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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합리(哈里)의 위치와 역사적 연혁 등에 관한 내용

  • 국가
    합렬(哈烈)
합렬(哈烈) 주 001
각주 001)
哈烈: 黑魯, 海里, 哈利, 哈喇, 哈里, 黑婁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서부의 하리강(哈里河, Hari River) 유역에 위치한 헤라트(赫拉特, Herat)에 있던 옛 나라이다. 하리강은 중부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에서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 사막으로 흐른다. 비옥한 영역에 위치하는 헤라트는 전통적으로 포도주로 유명하다. 헤라트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타지크족이 도시의 주요 거주자인데, 東이란의 페르시아인과 같다. 헤라트는 아랍, 인도, 중국과 유럽의 역사적인 교역로 상에 위치한다. 헤라트에서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마자르이샤리프와 칸다하르로 가는 길은 아직까지도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한편, 기원전 시기에 이 지역은 알렉산더 제국 및 타무르(安息國, Parthian Empire)에 속해 있었으며, 5세기 중엽에는 에프탈(Ephthalites), 8세기 후반에는 압바스(Abbas) 왕조, 11세기에는 突厥에 함락되었다가 1221년 拖雷(Tolui)에 攻破된 이후, 1381년에 다시 타무르(帖木兒, Temür)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어 티무르 제국에 속하였다. 1405년에 티무르가 죽고 그의 아들 샤루흐(沙哈魯, Shahruh Bahadur)가 국왕에 즉위하여 헤라트를 國都로 삼았다. 1413년에 샤루흐는 明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해에 成祖 永樂帝도 中官 李達·吏部 驗封司 員外郞 陳誠 등을 이 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한편 11세기에서 1220년 사이에 이곳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금속품 제조업의 중심지로서 특히 鑲金銀 銅器가 유명했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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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일명 흑노(黑魯)라고도 하는데, 살마아한에서 서남 방면으로 3,000리 떨어져 있고, 가욕관(嘉峪關)과는 2,000여 리의 거리로서 서역의 대국(大國)이다. 원나라 부마 첩목아살마아한의 군주가 된 뒤, 다시 그 아들 사합노(沙哈魯) 주 002
각주 002)
沙哈魯(Shahruh Bahadur, 1377~1447, 재위 1405~1447): 샤루흐(Shahruh)의 音譯이다. 티무르의 넷째 아들로서 1405년 티무르 사후 티무르 제국의 술탄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궁정에서 종교와 문화교육을 받았고, 차가타이어와 아라비아어에 능통했으며, 문학과 예술을 좋아하고, 騎射에 능숙하는 등 文武 양 방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다. 沙哈魯는 집권 40여 년 동안 영토 통일과 각지의 반란 진압 외에 국내건설에 힘을 써서 그 부친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초래된 피폐 상황을 만회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농업, 수공업과 상업 등이 발전하고, 관개사업이 정비되었으며, 驛站이 전국 각지에 두루 설치되고, 주요 도시가 번성하여 당시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경제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아울러 문화 방면에서도 이른바 티무르 문예의 부흥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니, 바로 페르시아 문학과 예술의 황금시대를 이끄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한편 부친과는 달리 중국의 明朝와 정치, 경제 방면에서 빈번한 교류를 추진하였다. 1419년에는 明朝에 사절단을 보내기도 하였다. 1446년 손자 穆罕默德이 이란의 서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沙哈魯는 그 妻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으나 이듬해 3월에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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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내어 합렬을 점거토록 하였다.

  • 각주 001)
    哈烈: 黑魯, 海里, 哈利, 哈喇, 哈里, 黑婁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서부의 하리강(哈里河, Hari River) 유역에 위치한 헤라트(赫拉特, Herat)에 있던 옛 나라이다. 하리강은 중부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에서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 사막으로 흐른다. 비옥한 영역에 위치하는 헤라트는 전통적으로 포도주로 유명하다. 헤라트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타지크족이 도시의 주요 거주자인데, 東이란의 페르시아인과 같다. 헤라트는 아랍, 인도, 중국과 유럽의 역사적인 교역로 상에 위치한다. 헤라트에서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마자르이샤리프와 칸다하르로 가는 길은 아직까지도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한편, 기원전 시기에 이 지역은 알렉산더 제국 및 타무르(安息國, Parthian Empire)에 속해 있었으며, 5세기 중엽에는 에프탈(Ephthalites), 8세기 후반에는 압바스(Abbas) 왕조, 11세기에는 突厥에 함락되었다가 1221년 拖雷(Tolui)에 攻破된 이후, 1381년에 다시 타무르(帖木兒, Temür)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어 티무르 제국에 속하였다. 1405년에 티무르가 죽고 그의 아들 샤루흐(沙哈魯, Shahruh Bahadur)가 국왕에 즉위하여 헤라트를 國都로 삼았다. 1413년에 샤루흐는 明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해에 成祖 永樂帝도 中官 李達·吏部 驗封司 員外郞 陳誠 등을 이 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한편 11세기에서 1220년 사이에 이곳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금속품 제조업의 중심지로서 특히 鑲金銀 銅器가 유명했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沙哈魯(Shahruh Bahadur, 1377~1447, 재위 1405~1447): 샤루흐(Shahruh)의 音譯이다. 티무르의 넷째 아들로서 1405년 티무르 사후 티무르 제국의 술탄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궁정에서 종교와 문화교육을 받았고, 차가타이어와 아라비아어에 능통했으며, 문학과 예술을 좋아하고, 騎射에 능숙하는 등 文武 양 방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다. 沙哈魯는 집권 40여 년 동안 영토 통일과 각지의 반란 진압 외에 국내건설에 힘을 써서 그 부친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초래된 피폐 상황을 만회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농업, 수공업과 상업 등이 발전하고, 관개사업이 정비되었으며, 驛站이 전국 각지에 두루 설치되고, 주요 도시가 번성하여 당시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경제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아울러 문화 방면에서도 이른바 티무르 문예의 부흥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니, 바로 페르시아 문학과 예술의 황금시대를 이끄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한편 부친과는 달리 중국의 明朝와 정치, 경제 방면에서 빈번한 교류를 추진하였다. 1419년에는 明朝에 사절단을 보내기도 하였다. 1446년 손자 穆罕默德이 이란의 서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沙哈魯는 그 妻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으나 이듬해 3월에 병으로 죽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첩목아, 사합노(沙哈魯)
지명
합렬(哈烈), 흑노(黑魯), 살마아한, 가욕관(嘉峪關), 서역, 살마아한, 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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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哈里)의 위치와 역사적 연혁 등에 관한 내용 자료번호 : jo.k_0024_0332_010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