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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영산기촌(榮山忌寸; 사카야마노이미키)

영산기촌(榮山忌寸; 사카야마노이미키)
 당인(唐人) 정6위상[본 국악(國岳)에게 녹(綠)을 주었다.] 안자흠(晏子欽)이 입조하였다. 심유악(沈惟岳)과 같은 시기였다.
 
【주석】
1. 영산기촌(榮山忌寸)
영산(榮山)의 씨명에 대해서는 지명설과 미칭설이 있다. 『속일본기』 연력 3년(784) 6월조에 당인(唐人) 사록안자흠(賜綠晏子欽) 등이 영산기촌의 성을 받았다고 한다. 영산기촌의 옛 성은 안(晏)이다. 일족으로는 『유취국사』 78(賞賜, 延曆 17년 6월조)에 영산기촌제의(榮山忌寸諸依), 영산기촌천학(榮山忌寸千鶴)이 있다.
2. 안자흠(晏子欽)
안자흠은 『속일본기』 천평보자(天平寶字) 6년(762) 5월조에 당 사절의 일행 중 1인으로 ‘사병안자흠(司兵晏子欽)’으로 나온다. 그는 대사인 심유악(沈惟岳)에 대하여 뇌물을 받아 부정을 저질러 사절을 통솔할 자격이 없다고 고발한 바 있다. 이 사절단 일행이 본국으로 귀국하려 했지만 풍랑 등으로 일본에 체류하던 중에 정주했다고 보인다.
3. 국악(國岳)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앞의 ‘사병안자흠(司兵晏子欽)’에 근거하여 ‘국악(國岳)’을 ‘사병(司兵)’의 오사(誤寫)로 보았다. 사병은 『대당육전(大唐六典)』 에 나오듯이 당의 주현의 관직명이다. 안자흠은 월주(越州)의 사병(司兵)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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