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자유적
東臺子遺址
규모
남북: 150, 동서: 500
입지
국내성 동쪽 500m 위치에 동서로 좁고 긴 대지 위에 위치
유적개관
1958년 발굴조사한 고구려 건축 유적으로, 회랑으로 연결된 4개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중심 건물지는 동서 15m, 남북 11m의 장방형이며, 주위는 1.5~2m 폭으로 황토와 강돌로 보강하고 그 위에 초석을 두었으며, 그 주위를 회랑으로 돌렸다. 그 바깥에 적심석이 남아있다. 다른 건물지는 동서 15m, 남북 14m로 거의 방형인데, 동벽 남쪽에 2줄의 온돌이 존재한다. 고구려와 발해 시기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서 많은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사직으로 보기도 하나, 비판적인 견해가 있다.
유물개관
* 동기, 철기, 석기, 토기 및 도금기, 와당(연화문, 수면문, 인동문)
참고문헌
「考古」1961-1
「東北考古與歷史」1982-1
「東北考古與歷史」1982-1
해설
국내성지 동쪽 0.5km 거리의 동서로 좁고 긴 대지 위에 있다. 그 위에는 예로부터 붉은색 기와편이 많이 분포해 있었다. 동대자 유적은 이미 20세기 초에 알려졌다. 동대자는 주변보다 8~10m 정도 높은 대지인데, 본래 동서 길이 500m, 남북 너비 150m에 이르렀다. 20세기 초 도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되었다가, 철로 공사를 하면서 대지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동쪽 일부만 남게 되었다.
1958년 이곳에서 건물지 4기가 확인되었다. 중심 건물지는 동서 15m, 남북 11m의 장방형이며, 주위는 1.5~2m 폭으로 황토와 강돌로 보강하고 그 위에 초석을 두었으며 그 주위를 회랑을 둘렀다. 실내 중앙에는 길이 80cm, 너비 60cm인 장방형 돌기둥이 놓여 있다. 온돌시설로 보이는 연도가 폭 0.7m, 높이 25m, 길이 22m의 연통과 연결되어 있다. 이 건물지 서쪽에는 동서15m, 남북 14m로 거의 방형에 가까운 건물지가 있다. 이 건물에도 동벽 남쪽에 연도가 두 줄로 벽을 따라 북에서 서로 뻗어서 온돌시설을 이룬다. 폭은 2m, 길이 11m이다. 유물로는 연화문, 수면문, 인동문 와당 및 ‘연(延)’으로 보이는 문자가 새겨진 수키와를 비롯하여 암키와 등 기와류가 많고, 적색, 적갈색, 갈색의 니질 토기, 도끼 칼, 못 등의 철제품이 있다. 이에 발굴자들은 중앙 건물지의 돌기둥에 주목하여 이 건물을 392년(고국양왕 9)에 건립했다는 사직이나 종묘로 비정하기도 한다. 『여씨춘추』와 『회남자』 등의 고전에서 사(社)의 신주(神主)에 돌을 사용한 예를 근거로 한다. 한편, 초석, 기와, 와당 등의 건축자재와 토기, 철기, 도금한 장식품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5~6세기로 편년되는 연화문와당은 평양천도 이후에도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온돌의 형태로 보아 발해시기에도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1958년 이곳에서 건물지 4기가 확인되었다. 중심 건물지는 동서 15m, 남북 11m의 장방형이며, 주위는 1.5~2m 폭으로 황토와 강돌로 보강하고 그 위에 초석을 두었으며 그 주위를 회랑을 둘렀다. 실내 중앙에는 길이 80cm, 너비 60cm인 장방형 돌기둥이 놓여 있다. 온돌시설로 보이는 연도가 폭 0.7m, 높이 25m, 길이 22m의 연통과 연결되어 있다. 이 건물지 서쪽에는 동서15m, 남북 14m로 거의 방형에 가까운 건물지가 있다. 이 건물에도 동벽 남쪽에 연도가 두 줄로 벽을 따라 북에서 서로 뻗어서 온돌시설을 이룬다. 폭은 2m, 길이 11m이다. 유물로는 연화문, 수면문, 인동문 와당 및 ‘연(延)’으로 보이는 문자가 새겨진 수키와를 비롯하여 암키와 등 기와류가 많고, 적색, 적갈색, 갈색의 니질 토기, 도끼 칼, 못 등의 철제품이 있다. 이에 발굴자들은 중앙 건물지의 돌기둥에 주목하여 이 건물을 392년(고국양왕 9)에 건립했다는 사직이나 종묘로 비정하기도 한다. 『여씨춘추』와 『회남자』 등의 고전에서 사(社)의 신주(神主)에 돌을 사용한 예를 근거로 한다. 한편, 초석, 기와, 와당 등의 건축자재와 토기, 철기, 도금한 장식품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5~6세기로 편년되는 연화문와당은 평양천도 이후에도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온돌의 형태로 보아 발해시기에도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