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찰(呼爾察)의 자연환경과 습속 및 홍치(弘治) 연간에 유리 등을 바쳤으나 효종(孝宗)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내용
화랄차(火剌箚)
주 001
각주 001)
는 국력이 미약하였다. 사방이 모두 산이었는데, 초목은 드물었다. 강물의 흐름은 구불구불했는데, 어하(魚蝦)가 살지 않았다. 성은 겨우 1리 정도였고, 모두 토옥(土屋)이었으며, 추장이 거처하는 곳도 비루하였다. 습속(習俗)은 승려를 공경히 대하였다. 영락 14년(1416)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여 진공했는데, [영락제는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모두 예를 갖추어 대우하도록 하였다. 홍치 5년(1492)에 그곳의 회회(回回)
파노만(怕魯灣) 등이 바닷길을 통하여 유리·마노(瑪瑙)주 002 등 여러 물품을 바쳤다. [그러나] 효종(孝宗)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비를 하사하여 돌려보냈다.주 003
火剌箚: 火箚剌의 誤記가 아닐까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면, 시르다리아 연변의 도시인 오트라르(Otrar)를 가리킨다. 오트라르는 중세 투르키스탄의 도시이다. 시르다리야강의 東岸, 그 지류 아리스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이다. 10세기 무렵에는 通商이 성행하여 시장이 번영하였다. 호라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도시가 되고, 그곳의 太守가 몽골의 隊商을 살해했기 때문에 칭기스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오트라르는 이 서부정벌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곧 부흥되었다. 1405년 티무르는 동부 정벌 도중 이 지방에서 죽었으며, 그 이후의 변천은 불분명하나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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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火剌箚: 火箚剌의 誤記가 아닐까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면, 시르다리아 연변의 도시인 오트라르(Otrar)를 가리킨다. 오트라르는 중세 투르키스탄의 도시이다. 시르다리야강의 東岸, 그 지류 아리스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이다. 10세기 무렵에는 通商이 성행하여 시장이 번영하였다. 호라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도시가 되고, 그곳의 太守가 몽골의 隊商을 살해했기 때문에 칭기스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오트라르는 이 서부정벌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곧 부흥되었다. 1405년 티무르는 동부 정벌 도중 이 지방에서 죽었으며, 그 이후의 변천은 불분명하나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 각주 002)
- 각주 003)
색인어
- 이름
- 효종(孝宗)
- 지명
- 화랄차(火剌箚), 회회(回回), 파노만(怕魯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