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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유정(劉綎) 등의 군대가 왜노(倭奴)에게 살상된 사실과 관군의 마필 등에 대해 조사한 조선국왕의 회자(回咨)

20. 回咨
  • 발신자
    조선국왕
  • 발송일
    1594년 2월 20일(음)(만력 22년 2월 20일)
발신: 조선국왕
사유: 보내온 자문을 받으니, 「왜정(倭情)에 관한 일. 운운」 했습니다.
 
[조선국왕] 이를 받고, 앞서 지난해 11월에 받은 배신(陪臣)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주 001
각주 001)
조선에서 권율의 직함은 도원수(都元帥)였으나, 『사대문궤』에서는 일관되게 ‘제도도순찰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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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權慄)의 치계(馳啓)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권율] 이달 5일 등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성윤문(成允門)과 좌도조방장(左道助防將) 홍계남(洪季男)으로부터 차례대로 비보(飛報)를 받았습니다.
[성윤문‧홍계남] 대규모의 왜적(倭賊)이 두 갈래로 나뉘어, 한 갈래는 고성현(固城縣)‧당항포(党項浦)‧장치구(墻峙口)로 진입하여 다시금 진주(晉州) 방면을 약탈할 것이라고 성언하였으나 선봉(先鋒)이 본국의 군대에 의해 격퇴되어 여러 적들이 곧장 창원(昌原)‧김해(金海)‧웅천(熊川) 등처로 돌아갔고, 한 갈래는 양산(梁山)의 군치(郡治)로부터 진입하여 경주부(慶州府)를 지나 천조(天朝) 군대의 영채 뒤로 돌아 나와서 본부(本府)의 안강현(安康縣) 등처에 이르러 크게 살략을 자행하여 천조의 군병 223명이 왜적에게 피살되었습니다. 본국의 군병이 천조의 군병과 힘을 합쳐 돌진하여 쏘아대고 베며 사로잡혀 가던 남녀 125명을 탈환했습니다.
[조선국왕] 이어서 작년 6월 이후부터 윤11월에 이르기까지 각 배신들이 보고한 바의 적정(賊情) 일체를 아울러 조사하여 주본으로 갖추고, 사은하러 가는 배신에게 순부(順付)하여 경사(京師)로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그 뒤로 또한 전항(前項)의 적정에 대해서 자문으로 갖추어 통사(通事) 임춘발(林春發)을 전차(專差)하여 (자문을) 가지고 순무(巡撫)‧순안(巡按) 및 포정(布政) 아문에 나아가서 진정하게 했습니다. 이어서 작년 12월 이후 각 배신들이 보고한 바의 긴급한 성식(聲息)을 조사하고, 자문으로 갖추어 통사 이해륭(李海隆)을 전차하여 가지고 순무‧순안 및 진수(鎭守)‧포정의 각 아문에 나아가서 진정하게 했습니다. 또 작년 6월 이후부터 올해 정월까지의 각기 적정을 조사하여, 자문으로 갖추고 장예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 이정형(李廷馨)을 전차하여 가지고 귀부(貴部)의 근전에 나아가서 진정하게 했습니다. 또 작년 12월부터 올해 정월까지 보고하지 못한 적정을 조사하고, 자문으로 갖추어 본관(本官)에게 순부(順付)하고 순무‧순안 및 진수‧포정‧도사(都司) 아문에 가서 진정하게 했습니다. 또 올해 2월 1일에는 배신 고잉서(高仍恕)를 전차하여 ‘흉적이 전라도를 엿보는 긴급한 성식’에 관한 자문 1통을 가지고 밤을 새워 나아가서 귀부와 순무‧순안‧도사 각 아문에 진정하게 했습니다. 자문에서 언급한 봉공(封貢)을 청한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조사해 보니 올해 정월 심 참장의 사후배신(伺候陪臣) 김윤국(金潤國)의 치계에 있습니다.
[김윤국] 참장 심(유경)이 지난해 12월 24일에 적 진영에 들어가서 올해 정월 20일에 돌아왔으며 (같은 달) 24일에 팔거현(八莒縣)에 도착했습니다. 신이 물어보니 왜적의 추장이 정문(呈文)과 표문(表文)을 전하고 봉공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또 그 2월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한효순(韓效淳)이 치계했습니다.
[한효순] 김해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의 비보(飛報)를 받았습니다.
[백사림] 정탐하러 간 승려 현감(玄鑑)이 돌아와 말했습니다.
[현감] 제가 지난해 12월 25일에 본부의 덕교(德橋)‧죽도(竹島) 등처에 가서 보니 적세가 예전과 같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천조의 장수인 심 참장은 관군들을 대동하고 밀양(密陽)의 삼랑강(三浪江)에 가서 배에 올라타고 죽도에 내렸는데, 왜적의 장수가 (심유경이) 탈 말에 안장까지 얹어 두고 나와서 영접했습니다. 3일을 머문 뒤, 웅천의 적 진영으로 호송했습니다.
[한효순] 이어서 울산군수(蔚山郡守) 김태허(金太虛)의 비보를 받았습니다.
[김태허] 올해 정월 11일에 정탐하러 갔던 사람인 서윤복(徐允褔)이 돌아와 아뢰었습니다.
[서윤복] 제가 또한 걸인 모양으로 변장하고 임랑포(林郞浦)의 적 진영에 몰래 들어가서 보니, 이 왜적들이 와포(窩鋪)주 002
각주 002)
임시로 만든 판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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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두들겨 만든 것이 약 1천여 곳[座]이었고, 두 명의 적장(賊將)은 진법(陣法)을 연습하고 군병을 훈련시키고 있었으며, 쌓아 둔 군량이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고 그 옆에 땔감과 풀[柴草]을 쌓아 두었습니다. 또 피로인(被擄人) 김봉서(金奉瑞) 등이 저에게 몰래 말하기를, “적병이 변경에서부터 나와 서로 교체해 가면서 방수하고 있는데, 경주에 주둔하던 명군이 모조리 철수한 사실을 염탐하여 알고서 바야흐로 병력을 늘려 차례로 약탈하고자 한다.”라고 했습니다.
[김태허] 또 각처의 초료군(哨瞭軍)들이 달려와서 고했습니다.
[초료군] 요사이 동래(東萊)‧기장(機張)‧부산포(釜山浦), 울산군(蔚山郡)의 청광(靑鑛)과 서생포(西生浦), 양산군(梁山郡)의 구법곡(仇法谷), 김해‧웅천‧천성(天城)‧가덕(加德)‧죽도‧덕교‧다대포(多大浦)‧소진포(所珎浦)‧영등포(永登浦)‧지세포(知世浦)‧옥포(玉浦)‧율포(栗浦)‧장문포(場門浦)‧조라포(助羅浦) 등처에는 적(賊)의 무리가 더욱 치성하며 병력을 보태어 거제현(巨濟縣)에 들어가 점거하였으니 우도(右道)의 형세는 날로 위급함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조선국왕] 갖추어 온 장계를 받았고 그 밖에 지금 받은 위의 자문을 살펴보건대, 왜적의 추장 기요마사(淸正)가 울산의 서생포에 있으면서 대대적으로 성지를 쌓고 기계를 만들어 각 둔의 왜적들을 호령하는데 형세가 심히 성대(盛大)하여 좌도(左道)의 경주(慶州) 같은 곳들이 몹시 위급합니다. 본 도의 절도사 고언백(高彦伯) 등이 차례대로 유 총병의 진영에 가서 구원을 청하니, 이에 통령남병유격(統領南兵遊擊) 오유충(吳惟忠)이 즉시 데리고 있던 3,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경주로 달려가 부총병 낙상지(駱尙志)와 회동하여 그곳을 지켰습니다. 왜적은 그 주(州)의 안강현(安康縣)과 영일현(迎日縣)에 수송해 둔 군량이 조금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지난해 11월 초2일에 군대를 풀어 습격했습니다. 오 유격 수하의 정탐하던 관병(官兵)들이 그 왜적들과 맞닥뜨렸다가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말았으나, 소방(小邦)의 여러 장수들이 천조의 군대와 힘을 합쳐 가로막고서 잡혀가던 남녀를 도로 빼앗았고 왜적들도 힘이 빠져 밤을 틈타 도망쳐서 돌아갔습니다. 살상된 관군(官軍)은 오 유격 진영의 휘하로 유 총병의 군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보고한 게첩(揭帖)에 모두 있었는데 지극히 상세하고 명료했습니다. 마필(馬匹)과 기계(器械)에 이르러서는 천조의 장수들이 스스로 수효를 헤아린 바, 소방은 끝까지 따져서 모두 보고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소방에서 몹시 원통하게 여기는 것은 왜적의 세력이 매우 컸음에도 전보(轉報)에는 실상이 빠져서, 이 왜적을 소방의 기민이라면서 밀양에서 먹을 것이 없자 약탈해 온 것이라고 하거나 오 유격이 전공을 탐내어 가벼이 접전했다가 이렇게 패전하기에 이르렀다고 한 것입니다. 밀양부터 안강까지는 길이 매우 멀어서 기민들이 천조의 군대에 항거한다는 것은 사세상 그럴 수 없는 것이며, 변경의 정세에 어두우니 변명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전후로 받았던 바의 적정(賊情)은 이미 각 자문 안에 갖추었으니 깊이 살펴 주기를 공경히 기다립니다. 현재 이 왜적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은, 좌도(경상좌도)의 울산군의 청광‧서생포‧기장현‧두모포(豆毛浦)‧양산군의 구법곡‧임랑포(林郎浦)‧하룡당(下龍堂)‧동래부‧좌수영(左水營)‧부산포‧다대포의 진(鎭)이고, 우도는 김해부‧죽도‧덕교‧산성(山城)‧안골포(安骨浦), 웅천현, 제포(薺浦)‧가덕진‧천성진‧거제현‧우수영(右水營)‧옥포‧율포‧소진포‧장문포‧지세포‧조라포‧영등포의 진으로 연해 일대에 수백 리에 걸쳐서 이어져 있습니다. 현재의 수효는 자세히 모르지만 대략 그 주둔한 지방을 살펴보면 그 무리의 총계가 수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요해처에 웅거해 있으면서 날마다 함부로 약탈하는데, 소방은 잔폐된 나머지 군민들은 사망하고 물자는 바닥났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지탱하면서 의지하고 진실로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천조의 군대를 믿기 때문인데 바로 그 의지하던 천조의 군대가 모두 철수했으니 화기(禍機)가 점차 닥쳐오고 있습니다. 당직(當職)은 마음이 아파서 피눈물을 흘리지만 나오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왜적들이 화친에 가탁하여 충순한 척 속이면서 속으로는 흉계를 꾸미는 것은 바로 그들이 늘상 하는 짓입니다. 당초 흉적의 선봉이 소방에 도착했을 때 넌지시 우리의 속내를 시험해 본 것도 여러 차례였습니다. 상주(尙州)에서는 화친을 청하더니 이튿날 조령(鳥嶺)을 넘었고, 임진강(臨津江)에서 화친을 청하더니 이튿날 개성(開城)에 들어갔으며, 중화(中和)에서 화친을 청하더니 이튿날 대동강(大同江)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심 참장을 만나고서는 화친하고 싶다며 강론(講論)하다가 갑자기 ‘동쪽 황제와 서쪽 황제’를 말하니, 그 패역함을 꺼리지 않는 것이 진실로 심했습니다. 왜적의 정형이 이와 같은데 오히려 ‘화(和)’라는 한 글자로 구차하게 대사(大事)를 마무리 지으려 하니 그들의 술책에 빠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오호 통재라! 현재 적의 장수 유키나가(行長)는 웅천에서, 기요마사(淸正)는 서생포에서 바야흐로 거제도 등처에 병력을 보태고 배를 건조하면서 전라도를 엿보고 있는데 혹자는 저 왜적들이 서생포에 물러가 있으면서 위엄을 겁내어 화친을 애걸한다고 하지만 이미 진주를 함락시키고 안강에서 패하였으며, 혹자는 저 왜적들이 날로 공손함을 더한다고 하지만 당보(塘報)와 실상이 서로 크게 다르므로 원통하고 근심스러움이 어찌 더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이 왜적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봉공을 요청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병력을 거두어 섬으로 돌아가 조정의 명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 무슨 이유로 여전히 다른 나라를 점거한 채로 성을 쌓고 해자를 파고 가옥을 지으며 밭을 경작하고 군량을 운반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추위와 더위를 번갈아 겪은 것이 3년이나 되었는데도 물러가지 않는 것입니까. 근래 들어 보니 유키나가가 겉으로는 화친을 애걸하지만 소문에서 들리는 말들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표문을 말한 것에 이르러서는 관백(關白)이 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는 곧 유키나가(行長)가 거짓으로 지은 것이며, 천조의 군대를 해이해지게 만들었다가 나중에 그 사납고 흉악한 뜻을 보이고자 도모한다고 합니다. 이 소문에 대한 사정을 상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오직 사세로써 헤아려 보자면 또한 근사(近似)한 듯합니다. 그들이 군량 실은 선박을 찾는다고 가탁하여 전라도 지방으로 하고자 하는 것을 보니, 뒤로 음모가 있는 바가 대개 드러난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심 참장은 나왔지만 담 위관(譚委官)주 003
각주 003)
담종인(譚宗仁,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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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구류되었습니다. 표문도 유키나가(行長)의 속임수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으며 (따라서) 저 왜적들의 정형은 현저하게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소방의 존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번거로이 바라건대 귀원(貴院)‧귀사(貴司)에서는 긴급한 연유를 통찰하여 속히 전주(轉奏)해서 운기(運竒)에 만전을 기하여서 시종일관 증제(拯濟)하여 주신다면 다행스러움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내니, 청컨대 살펴 주십시오. 자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문을 순무요동도찰원(巡撫遼東都察院)‧순안요동도찰원(巡按遼東都察院)‧총독병부(總督兵部)‧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에 보냅니다.
 
만력 22년 2월 20일.

  • 각주 001)
    조선에서 권율의 직함은 도원수(都元帥)였으나, 『사대문궤』에서는 일관되게 ‘제도도순찰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임시로 만든 판옥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3)
    담종인(譚宗仁, ?~?)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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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劉綎) 등의 군대가 왜노(倭奴)에게 살상된 사실과 관군의 마필 등에 대해 조사한 조선국왕의 회자(回咨) 자료번호 : sdmg.k_0002_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