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감(蒲甘)의 상언(上言)
포감국(蒲甘國)
주 001이 숭녕 5년(1106)에 사신을 보내 입공한지라, 조서를 내려 예질(禮秩)을 주련(注輦)
주 002과 동일하게 대우하도록 했다. 상서성에서 상언하기를, “주련은 삼불제
주 003
각주 003)
에 역속(役屬)주 004한지라, 희녕(熙寧) 연간주 005(1068~1077)에는 칙서를 대배지(大背紙)에 작성한 뒤 상자[匣]에 넣어 보자기[襆]로 묶게 했으나, 오늘의 포감국은 대국의 왕(大國王)이 되었으니, 작은 속국으로 낮춰볼 수 없습니다. 대식(大食)
주 006이나 교지(交阯)
주 007三佛齊: 정식 국명은 스리비자야(Srivijaya)로 『新唐書』 「外國傳」과 義淨의 『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는 室利佛逝로 기록되어 있다. 7세기경 수마트라 동남부 팔렘방(Palembang) 지역을 중심으로 흥기하여 동남아 해상교역권을 장악했으며, 전성기에는 말레이반도의 국가들과 자바 일대를 평정하여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해양제국으로 평가된다. 11세기까지 동서 교역을 지배했으나, 11세기 인도에서 일어난 촐라(Chola) 왕국의 공격을 받으면서 쇠퇴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마자파히트(Majapahit)가 이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최병욱, 2006: 57 참조).
각주 007)
와 같은 제 국가들에 대한 예절에 준하여 무릇 조서를 작성할 때에는, 배면에 금화(金花)를 수놓은 비단을 댄 백지[白背金花綾紙]에 글을 쓰고, 사이사이를 금으로 도금한 자물통[管籥]주 008에 넣은 뒤, 금견(錦絹)으로 묶어 함봉한 뒤에 보내야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게 했다.交阯: 베트남 고대왕국을 일컫는 명칭. 중국사서에는 『尙書』 「堯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南交’라고 지칭하고 있다. 향후 『墨子』, 『淮南子』, 『史記』 등에서 ‘交阯’ 혹은 ‘交趾’를 언급하기 시작한다. 前漢 때 南越王 趙佗가 처음으로 交趾郡을 설치하였다. 漢 武帝 元鼎 6년(전111)에는 무제의 팽창정책으로 漢나라로 완전 귀속되었다. 관할 지역은 지금의 베트남 북부 일대였다. 後漢 獻帝 建安 8년(203)에는 交州 刺史가 설치되는데 治所는 廣信縣(지금의 廣西省 梧州市)이었다. 삼국시대에는 吳가 이 지역을 交州와 廣州로 나누어 통치했는데, 관할 지역은 지금의 廣西省 欽州 지구·廣東省 雷州半島 일대와 베트남의 北部와 中部 지역이다. 隋代에 잠시 폐지했다가 唐 高祖 武德 5년(622) 다시 설치되는데, 治所는 交趾縣(베트남 하노이시 서북부)였다(史爲樂, 2005). 당대 후반기 이래 당의 지배체제가 이완되면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데, 오대시기에 홍강(紅江) 유역의 토착세력이었던 응오꾸엔(NgoQuyen)이 南漢의 침략을 저지하고 939년 마침내 새로운 왕조를 세워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약 반세기 간의 혼란기를 거쳐서 마침내 최초의 장기왕조인 리(Ly, 李) 왕조(1009~1225)가 건립되었는데, 중국 측의 책봉을 받고 주로 ‘安南’이나 ‘交趾’로 불리었지만, 베트남의 왕들은 스스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다이비엣(大越)이라는 국명을 통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강자로 군림하며 독자적인 조공체제를 유지하려 했다(최병욱, 2006: 60~61, 152~53).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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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三佛齊: 정식 국명은 스리비자야(Srivijaya)로 『新唐書』 「外國傳」과 義淨의 『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는 室利佛逝로 기록되어 있다. 7세기경 수마트라 동남부 팔렘방(Palembang) 지역을 중심으로 흥기하여 동남아 해상교역권을 장악했으며, 전성기에는 말레이반도의 국가들과 자바 일대를 평정하여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해양제국으로 평가된다. 11세기까지 동서 교역을 지배했으나, 11세기 인도에서 일어난 촐라(Chola) 왕국의 공격을 받으면서 쇠퇴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마자파히트(Majapahit)가 이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최병욱, 2006: 57 참조).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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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交阯: 베트남 고대왕국을 일컫는 명칭. 중국사서에는 『尙書』 「堯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南交’라고 지칭하고 있다. 향후 『墨子』, 『淮南子』, 『史記』 등에서 ‘交阯’ 혹은 ‘交趾’를 언급하기 시작한다. 前漢 때 南越王 趙佗가 처음으로 交趾郡을 설치하였다. 漢 武帝 元鼎 6년(전111)에는 무제의 팽창정책으로 漢나라로 완전 귀속되었다. 관할 지역은 지금의 베트남 북부 일대였다. 後漢 獻帝 建安 8년(203)에는 交州 刺史가 설치되는데 治所는 廣信縣(지금의 廣西省 梧州市)이었다. 삼국시대에는 吳가 이 지역을 交州와 廣州로 나누어 통치했는데, 관할 지역은 지금의 廣西省 欽州 지구·廣東省 雷州半島 일대와 베트남의 北部와 中部 지역이다. 隋代에 잠시 폐지했다가 唐 高祖 武德 5년(622) 다시 설치되는데, 治所는 交趾縣(베트남 하노이시 서북부)였다(史爲樂, 2005). 당대 후반기 이래 당의 지배체제가 이완되면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데, 오대시기에 홍강(紅江) 유역의 토착세력이었던 응오꾸엔(NgoQuyen)이 南漢의 침략을 저지하고 939년 마침내 새로운 왕조를 세워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약 반세기 간의 혼란기를 거쳐서 마침내 최초의 장기왕조인 리(Ly, 李) 왕조(1009~1225)가 건립되었는데, 중국 측의 책봉을 받고 주로 ‘安南’이나 ‘交趾’로 불리었지만, 베트남의 왕들은 스스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다이비엣(大越)이라는 국명을 통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강자로 군림하며 독자적인 조공체제를 유지하려 했다(최병욱, 2006: 60~61, 152~53).
- 각주 008)
색인어
- 지명
- 포감국(蒲甘國), 주련(注輦), 주련, 삼불제, 포감국, 대식(大食), 교지(交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