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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겸(顧養謙)에게 왜적이 돌아갔는지를 확인하고 왜의 사신에게 책봉 요청 이외에 들어주지 말라는 칙유(勅諭) 등에 관해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가 조선국왕에게 보낸 자문(咨文)

48. 都司恭報倭情咨
  • 발신자
    요동도지휘사사
  • 발송일
    1594년 3월 17일(음)(만력 22년 3월 17일)
발신: 요동도지휘사사
사유: 삼가 일본군의 상황을 보고하고 황제의 뜻으로 위무하는 일입니다.
 
[요동도지휘사사] 올해 3월 14일에 흠차총독계요보정등처군무겸이량향급방해어왜사무병부좌시랑겸도찰원우첨도어사 고(양겸)의 헌첩을 받았습니다.
[고양겸] 병부로부터 자문을 받았습니다.
[병부] 본부에서 올릴 제(題)에 대한 직방청리사의 안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직방청리사] 본부에서 보낸 문서를 받았습니다. 병과로부터 초출(抄出)한 내용입니다.
[병과] 총독계요보정등처군무겸이량향급방해어왜사무병부좌시랑겸도찰원우첨도어사 고(양겸)가 황제께 전사(前事)주 001
각주 001)
본 문서의 사안인 ‘爲恭報倭情以慰聖懷事’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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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제본을 올렸습니다.
[병부] 성지를 받들었습니다.
[만력제] 병부에서 검토한 뒤 와서 보고하라.
[병부] 이와 같이 공경히 받듭니다. 또한 조선국왕께서 적의 상황에 대한 일로 다음과 같이 주청했습니다.
[조선국왕] 소방이 적과 대치한 지 지금까지 이미 2년입니다. 적의 상황에 대해서는 자못 자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대개 적은 거짓으로 후퇴한다고 하고는 다시 진격해 쳐들어오며 강화한다고 속이고는 흉모를 꾀합니다. (이러한) 정상을 반복해서 그 죄를 모두 따지기 어렵습니다. 조사해 보니, (1593년) 4월 전에 적이 한성(漢城) 주변 길에 나타나 노략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경상도 상주(尙州)에서는 적이 다시 둔거하며 군대를 동원해 사방에서 위협했기에 5월에 대군(명군)이 적을 추격하여 상주로부터 40리 떨어진 문경현(聞慶縣)에 도착하자 비로소 적이 서서히 병력을 거두며 점차 퇴각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한 무리가 모두 모여 동래(東萊)·부산(釜山)·울산(蔚山)·양산(梁山)·김해(金海)·창원(昌原)·웅천(熊川)·서생포(西生浦)·거제(巨濟)·가덕(加德)·천성(天城)에 나누어 둔거하며 성책을 짓고 방옥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땅인 대마도·나고야로부터 곡식을 배로 운반해 오는데 끊이지 않고 자주 오고 있습니다. 책봉과 조공을 청하는 것은 (위의) 군사 동원의 사정을 현혹하는 것입니다. 곧 6월 중 소방의 사령관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황진(黃進)이 각처에서 군사를 이끌고 함안군(咸安郡)에 진주했는데 적이 큰 세력을 이루어 김해·동래 방면으로부터 갑자기 사방에서 출격하여 엄습하자 각 장수가 적을 맞닥뜨려 나가지 못하고 퇴각하여 진주(晉州)를 지켰습니다. 적이 승기를 타고 진주를 포위해서 공방전을 벌인 지 8일이 됐을 때 (조선의) 병사와 백성은 모두 도륙을 당해서 죽은 자가 6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소방의 연해 일대에서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오직 진주성의 견고함만을 의지했는데 진주성이 함락되자 백성들이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송(宋) 경략과 이(李) 제독은 각 장수를 요해처로 나눠 보내어 지키게 하니, 이에 총병 유정(劉綎)과 유격 오유충(吳惟忠)이 대구(大丘)와 고령(高靈)을 지키게 하고 참장 낙상지(駱尙志)와 유격 송대빈(宋大斌)이 남원(南原)과 전주를 통제하도록 하며 유격 왕필적(王必迪)이 상주를 지키게 하고 다시 유격 척금(戚金)으로 하여금 오가며 지원케 하여 조치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적의 예봉이 점차 꺾였고 따라서 이전의 둔거지로 물러나되 다시 성언하여 천조께서 봉공을 허락해 주시길 기다렸다가 물러날 것이라 하고 또한 신의 천한 두 자식을 돌려보냈으니, 고식적으로 천병을 느슨하게 하면서 흉계를 꾸미고자 할 뿐인 것입니다. 이번에 위의 자문을 받아 다시 살펴보니, 적추 히데요시(秀吉)은 가까운 (일본의) 섬에 있는데, 보내는 흉한 무리마다 이제까지 소방의 육해 요해처에 나누어 머무르게 하고 있습니다. 둔거하는 곳의 세력이 더욱 장성해지고 있기에 겨울 추위가 지나도 철수할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 또한 11월 초3일에 경주(慶州) 안강현(安康縣)으로 깊숙이 쳐들어와 천병을 공격했으니 흉모를 쌓은 바는 결코 우연히 한 것이 아닐 것인즉, 내년 춘신(春汛)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멀리까지 공격해 온다면 어느 곳인들 두렵지 않겠습니까. 소방은 전쟁에 패한 이래로 군사들이 거의 다 죽어 버려 용장이 많이 전사했으며, 힘은 피로하여 능히 적과 겨룰 수가 없습니다. 지금 비록 남은 부대를 수습하여 의령(宜寧)과 경주 사이에 나누어 지키면서 밤낮으로 혈전을 벌여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습니다만 또한 오직 천병만을 의지한 따름입니다. 소방이 쇠잔하고 힘이 없어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할까 염려하여 경략이 가르쳐준 사후조치[善後事宜]는 더 없이 상세하였습니다. 또한 위관 호택(胡澤)과 심사현(沈思賢)을 보내 소방의 배신과 협동해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설험(設險)하게 하셨으니, 위로부터 황제의 어짊을 체득하여 소방을 구제하려는 것이 시종 간절했습니다. 신은 한편으로는 감격스럽고 한편으로는 두려우니 어찌 감히 잠시라도 보답하는 마음을 잊겠습니까? 다만 적세가 위에서 진달한 바와 같지만 소방의 잔파됨이 이미 심하여 비록 군사를 모아 훈련시켜 적을 몰아내기를주 002
각주 002)
원문의 ‘桑榆’는 ‘失之東隅, 收之桑榆’라는 표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 실패했다가 마지막에 성공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는 조선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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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하고자 해도 힘이 아직 여기에 미치지 못하니, 신이 밤낮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까닭인 것입니다. 인하여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이 번방을 지키는 데 있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적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상실하는 데까지 이르렀음에도 성은이 차고도 넘쳐 문책을 더하지 않으시고 장수로 하여금 출사하여 국경을 넘어가서 구원케 하셨습니다. 또한 군대를 남기셔서 적을 방어하며 두루 살피게 하셨으니, 추위와 더위에 같이 죽고 사는 골육의 은혜로서 신이 죽어 문드러져도 위로 보답할 수 없는 바입니다. 그리고 신의 재능이 박하고 힘이 없어 한번 넘어지자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성조(명 조정)가 동쪽을 돌아보게 하는 우려를 끼쳤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큰 것입니다. 위로는 황은을 저버리고 아래로는 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니 부끄럽고 두려워 넘어질 것 같습니다. 진실로 감히 다시 (출병을) 청할 수 없으나 오직 황상께서 만리를 살펴보시는 시야를 우러러볼 뿐입니다. 적세가 아직 드러나지 않음을 통촉하시어 묘당에서 계획하고 노고를 더하도록 하셔서 이 적이 (조선에서) 마침내 늘어 퍼져 가지 않게 하십시오.
[병부] 성지를 받들었습니다.
[만력제] 주본으로 올린 사항에 대해서는 병부로 하여금 검토하도록 하되 고양겸이 최근 보고한 일본군의 정세와 맞는지를 조사해서 서로 명백하게 맞을 때 갖추어 주달하라.
[병부] 이와 같이 공경히 받들어 삼가 준행해야 하겠습니다. 두루 초출하여 직방청리사로 보냈고 그에 대한 안정이 본부에 이르렀습니다.
[직방청리사] 살펴보건대, 조선에 있는 일본군 정세에 대해서는 최근 경략의 보고에 따르면 올봄에 일본군이 돌아간다고도 하고 일본군이 공격한다고도 하는지라 의논에 같음과 다름이 있고 이목에 혼란이 있는 것입니다. 총독 고(양겸)는 변경 수비를 총괄하는 신하로써 (송응창을) 대신하여 수행하라는 명을 받들어 임지로 가면서 신에게 이서(移書)했습니다. 강에서 군사를 훈련하여 크게 거병하고자 했으나 또한 (조선에서) 전해 오는 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에 철저히 정돈된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더구나 지금 요동(遼東)에서 일본의 정세를 역심해 보니, 실로 극히 공순했습니다. 왜적이 원하는 바를 물어보니 실로 책봉을 청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표문을 바치러 장차 이를 것이라 하니, 군사(軍事)는 번거롭지 않을 것이고 한번 책봉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대개 무신 한(취선)이 세 번 조선에 가서 관찰한 것이 이미 진실했고 독신(고양겸)과 얼굴을 맞대고 의논하여 계획한 것이 주도면밀했기 때문입니다. 저 두 신하의 경우, 모두 전장과 관계돼 돌아가는 상황을 친히 목격했으며 이미 별다른 일이 없다고 여겨 임무를 맡긴 것입니다. 신 등이 또한 어찌 감히 고의로 일을 벌여 그들을 흔들고자 하겠습니까. 만약 과연 표문이 도착한 후에는 상황에 따라 재삼 역심을 행하되 반드시 정세와 말에 있어 실로 절실함과 삼가고 공손함이 고루 갖춰져 있다면 이에 사세를 짐작하여 (고양겸이) 제청한 것과 비교하면 될 것입니다. 더욱이 책봉은 허락하되 공납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안에 대해서는 이미 명지(明旨)를 받들었으니, 책봉으로 인하여 공납을 요구하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본부의 의논(部議)을 거친즉, 마땅히 봉공을 허락한다는 (황제의) 뜻을 삼가 준행하여 조정의 신뢰를 드러내고 기미의 권도를 보여야지 공시(貢市) 문제로 지연시켜 목전에서 미완의 일로 만듦으로써 후일에 올바르지 못한 사태의 단서를 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속히 달려가 유시하도록 해야 합니다. 현재 부산의 일본군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으니 독신(고양겸)과 순신(한취선)이 순찰을 돌되 각자 사람을 보내어 실상을 파악하고 회동하여 (함께) 주문을 올려 보고해야 합니다. 책봉을 준행하려 할 시점에 만약 한 명의 왜적이라도 남아 있으면 책봉은 감히 경솔하게 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표문을 받들고 오는 사안에 이르러서는 지금 소서비(少西飛)주 003
각주 003)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 나이토 조안(內藤如安, ?~1626)을 말한다. 1594년 북경에 들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표문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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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진달한 관문을 받아 보니, 내지를 엿보려는 뜻이 있는 듯하므로 여러 측면에서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또한 지나치게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황제의 은혜를) 넓히지 못한다는 인상을 보일 수 있으니, 지나가는 곳에다가 병마를 많이 진병하고 위엄을 보이고 오가는 길을 엄히 경계하여 방비를 엄준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모두 지금의 급선무입니다. 또한 조선국왕의 주본을 살펴보니, 왜추의 정황에 대한 것은 모두 작년 4월 이후부터 윤11월 이전까지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6월 진주성에서 많은 살상을 저지른 일입니다. 일찌기 경략이 11월에 경주의 오유충 등의 일에 관해 갖추어 보고하였고 해당 사안을 다시 조사했습니다. 올봄 천조를 공격할 수 있다는 말은 조사해 보니 작년 가을 조선의 주회인이 구두로 보고한 것과 관련되는데, 비록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직접 조선 측 통사를 심문해 왕경에서 출발한 날짜를 물으니 12월 초순이라고 하는데, 독신 고(양겸)가 상주하여 보고한 것은 올해 정월로 심유경(沈惟敬)이 일본군 진영에 가서 황제의 명을 전한 이후의 일입니다. 아마도 조선이 왜로부터 피해를 심하게 당하여 방어할 힘이 없는데, 우리 군대가 철병한다는 소식을 듣자 틀림없이 두려워 이와 같이 위급한 말을 구실로 삼아 우리 군대를 머무르게 하는 계책을 굳건히 하려 한 것일 뿐입니다. 대저 조선의 상황이 이와 같고 왜노의 정세가 저와 같으니, 끊임없이주 004
각주 004)
원문의 ‘長川’은 ‘晝夜長川’의 약어로 늘, 끊임없이, 계속 등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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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대신하여 지켜야 한다면 우리의 노력과 비용이 무궁할 것이고 준열하게 거부한다면 조선이 위태롭게 되어 멸망하는 상황에 곧 도달할 것입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책봉 요청을 허락하셔서 소국을 긍휼히 여기는 권도를 발휘하면 아마도 계획에 있어 실수함이 없을 것입니다. 총독 고(양겸)에게 명을 내리셔서 한편으로는 일본의 표문이 도착하는 날을 기다려 상세히 심문해서 진위를 파악하여 특별히 소를 갖추어 보고하도록 하시고 적당한 관원을 뽑아 소서비 등을 데리고 표(표문)를 받들어 입경하도록 하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키나가(行長)을 선유하셔서 반드시 부산의 왜호를 모두 철거해야만 책봉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니 구차하게 염려를 끼치지 말라고 하심이 어떨까 합니다. 그 나머지 사정에 대해서는 모두 편의가 허락되는 대로 할 것이며 조정에서 제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병부] 만력 22년 2월 27일에 태자태보 병부상서 석(石) 등이 갖추어 제본을 올렸습니다. 29일에 성지를 받았습니다.
[만력제] 그렇게 하라. 이 사안은 원래 처리하기가 어렵지 않은 것이다. 다만 고양겸에게 분명히 물어 왜적의 무리가 이미 모두 돌아갔는지와 우리 군사가 과연 모두 철수할 수 있는지를 보장하고 아울러 마땅히 각 해방(海防)을 엄칙하여 (일본이) 복종한다는 데 끌려 방비를 잊지 말 것을 보장하라. 왜의 사신은 여전히 거북하지만 너그럽게 맞아들이되 면대하여 약속할 책봉 요청 외에 만약 별도의 요구가 있을 경우 즉시 거절한다면 어찌 큰 위엄과 큰 신의가 모두 보전되지 않겠는가. 이전에 조선에 칙유로 분명히 (명) 조정은 조금의 땅도 넘겨주지 아니할 것이라 말했으나 어찌 저들을 대신해 계속 지킬 까닭이 있겠는가. 고양겸은 일단 도착하면 능력껏 철병을 주도하여 곧바로 그 담략을 보이도록 하라. 금후 다시 법의 조문으로 의논하여 다른 것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병부] 삼가 준행하겠습니다. 마땅히 곧바로 시행해야겠습니다.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내니 번거롭더라도 본부에서 제본을 올려 허락받은 성지의 사리를 잘 살펴서, 계주(薊州)와 요동의 순무아문에 문서를 보는 것 외에 덧붙여 조선국왕에게 이자하여 한결같이 삼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조사하도록 하십시오.
[고양겸] 이를 받고서 이전에 처리한 관련 문서를 찾아보니 전사(前事)와 관련하여 이미 갖추어 제본을 올렸습니다. 앞의 조치를 다한 후에 이번의 문서를 받았습니다. 마땅히 자문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차관을 보내어 소서비를 압송해 입경해서 표문을 받들고 가서 올리도록 하며 또한 왜추 유키나가(行長)에게 선유하여 왜노를 몰아 섬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 외에, 본사에 첩을 내리니 첩 속에 갖추어진 본부가 제본하여 받은 성지의 내용을 잘 살피고 조선국왕에게 이자하여 삼가 (황제의 명을) 준행하도록 하십시오.
[요동도지휘사사] 이를 받들어 헤아려 보건대 마땅히 곧 시행해야겠습니다.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내니 번거롭더라도 삼가 성지의 사리를 받들어 잘 살펴 주시길 바랍니다. 자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문을 조선국왕에게 보냅니다.
 
만력 22년 3월 17일.

  • 각주 001)
    본 문서의 사안인 ‘爲恭報倭情以慰聖懷事’를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원문의 ‘桑榆’는 ‘失之東隅, 收之桑榆’라는 표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 실패했다가 마지막에 성공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는 조선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 나이토 조안(內藤如安, ?~1626)을 말한다. 1594년 북경에 들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표문을 바쳤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원문의 ‘長川’은 ‘晝夜長川’의 약어로 늘, 끊임없이, 계속 등의 의미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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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겸(顧養謙)에게 왜적이 돌아갔는지를 확인하고 왜의 사신에게 책봉 요청 이외에 들어주지 말라는 칙유(勅諭) 등에 관해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가 조선국왕에게 보낸 자문(咨文) 자료번호 : sdmg.k_0002_0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