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포감(蒲甘)의 상언(上言)

  • 국가
    포감(蒲甘)
포감국(蒲甘國) 주 001
각주 001)
蒲甘國: 미얀마의 옛 이름으로 정식 국명은 파간(Pagan)이다. 파간은 미얀마의 선주민인 티베트-버마(Tibeto-Burman)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퓨(Pyu)족과 몬-크메르어 계통의 몬족을 몰아내고 9세기경에 건국하였다. 11세기 이후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을 이룬다.
닫기
이 숭녕 5년(1106)에 사신을 보내 입공한지라, 조서를 내려 예질(禮秩)을 주련(注輦) 주 002
각주 002)
注輦: 인도 남부 지역에 있었던 고대 왕국으로 정식국명은 촐라(Cola)이다. 마우리아왕조(전322~전185)의 비문에 처음으로 국명이 출현하기 시작하며, 그리스 로마 문헌에서는 Sora로, 산스크리트어에서는 Cola나 Chola로, 아랍 문헌에는 Culiyan이나 Soli 혹은 Maabar로 표기하고 있다(陳佳榮 等, 1986: 929 참조).
닫기
과 동일하게 대우하도록 했다. 상서성에서 상언하기를, “주련삼불제 주 003
각주 003)
三佛齊: 정식 국명은 스리비자야(Srivijaya)로 『新唐書』 「外國傳」과 義淨의 『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는 室利佛逝로 기록되어 있다. 7세기경 수마트라 동남부 팔렘방(Palembang) 지역을 중심으로 흥기하여 동남아 해상교역권을 장악했으며, 전성기에는 말레이반도의 국가들과 자바 일대를 평정하여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해양제국으로 평가된다. 11세기까지 동서 교역을 지배했으나, 11세기 인도에서 일어난 촐라(Chola) 왕국의 공격을 받으면서 쇠퇴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마자파히트(Majapahit)가 이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최병욱, 2006: 57 참조).
닫기
에 역속(役屬)주 004
각주 004)
役屬: 강력한 권력에 예속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史記』 「南越列傳」에는 閩越·西甌·駱등이 당시 강력했던 趙陀의 南越에 역속되었다는 내용이, 『新唐書』 「西域傳」上 〈焉耆〉에는 언기국이 西突厥에 역속되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史記』 「南越列傳」: “佗因此以兵威邊, 財物賂遺閩越·西甌·駱, 役屬焉, 東西萬餘里.”, 『新唐書』 「西域傳」上 〈焉耆〉: “〈焉耆國〉戶四千, 勝兵二千, 常役屬西突厥.”
닫기
한지라, 희녕(熙寧) 연간주 005
각주 005)
故熙寧中: 『宋史』에서는 故자를 胡로 誤記했으나, 『文獻通考』 卷332 「四裔考」에 의거하여 ‘故’자로 수정하였다.
닫기
(1068~1077)에는 칙서를 대배지(大背紙)에 작성한 뒤 상자[匣]에 넣어 보자기[襆]로 묶게 했으나, 오늘의 포감국은 대국의 왕(大國王)이 되었으니, 작은 속국으로 낮춰볼 수 없습니다. 대식(大食) 주 006
각주 006)
大食: Tazi 혹은 Tajiks를 음역한 말로서 페르시아어로 이란의 한 종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唐代이래 대체로 아랍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新·舊唐書』, 『經行記』, 『嶺外代答』, 『諸蕃志』, 『宋史』등에서는 모두 大食이라 음역한데 반해, 『求法高僧傳』 「玄昭傳」에서는 ‘多氏’로, 『往五天竺國傳』에서는 ‘大實’로, 『唐大和尙東征傳』과 『冊府元龜』 卷907에서는 ‘大石’으로 음역하고 있다.
닫기
이나 교지(交阯) 주 007
각주 007)
交阯: 베트남 고대왕국을 일컫는 명칭. 중국사서에는 『尙書』 「堯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南交’라고 지칭하고 있다. 향후 『墨子』, 『淮南子』, 『史記』 등에서 ‘交阯’ 혹은 ‘交趾’를 언급하기 시작한다. 前漢 때 南越王 趙佗가 처음으로 交趾郡을 설치하였다. 漢 武帝 元鼎 6년(전111)에는 무제의 팽창정책으로 漢나라로 완전 귀속되었다. 관할 지역은 지금의 베트남 북부 일대였다. 後漢 獻帝 建安 8년(203)에는 交州 刺史가 설치되는데 治所는 廣信縣(지금의 廣西省 梧州市)이었다. 삼국시대에는 吳가 이 지역을 交州와 廣州로 나누어 통치했는데, 관할 지역은 지금의 廣西省 欽州 지구·廣東省 雷州半島 일대와 베트남의 北部와 中部 지역이다. 隋代에 잠시 폐지했다가 唐 高祖 武德 5년(622) 다시 설치되는데, 治所는 交趾縣(베트남 하노이시 서북부)였다(史爲樂, 2005). 당대 후반기 이래 당의 지배체제가 이완되면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데, 오대시기에 홍강(紅江) 유역의 토착세력이었던 응오꾸엔(NgoQuyen)이 南漢의 침략을 저지하고 939년 마침내 새로운 왕조를 세워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약 반세기 간의 혼란기를 거쳐서 마침내 최초의 장기왕조인 리(Ly, 李) 왕조(1009~1225)가 건립되었는데, 중국 측의 책봉을 받고 주로 ‘安南’이나 ‘交趾’로 불리었지만, 베트남의 왕들은 스스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다이비엣(大越)이라는 국명을 통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강자로 군림하며 독자적인 조공체제를 유지하려 했다(최병욱, 2006: 60~61, 152~53).
닫기
와 같은 제 국가들에 대한 예절에 준하여 무릇 조서를 작성할 때에는, 배면에 금화(金花)를 수놓은 비단을 댄 백지[白背金花綾紙]에 글을 쓰고, 사이사이를 금으로 도금한 자물통[管籥]주 008
각주 008)
管籥: 원래 管과 籥 모두 악기를 가리키는 명칭이었으나, 후대에는 주로 잠금장치가 되어있는 상자를 일컬을 때 사용된다. 『禮記』 「月令」 〈孟冬之月〉에 “脩鍵閉, 愼管籥.”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 鄭玄 注에서는 “管籥, 搏鍵器也.”라고 일컫고 있으며, 孔穎達의 疏에서는 “以鐵爲之, 似樂器之管籥, 搢於鏁內以搏取其鍵也.”라고 하였다.
닫기
에 넣은 뒤, 금견(錦絹)으로 묶어 함봉한 뒤에 보내야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게 했다.

  • 각주 001)
    蒲甘國: 미얀마의 옛 이름으로 정식 국명은 파간(Pagan)이다. 파간은 미얀마의 선주민인 티베트-버마(Tibeto-Burman)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퓨(Pyu)족과 몬-크메르어 계통의 몬족을 몰아내고 9세기경에 건국하였다. 11세기 이후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을 이룬다. 바로가기
  • 각주 002)
    注輦: 인도 남부 지역에 있었던 고대 왕국으로 정식국명은 촐라(Cola)이다. 마우리아왕조(전322~전185)의 비문에 처음으로 국명이 출현하기 시작하며, 그리스 로마 문헌에서는 Sora로, 산스크리트어에서는 Cola나 Chola로, 아랍 문헌에는 Culiyan이나 Soli 혹은 Maabar로 표기하고 있다(陳佳榮 等, 1986: 929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3)
    三佛齊: 정식 국명은 스리비자야(Srivijaya)로 『新唐書』 「外國傳」과 義淨의 『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는 室利佛逝로 기록되어 있다. 7세기경 수마트라 동남부 팔렘방(Palembang) 지역을 중심으로 흥기하여 동남아 해상교역권을 장악했으며, 전성기에는 말레이반도의 국가들과 자바 일대를 평정하여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해양제국으로 평가된다. 11세기까지 동서 교역을 지배했으나, 11세기 인도에서 일어난 촐라(Chola) 왕국의 공격을 받으면서 쇠퇴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마자파히트(Majapahit)가 이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최병욱, 2006: 57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4)
    役屬: 강력한 권력에 예속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史記』 「南越列傳」에는 閩越·西甌·駱등이 당시 강력했던 趙陀의 南越에 역속되었다는 내용이, 『新唐書』 「西域傳」上 〈焉耆〉에는 언기국이 西突厥에 역속되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史記』 「南越列傳」: “佗因此以兵威邊, 財物賂遺閩越·西甌·駱, 役屬焉, 東西萬餘里.”, 『新唐書』 「西域傳」上 〈焉耆〉: “〈焉耆國〉戶四千, 勝兵二千, 常役屬西突厥.” 바로가기
  • 각주 005)
    故熙寧中: 『宋史』에서는 故자를 胡로 誤記했으나, 『文獻通考』 卷332 「四裔考」에 의거하여 ‘故’자로 수정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大食: Tazi 혹은 Tajiks를 음역한 말로서 페르시아어로 이란의 한 종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唐代이래 대체로 아랍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新·舊唐書』, 『經行記』, 『嶺外代答』, 『諸蕃志』, 『宋史』등에서는 모두 大食이라 음역한데 반해, 『求法高僧傳』 「玄昭傳」에서는 ‘多氏’로, 『往五天竺國傳』에서는 ‘大實’로, 『唐大和尙東征傳』과 『冊府元龜』 卷907에서는 ‘大石’으로 음역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交阯: 베트남 고대왕국을 일컫는 명칭. 중국사서에는 『尙書』 「堯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南交’라고 지칭하고 있다. 향후 『墨子』, 『淮南子』, 『史記』 등에서 ‘交阯’ 혹은 ‘交趾’를 언급하기 시작한다. 前漢 때 南越王 趙佗가 처음으로 交趾郡을 설치하였다. 漢 武帝 元鼎 6년(전111)에는 무제의 팽창정책으로 漢나라로 완전 귀속되었다. 관할 지역은 지금의 베트남 북부 일대였다. 後漢 獻帝 建安 8년(203)에는 交州 刺史가 설치되는데 治所는 廣信縣(지금의 廣西省 梧州市)이었다. 삼국시대에는 吳가 이 지역을 交州와 廣州로 나누어 통치했는데, 관할 지역은 지금의 廣西省 欽州 지구·廣東省 雷州半島 일대와 베트남의 北部와 中部 지역이다. 隋代에 잠시 폐지했다가 唐 高祖 武德 5년(622) 다시 설치되는데, 治所는 交趾縣(베트남 하노이시 서북부)였다(史爲樂, 2005). 당대 후반기 이래 당의 지배체제가 이완되면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데, 오대시기에 홍강(紅江) 유역의 토착세력이었던 응오꾸엔(NgoQuyen)이 南漢의 침략을 저지하고 939년 마침내 새로운 왕조를 세워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약 반세기 간의 혼란기를 거쳐서 마침내 최초의 장기왕조인 리(Ly, 李) 왕조(1009~1225)가 건립되었는데, 중국 측의 책봉을 받고 주로 ‘安南’이나 ‘交趾’로 불리었지만, 베트남의 왕들은 스스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다이비엣(大越)이라는 국명을 통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강자로 군림하며 독자적인 조공체제를 유지하려 했다(최병욱, 2006: 60~61, 152~53). 바로가기
  • 각주 008)
    管籥: 원래 管과 籥 모두 악기를 가리키는 명칭이었으나, 후대에는 주로 잠금장치가 되어있는 상자를 일컬을 때 사용된다. 『禮記』 「月令」 〈孟冬之月〉에 “脩鍵閉, 愼管籥.”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 鄭玄 注에서는 “管籥, 搏鍵器也.”라고 일컫고 있으며, 孔穎達의 疏에서는 “以鐵爲之, 似樂器之管籥, 搢於鏁內以搏取其鍵也.”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색인어
지명
포감국(蒲甘國), 주련(注輦), 주련, 삼불제, 포감국, 대식(大食), 교지(交阯)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포감(蒲甘)의 상언(上言) 자료번호 : jo.k_0020_0489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