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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이사장군이 다시 대완으로 출정하자 대완이 왕을 죽이고 화약(和約)을 청하여 맹약을 맺고 철수함

  • 국가
    대하(大夏)
이리하여 이사장군이 그 후 다시 가게 되었는데, 병사가 많아서 도착하는 곳의 소국들은 영접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고 식량을 내어 군대에게 공급하였다. 윤두에 도착하였는데, 윤두가 굴복하지 않자 며칠 동안 공격하여 그곳을 도륙했다. 여기서 서쪽으로 진군했는데, 막힘없이 가서 대완성에 도달했고,주 001
각주 001)
中華書局本은 “自此而西, 平行至宛城”으로 끊어 읽었지만, 이를 “自此而西平, 行至宛城”로 끊으면 “여기서부터 서쪽은 평온하게 되어, 진군해서 대완성에 도달했다.”로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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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한나라 군사는 3만 명이었다. 대완의 군대가 한나라 군대를 맞아서 공격했지만 한나라 병사들이 활을 쏘아 물리치자, 대완 [사람들]은 성채[葆]주 002
각주 002)
‘葆’는 ‘堡’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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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들어가 그 성[의 견고함]에 의존했다. 이사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욱성으로 가서 공격하려고 했지만, [그러다가] 행군이 지체되면 대완이 더욱 계략을 꾸밀까 두려워하였으니, 그래서 [욱성을 치지 않고] 먼저 대완으로 온 것이다. 그 수원을 끊고 [물길을] 바꾸었더니 대완이 심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그 성을 포위하고 공격한 것이 40여 일이 지나 그 외성은 무너졌고, 대완의 귀족이자 용장인 전미(煎靡)를 포로로 붙들었다. 대완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내성[中城]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대완의 귀족들이 서로 상의하여 말하기를 “한나라대완을 공격하는 것은 왕 무과(毋寡)가 선마를 숨기고 한나라 사신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이제 왕 무과를 죽이고 선마를 내어 준다면 한나라 군대는 응당 해산할 것이다. 만약 해산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완의 귀족들은 모두 동의하고 함께 그 왕 무과를 죽인 뒤 그 머리를 갖고 이사장군에게 귀족을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약속하며 말하기를 “한나라는 우리를 공격하지 마시오. 우리가 선마를 모두 내어놓을테니 마음대로 취하도록 하시오. 한나라 군대에게 식량도 공급하겠소. 만약 [우리 조건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선마를 모두 죽일 것이고, 또한 강거의 구원병도 도착할 것이요. 그들이 도착하면 우리는 안에서 강거는 밖에서 한나라 군대와 싸울 것이요. 한나라 군대는 어떻게 할지 잘 헤아리시오. 어떤 길을 택하시겠소?”라고 하였다. 이때 강거는 한나라 군대를 염탐하여 살펴보았는데, 한나라 군대가 아직 숫자가 많아서 감히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장군은 조시성이치 등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대완의 성 안에는 진나라 사람[秦人]주 003
각주 003)
秦人 : 『漢書』 卷94上 「匈奴傳」에도 흉노 안에 秦人들이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에 대해 顔注는 “秦나라 때 흉노로 망명해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 그 자손들을 아직도 秦人이라 부른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따라서, 大宛에 거주하는 秦人도 ‘中國人’에 대한 통칭이 아니라 秦代에 그곳에 가서 살게 된 사람의 후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중국을 China라고 부르게 된 연유도 바로 秦의 발음을 옮겨 불렀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秦漢 왕조 교체 이후에도 중국인들이 계속해서 ‘秦人’으로 불리우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 보인다. 한편, 고대에 중국의 또 다른 명칭이었던 Seres가 비단(silk)과 관련된 어휘라는 일반적인 해석에 대해서, Pulleyblank(1963 : 229)는 ‘秦’의 고대 발음인 *dzēn의 마지막 음이 r로 와전된 형태가 바로 Seres라고 주장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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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우물파는 법을 안다. 또한 그 안에는 식량이 아직 많다. 여기에 온 까닭은 악행의 장본인 무과를 주살하려는 것인데, 무과의 머리는 이미 [우리 손에] 들어왔다. 이렇게 [우리가 포위를 계속하고] 군대를 해산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수비를 강화할 것이고 또 강거는 한나라 [군대]가 지친 틈을 타서 대완을 구하러 올 터이니, 한나라 군대는 필시 패배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군대의 장교들은 모두 [그 말이] 옳다고 하여 대완에게 화약(和約)을 허락해 주기로 했다. 이에 대완은 그 선마를 내어놓고 한나라 측에게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였으며 많은 식량을 내어서 한나라 군사들에게 지급하였다. 한나라 군대는 그 선마 수십 필, 그리고 중마(中馬) 및 그 이하 수준의 암수의 말들 3천여 필을 골랐다. 또한 대완의 귀족 가운데 전부터 한나라 사신에게 잘 대해 주던 매채(昧蔡)를 세워서 대완의 왕으로 삼고, 맹약을 맺은 뒤 군대를 철수하였다. 결국 [한나라 군대는] 내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철수하고 돌아오게 된 것이다.

  • 각주 001)
    中華書局本은 “自此而西, 平行至宛城”으로 끊어 읽었지만, 이를 “自此而西平, 行至宛城”로 끊으면 “여기서부터 서쪽은 평온하게 되어, 진군해서 대완성에 도달했다.”로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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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葆’는 ‘堡’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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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秦人 : 『漢書』 卷94上 「匈奴傳」에도 흉노 안에 秦人들이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에 대해 顔注는 “秦나라 때 흉노로 망명해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 그 자손들을 아직도 秦人이라 부른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따라서, 大宛에 거주하는 秦人도 ‘中國人’에 대한 통칭이 아니라 秦代에 그곳에 가서 살게 된 사람의 후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중국을 China라고 부르게 된 연유도 바로 秦의 발음을 옮겨 불렀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秦漢 왕조 교체 이후에도 중국인들이 계속해서 ‘秦人’으로 불리우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 보인다. 한편, 고대에 중국의 또 다른 명칭이었던 Seres가 비단(silk)과 관련된 어휘라는 일반적인 해석에 대해서, Pulleyblank(1963 : 229)는 ‘秦’의 고대 발음인 *dzēn의 마지막 음이 r로 와전된 형태가 바로 Seres라고 주장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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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전미(煎靡), 무과(毋寡), 무과, 무과, 조시성, 이치, 무과, 무과, 매채(昧蔡)
지명
윤두, 윤두, 한나라, 대완, 한나라, 한나라, 대완, 욱성, 대완, 욱성, 대완, 대완, 대완, 대완, 대완, 한나라, 대완, 한나라, 한나라, 대완,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대완, 진나라, 한나라, 대완, 한나라, 대완, 대완,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대완, 한나라, 대완,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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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군이 다시 대완으로 출정하자 대완이 왕을 죽이고 화약(和約)을 청하여 맹약을 맺고 철수함 자료번호 : jo.k_0001_0123_0080_0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