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1908년 6월 한국주둔 일본군 참모부에서 받은 소식

Известия, полученныя Штабом Японской армий в Корее в июне 1908 г.
  • 구분
    보고서 첨부문서
  • 저필자
    플란손
  • 수신자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
  • 발송일
    1908년 7월 5일(1908년 7월 5일)
  • 문서번호
    АВПРИ,ф.150,оп.493,д.30,лл.306-309об.
  • 원소장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대분류
    사회운동
  • 세부분류
    의병/독립운동
  • 주제어
    의병투쟁, 항일투쟁
  • 색인어
    무장봉기, 헌병, 일본군, 경찰, 보성, 영흥, 서흥, 함양, 덕천, 서창, 풍덕, 강호, 창성, 홍천, 순천, 함열, 동복, 신계, 고원, 영천, 금호, 충주, 고원, 영월, 함양, 마전, 독시필, 북청, 안동, 홍성, 이천, 해미, 양천, 충주
  • 형태사항
    6  , 타이핑  , 러시아어 
첨부문서 1.주 001
번역주 001)
이는 플란손이 1908.7.5. 서울에서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А.П.Извольский)에게 보낸 보고서에 첨부한 문서임, 1908.9.13.자 플란손의 보고서 참조
닫기
№25(1908년)에 첨부
서울
 
6월 1일(14일)주 002
번역주 002)
1일(14일)에서 1일은 혁명전 러시아 구력이고 괄호안의 (14일)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력임. 이하 상동
닫기
. 5명의 헌병이 보성(전라남도)에서 동쪽으로 7마일 지점에서 약 60명의 무장봉기자들과 맞부딪혔고 5명의 손실을 입은 그들을 격퇴시켰다. 3정의 화승총과 여러 가지 일용품을 노획하였다.
2명의 무장봉기자를 평안북도에서 포로로 붙잡았다.
2일(15일). 기병대 장교 지휘하의 군대가 영흥(함경남도)에서 남서쪽으로 17마일 지점에서 250명이 넘는 무장봉기자들과 맞부딪혔고 30명의 손실을 입은 그들을 격퇴시켰다.
3일(16일). 크지 않은 규모의 경찰과 헌병대가 영흥(함경남도)에서 남동쪽으로 7마일 지점에서 19명의 무장봉기자들과 맞닥뜨렸다. 2명의 한국인이 죽고 일부가 부상당하였다.
4일(17일). 서흥(황해도)의 소규모 수비대가 이 도시에서 서쪽으로 10마일 지점에서 3명의 무장봉기자를 살해하였다. 총 3자루와 탄환 80개를 노획하였다.
6일(19일). 함양(경상도) 수비대는 3명의 무장봉기자를 포로로 잡았고 청동(Чон-дон)에서 북쪽으로 8마일 지점에서 1명은 살해되었다.
6월 7일(20일). 덕천(평안남도) 수비대 7명이 무장봉기자들을 공격하였고 서창(Со-чан)의 남서쪽 2마일 지점에서 그들 중 7명을 살해하였다. 총 3자루를 노획하였다.
8명의 풍덕(경기도) 수비대가 3명의 경찰과 함께 강화에서 북서쪽으로 6마일 지점에서 약 30명의 무장봉기자들과 맞닥뜨렸다. 7명의 무장봉기자들이 사망했다.
7일(20일)과 8일(21일). 창성(평안북도)의 경찰이 군인들과 공동으로 7명의 무장봉기자들을 사로잡고 총 5자루를 노획하였다.
7일(20일)에서 9일(22일)까지. 경찰대가 서흥(황해도) 근처에서 무장봉기자들을 수색하였고 이로 인해 무장봉기자들 중 4명이 사망했다.
7일(20일)과 10일(23일). 3명의 무장봉기자들이 홍천(강원도) 근처에서 군인들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
9일(22일). 순천(전라남도) 수비대는 도시 근교에서 40명의 무장봉기자들과 충돌하였는데 이로 인해 14명의 한인이 사망하였고 총 11자루가 노획되었다.
함열(전라북도)市의 소규모 군대에 의해 4명의 무장봉기자가 살해되었다.
10일(23일). 2명의 경찰과 공조한 순천(전라남도) 수비대에 의해 도시의 북서쪽 12마일 지점에서 14명의 무장봉기자들이 살해되었고 총 11자루가 노획되었다.
5명의 헌병이 동복(전라남도) 근처에서 50명의 무장봉기자들과 부딪혔고 이로 인해 16명을 살해하였으며 몇 자루의 총기와 창을 노획하였다.
신계 수비대가 경찰 3명과 함께 이 도시의 남서쪽 8마일 지점에서 약 10명의 무장봉기자들을 공격하였다. 7명의 한국인이 사망하였고 2자루의 총을 노획하였다.
울산 경찰은 근교에서 2명의 무장봉기자를 체포하였다.
10일(23일)과 16일(29일) 사이. 금화(강원도)의 수비대에 의해 19명의 무장봉기자들과 2자루의 총이 노획되었다.
6월 11일(24일)에서 21일(7월 5일)까지. 정찰대가 충주(충청북도)에서 3명의 무장봉기자를 살해하였고 4명을 포로로 잡았다.
11일(24일). 수도경찰에 의해 파주와 마전(경기도)에서 20명의 무장봉기자들이 체포되었다.
12일(25일). 수도경찰대가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2마일 거리인 독시필(Ток-си-пили)에서 2명의 무장봉기자를 체포하였다.
풍덕(경기도)에 있는 소규모 군대가 30명의 무장봉기자와 충돌하였는데, 이 도시의 남동쪽 3마일 지점에서 무장봉기자 2명이 살해되었다.
13일(26일). 부산의 군 정찰대가 양산(경상남도) 북쪽에 위치한 광산에 있는 40명의 무장봉기대와 충돌하였고 그들을 격퇴시켰다. 한국인 14명이 사망하였고 2명이 포로로 잡혔다. 총 17자루가 노획되었고 일본군 1명이 부상당했다.
고원(함경남도)市에 있는 부대가 150명의 무장봉기자와 충돌하였는데 무장봉기자 중 3명이 살해되었다.
영천(경상북도) 수비대가 25명의 무장봉기자들과 부딪쳤고 그들 중 15명이 살해되었다.
북청(함경남도)市에 있는 군대에 의해 이원과 단천사이에서 약 17명의 무장봉기자들이 살해되었다. 바로 그 군대에 의해 얼마 후 운산독에서 동쪽으로 12마일 지점에서 7명의 폭도들이 살해되었고 5자루의 총이 노획되었다.
영월(강원도) 수비대가 이 도시의 동쪽 20마일 지점에서 100명의 무장봉기자를 공격하였다. 이에 무장봉기자 중 13명이 살해되었고 그들의 지도자가 포로로 잡혔으며 총 33자루가 노획되었다.
6월 13일(26일)과 15일(28일) 사이에 안동(경상북도)의 경찰이 영양과 안동지역에서 5명의 무장봉기자를 포로로 잡았다.
14일(27일). 하사관과 6명의 병사로 구성된 함양(경상남도)에 있는 부대가 60명에 가까운 무장봉기 무리를 공격하였다. 봉기자들 중 7명이 오어이천(О-ой-чон) 마을에서 4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살해되었다.
경찰과 공조한 홍천(강원도) 수비대에 의해 2명의 무장봉기자가 살해되었고 2명이 포로로 잡히었다.
충청남도에 있는 헌병들은 오천(О-чон)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10마일 지점에서 50명의 무장봉기자들과 마주쳤는데 그들 중 12명을 살해하였고 일부에게 부상을 입혔다. 총 5자루와 약간의 화약을 노획하였다.
이천(경기도)의 수비대는 광주 남쪽에 있는 20명의 무장봉기자들을 공격하였는데 이로 인해 무장봉기자들 중 5명이 살해되었다.
함경남도 갑산市 수비대에 의해 이 도시에서 가까운 곳에서 3명의 무장봉기자들이 살해되었다. 곧이어 얼마 후 같은 수비대에 의해 역시 이 도시 근교에서 20명의 무장봉기자들이 살해되었다. 같은 날 성진 수비대는 30명의 무장봉기자를 공격하였고 그들 중 6명이 살해되었다.
15일(28일). 군인들과 공조한 강릉(강원도)의 경찰에 의해 1명의 무장봉기자가 살해되었고 3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15일(28일)과 6월 22일(7월 5일) 사이. 혜산(함경남도)의 부대에 의해 혜산 근교에서 17명의 무장봉기자들이 살해되었고 총 13자루가 노획되었다.
16일(29일). 영춘(충청북도) 수비대는 30명의 무장봉기자들을 공격하였고 그들 중 5명이 살해되었다.
해주市(황해도) 경찰은 점령하고 총 4자루를 몰수하였다. 같은 날 7명의 무장봉기자들이 경찰에 항복하였다.
북청(함경남도)의 군대는 동시의 남동쪽 5마일 지점에서 70명의 무장봉기자들을 공격하였는데 이로 인해 5명의 한인이 살해되었다.
강경(전라북도)에서 파견된 5명이 영산에서 남쪽으로 2마일 지점에서 5명의 무장봉기자를 살해하였다.
영천(경상북도)에서 파견된 부대가 10명의 무장봉기자들과 마주쳤는데 무장봉기자들 전원은 소백산에서 살해되었다.
17일(30일). 7명의 군인과 공조한 5명의 경찰이 양산(경상남도) 지역에서 3명의 무장봉기자를 살해했으며 총 37자루를 노획했다.
일본인 및 한국인 경찰과 공조한 16명의 군인들에 의해 풍덕에서 남쪽으로 2½지점에서 3명의 무장봉기자들이 살해되었으며 1명이 포로로 잡히었고 총 1자루가 노획되었다.
육군소위가 이끄는 부대에 의해 구성(경기도)에서 남동쪽으로 2마일 지점에서 5명의 무장봉기자가 살해되었고 총 3자루가 노획되었다.
17일(30일)과 6월 18일(7월 1일). 4명의 경찰과 공조한 예천(경상북도)의 군대는 죽령과 단양에서 무장봉기자를 공격하였으며 이로 인해 총 11명의 한국인이 살해되었다.
6월 18일(7월 1일). 경주(경상북도) 수비대에 의해 봉화(Чон-ха) 지역에서 6명의 무장봉기자들이 살해되었다.
6월 19일(7월 2일). 해미(충청남도) 초소의 3명의 경찰이 홍성에서 온 부대와 협력하여 20명의 무장봉기자를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3명이 살해되고 일부가 부상당하였다. 총 2자루가 노획되었다.
수도경찰이 서울에서 무장봉기 지휘자 중 한상율(Хан-сан-юлъ)이라는 이름의 1인을 체포하였다.
제천市(충청북도) 수비대가 청풍 북쪽 2마일 지점에서 70명의 무장봉기자들과 맞부딪쳤고 이로 인해 10명의 한인이 살해되었다. 이 전투 시에 무장봉기자들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이강년이 포로로 잡혔다.
백천市(황해도)에 있는 헌병대가 군인들과 함께 수십 명의 무장봉기자들을 공격하였고 그들을 도시에서 10마일 가량 쫓아내었다.
6월 20일(7월 3일). 미키(Мики) 소령 지휘 하의 북청 군대에 의해 35명의 무장봉기자들이 살해되었고 총 27자루가 노획되었다. 한편 청산(Чон-сан)에서 온 다른 부대에 의해 4명의 무장봉기자들이 살해되었고 총 18자루가 노획되었다.
충주(충청북도) 경찰대는 이강년의 부하인 무장봉기자 1명을 체포하였으며, 6월 21일(7월 4일) 27명의 보병부대는 청풍에서 북쪽으로 1마일 지점에서 2명의 무장봉기자를 체포하고 총 1자루를 노획되었다.
양천(경기도)의 부대는 이 지역에서 1명의 무장봉기자를 체포하였다.
6월 21일(7월 4일)과 6월 20일(7월 3일). 미키(Мики) 중령주 003
번역주 003)
보고자는 바로 위에서는 미키 소령이라고 썼으나 이곳에서는 중령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보고자의 번역 오류로 판단됨
닫기
지휘 하에 구성된 포병대가 갑산에서 2마일 지점에서 총 22자루를 노획되었다.
남포(충청남도) 초소에서 구성된 13명과 공조한 7명의 헌병은 남포 남쪽으로 3마일 지점에서 6명의 무장봉기자를 체포하였다.

  • 번역주 001)
    이는 플란손이 1908.7.5. 서울에서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А.П.Извольский)에게 보낸 보고서에 첨부한 문서임, 1908.9.13.자 플란손의 보고서 참조 바로가기
  • 번역주 002)
    1일(14일)에서 1일은 혁명전 러시아 구력이고 괄호안의 (14일)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력임. 이하 상동바로가기
  • 번역주 003)
    보고자는 바로 위에서는 미키 소령이라고 썼으나 이곳에서는 중령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보고자의 번역 오류로 판단됨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1908년 6월 한국주둔 일본군 참모부에서 받은 소식 자료번호 : kifr.d_0004_0280_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