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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비아랍성

費阿拉城
  • 저필자
    표영관
  • 시대
    고구려/후금
  • 위치
  • 원소장처
    요녕성 무순시 신빈만족자치현 영릉진 이도하자촌(中國 遼寧省 撫順市 新賓滿族自治縣 永陵镇 二道河子村/中華人民共和国遼寧省撫順市新賓満族自治県費阿拉城)
  • 시대
    고구려
  • 유형
입지
신빈현 영릉진 이도하촌 동남쪽 1km 떨어진 비아랍성의 내성
유적개관
명대 성인 비아랍성의 내성이 고구려 성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文物地圖集」
해설
비아랍성은 불아랍성(佛阿拉城);, 이도하자구로성(二道河子舊老城), 구로성(舊老城)으로도 불리는 산성이다. 청(淸) 태조 누루하치(奴爾哈赤)가 1587년 축조하여 1603년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도성으로 사용한 한왕전(汗王殿)으로 추정된다. 비아랍, 불아랍은 만주어로 옛 성(舊城)을 의미하고 구로성도 같은 의미로, 누르하치가 성을 축조하기 이전에 기존 성터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9년 도엽암길, 고교광사랑(稻葉巖吉, 高橋匡四郞)등 일본인들의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1941년, 1979년, 1986년, 1987년, 2000년, 2009년까지 수차례 조사가 있었다.
동쪽·남쪽·서쪽 등 3면은 산지로 둘러싸였고, 서북쪽은 소자하(蘇子河)의 지류로 가로막힌 천혜의 요새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375m의 합이살산(哈爾薩山)에서 뻗어 내린 능선을 따라 성곽을 쌓았고,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1939년 보고에서는 내성과 외성 사이에 차단벽이 있어 이를 중성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내성 둘레는 960m, 외성의 둘레는 5,660m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 성벽 중 내성이 비교적 견고하고 파괴가 적어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이 가장 양호하다.
성벽은 돌과 흙을 섞어 쌓고, 다시 흙을 쌓아 올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1994년 조사에서는 토석으로 기초를 다지고 나무를 교대로 쌓아 올리는 축성방식인 ‘항축포연식축법(夯筑布椽式築法)’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건주여진(建州女真)의 축성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성문은 외성에서 5곳, 내성에서 6곳이 발견되었고, 성벽보다 안 쪽으로 성문을 배치한 옹성(甕城)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또 망대(望臺)와 평대(平臺), 건물터 등도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누루하치와 관련된 궁궐지, 주거지, 유물 등이 확인되었고 이는 비아랍성에 대한 기록들과도 일치하였다. 그런데 비아랍성은 일찍부터 고구려의 산성으로 추정되었다. 비아랍성은 계곡을 이용한 포곡식 산성인 점과 자연석 위에 흙을 쌓은 축조방식, 성벽보다 성문을 안쪽에 ‘U’자형으로 설치한 옹성구조 등 고구려 산성의 주요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산성의 지리적 위치 또한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영릉진은 지역은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환인지역으로 진입하는 교통로 상에 자리 잡고 있고, 현재 길림성 집안(集安)인 국내성(國內城)으로의 길목이기도 하다. 실제로 누루하치의 건주여진족이 압록강 유역에서 조선군에게 쫓겨 피신한 곳이 바로 비아랍성이기도 하다.
또 1939년과 1994년 조사에서 고구려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보고된 적이 있고, 서남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에서 고구려 적석묘(積石墓)가 대량으로 발견된 것도 이러한 가능성을 높이는 단서이다. 그런데 중국고고학계에서는 2000년, 2009년 조사 보고에서 고구려 유물은 출토된 적이 없기 때문에 고구려성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남소성·목저성·창암성 등으로 비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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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아랍성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9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