂다. 陳遵은 어려서 고아로 자랐으며 성품이 활달하고 얽매이는 것이 없었다. 키가 8척 여에 달하고 긴 머리에 큰 코를 지닌 훌륭한 용모였다. 公府掾史를 거쳐 三輔의 郁夷縣令이 되었고, 그 후 校尉로 趙朋 등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嘉威侯로 봉해졌다. 그의 명성이 높아 京師에 오는 郡國 豪傑들이 모두 그의 집에 찾아왔는데, 술을 매우 좋아하였다. 傳記를 대략 섭렵하고 文辭에 능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王莽은 그의 재능을 아껴 哀帝와 平帝 시기에 河南太守로 기용되었다. 임기 중 과부 집안에 들어가 음주하고 문란한 행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免官되었다. 오래 뒤 다시 九江과 河內의 都尉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면관된다. 그 후 王莽이 패망한 뒤, 更始帝의 군대가 장안에 들어왔을 때 대신들이 陳遵을 大司馬護軍으로 추천하였다. 그리고 王颯과 함께 匈奴에 出使하였다. 使行에서 돌아올 때, 마침 更始帝가 패하여 陳遵은 朔方郡에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술에 취한 채 피살되었다. 그의 열전이 『漢書』 권92 「游俠傳」에 있다.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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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更始帝 劉玄(?∼25) : 兩漢 교체기 綠林軍이 건립한 更始 정권의 皇帝이다. 字는 聖公이고 南陽郡 蔡陽 사람으로 光武帝 劉秀의 族兄이다. 王莽시기 법을 어기고 平林에 망명하였다. 地皇 3년(22) 綠林 농민의 반란군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23년 綠林軍이 王莽의 將領 甄阜 등을 격파한 뒤, 劉玄을 更始將軍으로 추대하였다. 그 뒤 劉氏 宗室이란 이유로 황제로 추대되고 更始라고 建元하였다. 이해 6월 宗室의 諸將을 크게 봉건하였다. 반란군이 昆陽 대첩에서 승리한 뒤, 洛陽과 三輔 지방을 공략하자, 각지의 豪强이 다투어 王莽의 牧守들을 살해하고 한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更始의 政令에 따랐다. 王莽이 敗死한 뒤, 更始帝는 수도를 洛陽에서 長安으로 옮겼다. 그 뒤 劉玄은 政事는 趙萌에게 위임한 채 궁정의 사치스런 생활에 빠져들었고 그 결과 離叛者가 속출하였다. 25년 10월 赤眉軍이 장안을 압박하자 劉玄은 申屠建 등 중요한 將領들을 죽이고 투항하였으나 얼마 후 살해되었다.
색인어
- 이름
- 왕립(王颯), 진준(陳遵), 운, 당, [호도이시]선우, 여, 진준, 왕립, 효선황제, 호한야선우, 왕망, 왕망, 왕망, 한, 진준, 경시제
- 지명
- 한, 한, 한, 한, 한, 한, 장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