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이 뭐예요?
◆ 중국의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된 동북공정
동북공정은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의 역사, 지리, 민족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업입니다.
중국 정부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5년간 연구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이 사업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 008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사, 부여사, 고구려사, 발해사가 중국사’라는 주장을 펼치며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이 나라의 땅이었던 곳을 현재 중국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정부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5년간 연구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이 사업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 008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사, 부여사, 고구려사, 발해사가 중국사’라는 주장을 펼치며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이 나라의 땅이었던 곳을 현재 중국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동북공정은 무엇인가?
○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 고조선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국가이다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세운 국가이며,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국가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고조선을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고조선은 중국 은나라의 왕족인 기자가 와서 세운 나라라는 것입니다(기자 조선이라 부름). 또한 기자조선은 조선으로 교체되었고, 결국 한나라에게 멸망당한 후 한이 이곳에 4개의 군현을 설치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나라를 세웠다면 중국의 유물들이 발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조선이 처음 세워진 요동 지역이나 한반도에서는 중국의 유물과 다른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비파형동검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고조선을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고조선은 중국 은나라의 왕족인 기자가 와서 세운 나라라는 것입니다(기자 조선이라 부름). 또한 기자조선은 조선으로 교체되었고, 결국 한나라에게 멸망당한 후 한이 이곳에 4개의 군현을 설치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나라를 세웠다면 중국의 유물들이 발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조선이 처음 세워진 요동 지역이나 한반도에서는 중국의 유물과 다른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비파형동검입니다.
○ 고조선 역사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정리하고 이를 반박해 보세요.
◆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진 부여
부여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만주 송화강 유역에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부여를 세운 사람들은 고조선·고구려·옥저·동예를 세운 예맥족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부여가 일찍부터 중국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지방 문화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중국의 주장은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에도 ‘고구려와 부여는 같은 종족’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훗날 백제를 세운 사람들도 자신들이 부여의 후예라며 왕족의 성에 ‘부여씨’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왕은 나라의 이름도 ‘부여’라고 고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부여는 우리 역사 속 국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주장은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에도 ‘고구려와 부여는 같은 종족’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훗날 백제를 세운 사람들도 자신들이 부여의 후예라며 왕족의 성에 ‘부여씨’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왕은 나라의 이름도 ‘부여’라고 고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부여는 우리 역사 속 국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부여의 역사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정리하고 이를 반박해 보세요.
◆ 동아시아를 호령한 고구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니?
고구려사 왜곡은 동북공정 주장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고구려가 우리민족이 세운 독자적인 나라가 아니라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고구려가 한나라 설치한 주 013의 하나인 현도군에서 건국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수도를 여러 차례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한사군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조공·책봉이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관계를 말합니다.
이에 대한 우리역사학자들의 반박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고구려는 현도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도군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나라를 세웠고 이후 단 한 번도 중국 영토 안에 속했던 적이 없었다.둘째, 조공과 책봉 관계는 근대화를 이루기전 동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과 맺었던 외교관계의 한 형식일 뿐이다. 이를 통해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나라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한다면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일본, 베트남, 고려, 조선 모두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말과 똑같기 때문이다
고구려사 왜곡은 동북공정 주장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고구려가 우리민족이 세운 독자적인 나라가 아니라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고구려가 한나라 설치한 주 013의 하나인 현도군에서 건국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수도를 여러 차례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한사군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조공·책봉이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관계를 말합니다.
이에 대한 우리역사학자들의 반박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고구려는 현도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도군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나라를 세웠고 이후 단 한 번도 중국 영토 안에 속했던 적이 없었다.둘째, 조공과 책봉 관계는 근대화를 이루기전 동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과 맺었던 외교관계의 한 형식일 뿐이다. 이를 통해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나라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한다면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일본, 베트남, 고려, 조선 모두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말과 똑같기 때문이다
○ 고구려 건국과 성격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정리하고 이를 반박해 보세요.
- 고구려와 수·당 전쟁
고구려는 수나라, 당나라와 여러 차례 전쟁을 하였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들의 침략을 모두 막아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고구려가 두 나라와 싸운 전쟁을 중국 내부의 통일 전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수·당 전쟁은 중국 내부의 통일 전쟁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록에 따르면 수나라는 고구려를 자신들이 통일해야하는 중국의 나라로 보지 않았습니다.
둘째, 중국 역사책에는 당나라의 황제 고조가 “고구려와 중국은 별개의 두 나라인데, 굳이 지배할 필요가 있냐”라고 말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나라도 고구려를 중국의 나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수·당 전쟁은 중국 내부의 통일 전쟁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록에 따르면 수나라는 고구려를 자신들이 통일해야하는 중국의 나라로 보지 않았습니다.
둘째, 중국 역사책에는 당나라의 황제 고조가 “고구려와 중국은 별개의 두 나라인데, 굳이 지배할 필요가 있냐”라고 말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나라도 고구려를 중국의 나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 고구려와 수·당 전쟁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정리하고 이를 반박해 보세요.
- 당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결국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하였습니다 (668년). 그 후 당은 고구려 부흥 운동을 막기 위해 고구려 유민 중 일부를 중국으로 끌고 갔습니다. 중국은 이때 당에 끌려가 중국인이 된 고구려 유민의 수가 신라로 간 수보다 많기 때문에 고구려가 중국사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사람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의지(계승 의식과 부흥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두 지역으로 간 사람들이 스스로 그 곳에 갔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유민 중 당으로 간 사람들은 강제로 끌려갔고, 신라로 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해서 갔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사람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의지(계승 의식과 부흥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두 지역으로 간 사람들이 스스로 그 곳에 갔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유민 중 당으로 간 사람들은 강제로 끌려갔고, 신라로 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해서 갔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 고구려 유민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정리하고 이를 반박해 보세요.
◆ 발해사
발해는 고구려 출신인 대조영이 당에서 도망쳐 나온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로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발해를 말갈인이 세운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지린 성에 있는 한 유적지에 이러한 내용을 담은 부조물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 이유는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발해는 외교문서에 ‘고려국왕’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발해인들 스스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 이유는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발해는 외교문서에 ‘고려국왕’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발해인들 스스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