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기장군(곽거병)이 흉노 서역의 군대를 격파하고 혼야왕이 한나라에 투항하면서 이후 한나라가 흉노를 사막의 북쪽까지 쫒아냄
장건은 교위(校尉)주 001의 신분으로 대장군(大將軍)주 002을 따라 흉노를 공격했는데, 수초(水草)가 있는 곳을 알아서 군대가 그 부족함이 없게 되었으므로, 이에 장건을 봉하여 박망후(博望侯)
주 003로 삼았으니 그 해는 원삭(元朔) 6년(전123)이었다. 그 다음해주 004에 장건은 위위(衛尉)주 005가 되어 이장군(李將軍)주 006
각주 006)
과 함께 우북평(右北平)
주 007을 나서 흉노를 공격하였다. 흉노가 이장군을 포위하여 군인들 가운데 망실(亡失)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장건은 기일에 늦어 마땅히 참형을 받아야 했으나 속전(贖錢)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그 해에 한나라는 표기장군(驃騎將軍)주 008李將軍 : 李廣(? ~ 전119).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에 立傳된 인물이다. 隴西 成紀(현재의 甘肅 安北)人. 文帝 때 匈奴戰에 종군하여 郞이 되었고, 활을 잘 쏘아 文帝를 따라 사냥에 자주 나갔다. 景帝가 즉위하자 騎郞將이 되고, 吳·楚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軍功을 세워, 후일 上谷·上郡·隴西·北地·雁門·雲中 등 北邊의 郡太守를 역임하며 여러 차례 흉노와 전투를 벌였다. 武帝 때에 未央衛尉가 되었고, 元光 6년(전129)에는 驍騎將軍이 되어 雁門을 나서서 匈奴를 공격했으나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胡馬를 탈취하여 귀환하여, 斬刑은 면하고 庶人으로 강등되었다. 후일 右北平 太守가 되었고, 元朔 6년(전123)에는 郞中令의 지위로서 將軍이 되었다. 元狩 4년(전119) 大將軍 衛靑을 따라 匈奴원정에 나섰으나 길을 잃고 기약한 날짜를 어기자 自殺하고 말았다. 평소 원정할 때에는 部曲이 없이 行陣했으며, 夜營할 때에도 刁斗를 두드리지 않아 병사들을 편히 쉬게 하였고, 賞賜가 있으면 부하들에게 곧바로 나누어 주어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고 한다. 흉노와도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그 명성이 매우 높았으나 끝내 封侯를 받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각주 008)
을 보내서 흉노 서역주 009의 군대 수만 명을 격파하고 기련산(祁連山)에 이르렀다.주 010驃騎將軍 : 霍去病(? ~ 전117).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漢書』 卷55 「衛靑·霍去病傳」에 立傳된 인물이다. 河東 平陽(현재의 山西 臨汾 西南)人. 어려서 말이 적었으나 과감하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한다. 처음에 侍中이 되었다가 驃騎校尉의 신분으로 大將軍 衛靑을 따라 흉노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고 冠軍侯에 봉해졌다. 그 후 여러 차례 出塞하여 많은 적군을 斬獲하였다. 元狩 2년(전121) 驃騎將軍이 되어 隴西를 나서서 焉支山을 지나 匈奴休屠王의 祭天金人을 획득하고, 같은 해에 北地를 나서서 居延을 지나자 渾邪王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4년(전119)에 霍去病은 代郡을 나서고 衛靑은 定襄을 나서서 兩軍이 漠北을 원정했는데, 翰海(바이칼 호수)까지 갔다가 귀환했다. 大司馬로 加封되었고, 秩祿은 大將軍 衛靑에 견줄 정도였다. 현재의 陝西省 興平에 있는 漢武帝의 茂陵 옆에 霍去病의 墓가 있다.
각주 010)
그 다음해주 011에 혼야왕(渾邪王)주 012이 그 백성들을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니, 금성(金城)
주 013과 하서(河西)의 서쪽, 그리고 남산(南山)
주 014에서 염택에 이르기까지 흉노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때로 흉노가 척후를 보내어 오기도 했지만 그것도 드물었다. 그 후 2년 뒤주 015
한나라는 선우를 공격하여 사막의 북쪽[幕北]으로 쫓아 버렸다.祁連山 : 『史記』 卷110 「匈奴列傳」에는 다음과 같은 『正義』의 주석이 첨가되어 있다. “焉의 音은 ‘烟’이다. 『括地志』에 ‘焉支山은 일명 刪丹山이며 甘州 刪丹縣 東南 50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西河故事』에는 ‘匈奴가 祁連·﹑焉支 두 산을 잃고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亡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失我焉支山, 使我婦女無顏色(나의 祁連山을 잃었으니 나의 가축들이 번식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나의 焉支山을 잃었으니 나의 婦女들이 顏色을 잃게 되었구나!)」. 그들의 섭섭함이 이와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焉支山은 ‘燕支山’이라고 표기되기도 하며, 『穆天子傳』의 ‘焉居’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흉노인들이 祁連과 焉支를 구별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두 개의 다른 산줄기로 추정된다. 焉支山은 현재 甘肅 永昌의 서쪽, 즉 山丹 동남쪽에 있는 산이 아니라, 新疆의 바르쿨(巴里坤) 동쪽, 즉 천산산맥 東端의 高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哈爾里克(Qaraliq)山이라고 불리우며 이 명칭은 투르크어로 ‘黑山’을 뜻한다. 그런데 토하라어에서도 黑色은 arkent(A방언) 혹은 erkent(B방언)이라고 불리우는데, 焉支·焉居는 이것을 音寫한 말이다(林梅村 1998 : 74 참조). 그렇다면 焉耆라는 도시도 토하라어에서 ‘黑色’을 뜻하는 arkent/erkent에서 기원한 명칭임이 분명하며, 후일 투르크인들이 그곳을 점유한 뒤 Qarashahr(‘黑城’이라는 뜻)로 불리우게 된 것도 그 의미가 습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李將軍 : 李廣(? ~ 전119).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에 立傳된 인물이다. 隴西 成紀(현재의 甘肅 安北)人. 文帝 때 匈奴戰에 종군하여 郞이 되었고, 활을 잘 쏘아 文帝를 따라 사냥에 자주 나갔다. 景帝가 즉위하자 騎郞將이 되고, 吳·楚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軍功을 세워, 후일 上谷·上郡·隴西·北地·雁門·雲中 등 北邊의 郡太守를 역임하며 여러 차례 흉노와 전투를 벌였다. 武帝 때에 未央衛尉가 되었고, 元光 6년(전129)에는 驍騎將軍이 되어 雁門을 나서서 匈奴를 공격했으나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胡馬를 탈취하여 귀환하여, 斬刑은 면하고 庶人으로 강등되었다. 후일 右北平 太守가 되었고, 元朔 6년(전123)에는 郞中令의 지위로서 將軍이 되었다. 元狩 4년(전119) 大將軍 衛靑을 따라 匈奴원정에 나섰으나 길을 잃고 기약한 날짜를 어기자 自殺하고 말았다. 평소 원정할 때에는 部曲이 없이 行陣했으며, 夜營할 때에도 刁斗를 두드리지 않아 병사들을 편히 쉬게 하였고, 賞賜가 있으면 부하들에게 곧바로 나누어 주어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고 한다. 흉노와도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그 명성이 매우 높았으나 끝내 封侯를 받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 각주 007)
-
각주 008)
驃騎將軍 : 霍去病(? ~ 전117).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漢書』 卷55 「衛靑·霍去病傳」에 立傳된 인물이다. 河東 平陽(현재의 山西 臨汾 西南)人. 어려서 말이 적었으나 과감하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한다. 처음에 侍中이 되었다가 驃騎校尉의 신분으로 大將軍 衛靑을 따라 흉노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고 冠軍侯에 봉해졌다. 그 후 여러 차례 出塞하여 많은 적군을 斬獲하였다. 元狩 2년(전121) 驃騎將軍이 되어 隴西를 나서서 焉支山을 지나 匈奴休屠王의 祭天金人을 획득하고, 같은 해에 北地를 나서서 居延을 지나자 渾邪王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4년(전119)에 霍去病은 代郡을 나서고 衛靑은 定襄을 나서서 兩軍이 漠北을 원정했는데, 翰海(바이칼 호수)까지 갔다가 귀환했다. 大司馬로 加封되었고, 秩祿은 大將軍 衛靑에 견줄 정도였다. 현재의 陝西省 興平에 있는 漢武帝의 茂陵 옆에 霍去病의 墓가 있다.
- 각주 009)
-
각주 010)
祁連山 : 『史記』 卷110 「匈奴列傳」에는 다음과 같은 『正義』의 주석이 첨가되어 있다. “焉의 音은 ‘烟’이다. 『括地志』에 ‘焉支山은 일명 刪丹山이며 甘州 刪丹縣 東南 50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西河故事』에는 ‘匈奴가 祁連·﹑焉支 두 산을 잃고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亡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失我焉支山, 使我婦女無顏色(나의 祁連山을 잃었으니 나의 가축들이 번식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나의 焉支山을 잃었으니 나의 婦女들이 顏色을 잃게 되었구나!)」. 그들의 섭섭함이 이와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焉支山은 ‘燕支山’이라고 표기되기도 하며, 『穆天子傳』의 ‘焉居’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흉노인들이 祁連과 焉支를 구별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두 개의 다른 산줄기로 추정된다. 焉支山은 현재 甘肅 永昌의 서쪽, 즉 山丹 동남쪽에 있는 산이 아니라, 新疆의 바르쿨(巴里坤) 동쪽, 즉 천산산맥 東端의 高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哈爾里克(Qaraliq)山이라고 불리우며 이 명칭은 투르크어로 ‘黑山’을 뜻한다. 그런데 토하라어에서도 黑色은 arkent(A방언) 혹은 erkent(B방언)이라고 불리우는데, 焉支·焉居는 이것을 音寫한 말이다(林梅村 1998 : 74 참조). 그렇다면 焉耆라는 도시도 토하라어에서 ‘黑色’을 뜻하는 arkent/erkent에서 기원한 명칭임이 분명하며, 후일 투르크인들이 그곳을 점유한 뒤 Qarashahr(‘黑城’이라는 뜻)로 불리우게 된 것도 그 의미가 습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색인어
- 이름
- 장건, 장건, 박망후(博望侯), 장건, 장건
- 지명
- 우북평(右北平), 한나라, 기련산(祁連山), 한나라, 금성(金城), 하서(河西), 남산(南山), 염택, 한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