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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백제공(百濟公)

백제공(百濟公)
 귀신을 감화시켰다는 뜻에서 씨명을 귀실(鬼室)이라고 하였다. 폐제(廢帝) 천평보자(天平寶字) 3년(751)에 고쳐서 백제공(百濟公)의 성을 주었다.
 
【주석】
1. 백제공(百濟公)
『속일본기』 천평보자(天平寶字) 3년(759) 10월 신축조에 “천하의 제성(諸姓) 중에 군(君)자가 붙어 있는 것은 모두 공(公)으로 바꾸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이해에 군(君)이 공(公)으로 개성되었다. 백제공에 앞서 백제군(百濟君)으로 사성한 시기에 대해서는, 『회풍조』 에 나오는 백제공화마려(百濟公和麻呂)가 『경국집(經國集)』 권20 경운(慶雲)4년(707) 9월 8일 대책문에 백왜마려(百倭麻呂)라고 되어 있고, 동 권20 목록의 ‘백제군왜마려대책문2수(百濟君倭麻呂對策文二首)’라는 기록으로부터 추정하면 씨성 백제군의 유래는 경운(慶雲) 연간(704~707)까지 소급된다. 적어도 8세기 초에는 귀실씨가 백제군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천평보자 3년(759)에 다시 백제공(百濟公)으로 개성되었다.
한편 일족으로 백제공수통(百濟公水通)의 경우는 천평승보(天平勝寶) 2년(750) 2월 26일부 「태정관부(太政官符)」(『대일본고문서』 25-2)에 정7위하 수석우소사(守石右少史)백제군수통(百濟君水通)이라고 나오듯이 백제군(百濟君)의 씨성을 갖고 있는 자도 있어 모두 백제공으로 개성하지는 않았다고 보인다.
『속일본기』천평보자(天平寶字) 5년(761) 3월 경자조에 백제인 여민선녀(余民善女)등 4인이 백제공(百濟公)을 받았다고 하여 백제 왕족 중에서도 이 성을 받은 자도 있다. 또 『신찬성씨록』 좌경 제번(하) 「백제공(百濟公)」 조(781)에도 백제국 도모왕의 30세손 문연왕(汶淵王)으로부터 나왔다는 출자를 밝히고, 동 화천국(和泉國) 제번 「백제공」 조에도 백제국 주왕(酒王)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백제공으로 개성한 것은 백제 왕족인 여씨(余氏)뿐 아니라 다른 씨족도 있어 백제공의 씨성을 받은 자들이 어느 계통인지 불분명한 사례가 존재한다.
백제공 일족으로는 백제공추마려(百濟公秋麻呂, 『속일본기』 신호경운 원년 8월 계사조)가 있다. 『회풍조』 에는 그의 시문 3편이 실려 있다. 그 첫머리에 작자 64인 중에서 47번째로 정6위상 단마국사(但馬國司) 백제공마려가 시문 3수를 나이 55세에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중 1편은 「추일어장왕택신라객(秋日於長王宅新羅客)」 으로 가을날 장옥왕 저택에서 신라사를 맞이하며 친교의 기쁨과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한 것이다. 그는 『속일본기』 에 보이는 신호경운 원년(767) 8월 16일 개원의 날에 정6위상으로부터 종5위하에 서임되고, 관직은 음양료 소속으로 천문, 점술, 역법 등을 담당하는 음양대속(陰陽大屬)이 된다. 2년 뒤인 신호경운 3년 8월에는 음양윤(陰陽允)에 임명되었다.
백제군도자고(百濟君刀自古)는 계시(堺市) 대야사(大野寺)에 건립된 토탑(土塔)에서 출토된 기와에 인명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새겨진 인명들은 토탑의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로, 이 토탑은 승려를 비롯하여 지방호족으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건립되었다. 백제군도자고도 이 토탑의 건립에 보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일족으로 백제공수통(百濟公水通, 『속일본기』 보귀 원년 10월 갑인조), 백제공승계(百濟公繩繼, 『속일본후기』 승화 원년 정월 계해조) 등이 있다.
2. 귀신감화지의(鬼神感和之義)
‘귀신을 감화시키다’라는 말의 의미는 귀신과 서로 교감하고 신계(神界)와 통하는 영적인 신통력을 갖은 주술자적인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3. 귀실(鬼室)
귀실씨는 백제공으로 개성되기 이전의 씨명이다. 사료에 보이는 최초의 귀실씨는 귀실복신(鬼室福信)으로 그는 백제 멸망 직후부터 백제 부흥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귀실복신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28년조에 견당사로서 당에 파견된 적이 있고, 무왕의 조카라고도 나온다. 그러나 유인원공덕비(劉仁願功德碑)에는 한솔(扞率) 귀실복신, 『일본서기』 제명(齊明) 6년(660) 9월조에는 은솔(恩率) 귀실복신이라고 하여 그의 원래의 성이 귀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 천지(天智) 4년(665) 춘2월조에는 백제 망명자들에게 관위 수여식이 거행되었는데, 귀실집사(鬼室集斯)에 대해 “좌평 복신의 공적으로 인하여 귀실집사에게 소금하를 주었다”라고 하였다. 귀실집사는 귀실복신의 아들일 가능성 높으며 백강전투 직후에 백제 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조정에서는 귀실집사에게 학직두(學職頭)라는 관직을 수여하였다. 이 직책은 율령제하에서 식부성 산하 대학료의 장관에 해당한다. 왜 왕권의 학문과 학교 행정을 총괄하는 책임자를 백제인에게 맡겼다는 것은 백제의 선진 지식과 교육 제도를 이입하려는 왜 왕권의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하군(滋賀縣) 포생군(蒲生郡) 일야정시(日野町市) 소야(小野)에는 귀실집사를 모시는 귀실신사가 있으며, 신사 뒤편에 그의 묘비가 보존되어 있다. 명문의 정면에 ‘귀실집사묘(鬼室集斯墓)’라고 명기되어 있고, 우측에 ‘주조 3년 무자 11월 8일(朱鳥三年戊子十一月八日)’, 좌측에 ‘서손미성조(庶孫美成造)’라고 새겨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포생군에 정착한 귀실집사라는 인물이 왜 왕권 내에서 교육과 학교 행정의 중책인 학직두를 맡아 지역 사회가 배출한 위인으로 존숭되었음을 말해 준다.
귀실집사의 일족으로는 앞에서 본 백제군, 백제공 씨성의 인물을 비롯하여 귀실의 씨명으로 활동한 인물도 다수 보인다. 8세기 사경 문서인 『정창원문서』 에는 귀실소동인(鬼室小東人), 귀실석차(鬼室石次), 귀실충만려(鬼室虫萬呂), 귀실호인(鬼室乎人) 등은 경전을 필사하는 사경의 업무에 종사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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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공(百濟公) 자료번호 : ss.k_0002_0020_0040_0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