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불제(三佛齊)의 특산과 풍속
현지 산물로는 홍등(紅藤)·자광(紫礦)·전침향(箋沈香)·빈랑(檳榔)·야자 등이 있다. 엽전[緡錢]은 사용하지 않으며, 금이나 은을 통해 모든 물품을 교역하는 것이 현지 습속이다. 기후는 사계절 내내 무덥고 추운 날이 적으며 겨울에도 서리나 눈이 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향유(香油)를 몸에 바른다. 그곳에는 밀은 없고 쌀과 청백두(靑白豆)만 생산되며, 닭·생선·거위·오리 등은 중국과 거의 비슷하다. 꽃술[花酒]·야자술·빈랑술주 001·꿀술[密酒] 등이 있는데, 누룩으로 양조한 것이 아닌데도 마시면 또한 취한다. 악기로는 소금(小琴)과 소고(小鼓) 등이 있으며, 곤륜노(崐崙奴)주 002
각주 002)
들은 곡의 리듬에 발을 맞추며 악기를 잘 다룬다. 국가의 문자로는 산스크리트어주 003崐崙奴: 중국인들이 검은 피부와 곱슬머리를 가진 동남아인에 대한 卑稱으로 사용한 말이다. 『舊唐書』 卷197 列傳 第147 「南蠻傳」 〈西南蠻 林邑〉조에 보면, “林邑으로부터 남쪽은 모두 곱슬머리에 피부가 검은데, 이를 통칭하여 ‘崑崙’으로 칭했다(自林邑以南, 皆卷髮黑身, 通號爲‘崑崙’)”는 기사가 보인다. 『大越史記全書』에도 767년에 하노이 일대가 곤륜사파(崑崙闍婆)에 의해 약탈을 당했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곤륜’이라는 용어가 중국 뿐 아니라 베트남에서도 ‘도서부 동남아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반영해준다.
각주 003)
를 사용하고, 왕의 반지를 인장으로 쓰며, 중국문자도 있지만 주로 장표(章表)를 상주할 때만 사용한다. 벽돌로 쌓아 만든 성은 둘레가 수십 리에 달하며, 야자 잎으로 지붕을 덮는다. 백성들은 성 밖에 산거하는데, 조세는 따로 내지 않지만 정벌이 있을 땐 수시로 징발하며, 추장을 세워 거느리게 하고 병기와 군량은 모두 스스로 마련하게 한다. 사신이 바다를 건너올 때 순풍을 타면 20일이면 광주에 도착한다.주 004 왕은 첨비(詹卑)주 005라 부르며 나라의 주민 대다수가 성이 포(蒲)주 006씨이다. 당 천우(天祐) 원년(904)에 조공으로 특산물을 바치자 사절로 온 도번장(都蕃長)주 007梵書: 『宋史』의 동남아, 인도와 관련된 많은 사실들이 趙汝适 『諸蕃志』의 내용을 참조한 것인데, 『諸蕃志』에서는 이 부분을 ‘番書’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스리비쟈야가 위치했던 수마트라는 인도문화 東漸의 전초기지로 불리던 곳이다. 특히 당시에는 스리비쟈야가 동남아 불교문화의 중심지여서, 산스크리트어(梵書)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따르면 당시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던 승려 60인 가운데 바다 길을 이용하여 이곳을 경유한 사람이 절반에 달하고, 이곳에서 불법을 연구하며 산스크리트어 불교경전을 번역한 사람이 15명 정도에 이른다고 했다. 당시 불교의 성행과 산스크리트어의 사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諸蕃志校釋(2000: 39)』
각주 007)
포가율립(蒲訶栗立)에게 영원장군(寧遠將軍)을 제수한 바 있다.都蕃長: 당대 이래 蕃商들의 활동이 급증하자, 당은 蕃坊이라는 외국인 집단 거주지를 설치하였다. 내국인과의 혼거를 방지하기 위해 坊墻을 쌓았고 번방 내부에서는 그들 가운데 蕃長, 都蕃長을 선출하여 동족내 범죄를 위시한 동족 내 사무는 스스로 처리하게 했다. 朱彧의 『萍州可談』에는 “廣州에 蕃坊이 있는데, 해외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蕃長 한 사람을 두어 蕃坊의 公私업무를 총괄케 했다 …… 蕃人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廣州 州治로 보내 사실을 심문한 뒤, 다시 蕃坊으로 보내 처리하도록 했다(廣州蕃坊, 海外諸國人聚居, 置蕃長一人, 管句蕃坊公私. …… 蕃人有罪, 詣廣州鞫實, 送蕃坊行遣).”는 기사가 확인된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梵書: 『宋史』의 동남아, 인도와 관련된 많은 사실들이 趙汝适 『諸蕃志』의 내용을 참조한 것인데, 『諸蕃志』에서는 이 부분을 ‘番書’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스리비쟈야가 위치했던 수마트라는 인도문화 東漸의 전초기지로 불리던 곳이다. 특히 당시에는 스리비쟈야가 동남아 불교문화의 중심지여서, 산스크리트어(梵書)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따르면 당시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던 승려 60인 가운데 바다 길을 이용하여 이곳을 경유한 사람이 절반에 달하고, 이곳에서 불법을 연구하며 산스크리트어 불교경전을 번역한 사람이 15명 정도에 이른다고 했다. 당시 불교의 성행과 산스크리트어의 사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諸蕃志校釋(2000: 39)』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都蕃長: 당대 이래 蕃商들의 활동이 급증하자, 당은 蕃坊이라는 외국인 집단 거주지를 설치하였다. 내국인과의 혼거를 방지하기 위해 坊墻을 쌓았고 번방 내부에서는 그들 가운데 蕃長, 都蕃長을 선출하여 동족내 범죄를 위시한 동족 내 사무는 스스로 처리하게 했다. 朱彧의 『萍州可談』에는 “廣州에 蕃坊이 있는데, 해외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蕃長 한 사람을 두어 蕃坊의 公私업무를 총괄케 했다 …… 蕃人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廣州 州治로 보내 사실을 심문한 뒤, 다시 蕃坊으로 보내 처리하도록 했다(廣州蕃坊, 海外諸國人聚居, 置蕃長一人, 管句蕃坊公私. …… 蕃人有罪, 詣廣州鞫實, 送蕃坊行遣).”는 기사가 확인된다.
색인어
- 이름
- 포가율립(蒲訶栗立)
- 지명
- 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