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백채지유적

白菜地遺址
  • 저필자
    표영관
  • 시대
    고구려
  • 원소장처
    요녕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 대서차진 백채지촌 황가대원(遼寧省 丹東市 寬甸滿族自治縣 大西岔鎭 白菜地村 黃家大院)
  • 시대
    고구려
  • 유형
입지
관전현 대서차진 대백채지촌 황가대원둔 동북 500m 떨어진 계곡 내 위치
유적개관
유적은 산 계곡 내에 위치해 있는데, 길이 200m, 폭 10m, 높이 3m가량의 석축 담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文物地圖集」
해설
관전만족자치현 현(縣)중심에서 동쪽으로 37km 지점에 위치한 백채지촌 황가대원의 계곡에서 발견된 산성유적이다.
성벽은 자연 석괴를 사용하여 축조하였는데, 계곡을 가로지른 길이 200m, 너비 10m, 높이 3m 가량의 성벽 한 줄이 잔존하고 있다. 파괴와 훼손이 심하여 원형을 알기 어려우나, 축성방법과 역사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했을 때 고구려의 방어시설로 이해되며, 규모를 보아 관애(關隘)로 파악된다.
단동 지역은 한(漢)이 요동군에 소속시킨 서안평(西安平/북안평)으로 비정되고 있다. 서안평은 요동지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바다를 통한 교섭과 무역의 창구이기도 했다. 때문에 고구려는 줄곧 서안평으로의 진출을 위해서 중국세력과 분쟁을 거듭하였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311년 마침내 서안평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서안평의 확보로 고구려는 압록강 남쪽, 한반도 내에 존재했던 중국의 한사군(漢四郡)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중국세력과 분리 고립시키고 이들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고구려의 숙원인 요동으로의 진출에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기도 하다. 고구려 첫 도읍인 환인(桓仁)이나 집안(集安/국내성)에서는 험준한 산맥이 요동평원까지 중첩되어 있는데 비해, 단동에서는 비교적 완만한 지역을 지나 요하의 하구인 영구(營口)까지 진출하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토 확장은 반대로 방어지역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 고구려가 한반도 내부의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단동과 압록강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황해에서 압록강을 따라 집안까지 가는 수로는 방어의 최우선 과제였음에 분명하다.
백채지관애는 규모는 작지만, 단동까지는 서남쪽으로 100km, 집안까지 동북으로 94km 떨어진 압록강의 정중앙 이라는 군사요충지역에 위치해 있다. 또 남쪽 5km 지점에서 압록강과 접하고 산성의 정상부분에서는 동쪽부터 남서쪽까지 압록강의 조망이 가능한 최적의 입지에 위치해 있다.
백채지관애는 고구려의 압록강 유역 경영의 일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고구려 수도 방어체계를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단서를 제공하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백채지유적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7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