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하가 청국 관원에게 먼저 논의를 마치고 현지조사를 시작할 것을 서신으로 요청
□ 같은 날[1887년 4월 20일] 청국 관원에게 답장함
답장 잘 알았습니다. 폐직(敝職 : 이중하)이 일전에 우러러 답장했는데 스스로 ‘글자마다 진실하다’하시더니 이제 보내주신 글을 받자오니 오히려 ‘억지의 말과 이치에 벗어난다’고 하니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르치심에 또한 혹시 글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지요? 연래 폐방(敝邦 : 조선)이 토문계지사(土門界址事)로 상국(上國)을 번거롭게 하고 아직도 깨끗이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은혜는 하늘처럼 크고 배반을 포용하고 거짓을 관대히 용서하니 폐방(敝邦)은 황공해 하는 정성은 돌려서 더욱 조치할 바 없습니다. 왕년에 폐직(敝職 : 이중하)이 와서는 일이 중대한 관계로 감히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형편 사실을 돌아가서 우리 조정에 알렸습니다. 이로부터 이후에는 토문·두만은 하나의 강이고 비계(碑界) 동쪽 도랑은 송화강으로 들어감을 다 이미 살펴서 분별했습니다. 이제 지명(地名)과 땅의 지형(土形), 짐을 나르는 것[輸卜], 경계를 지우는 것[邊限] 등 허다한 명확히 하기 어려운 말로는 할 수 없지만 다시 감히 자질구레하게 합니다. 이 한 가지 일은 이미 타당하게 정했으니 대소국 간에 3백 년간 원래 정한 경계는 본래부터 전과 같은데 다시 어찌 한마디 말로 분별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황조(皇朝)는 번국(藩國)의 처지가 되어 동정하고 국경을 몹시 슬프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혹 경계가 옛 제도와 합치되지 않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총서 찰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무산 서쪽 위로 있는 분수령은 목극등이 돌에 새겨 비를 세운 땅으로 응당 고증할 것이 있고 분별하여야 할 것이 있으면 관원을 파견하여 모여 조사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의한다면, 귀국처와 폐직(敝職 : 이중하)은 지금 그 임무를 맡고 있으니 마땅히 어떻게 고증하고 어떻게 분별해야 하겠습니까? 반드시 도지(圖誌)에서 산수(山水)를 비교하고 그 경계 지점(界址)을 증험하고 그 명칭을 자세히 대조하여 조사해야 합니다. 이번에 지난해 총서(總署) 주고(奏稿)로 또한 두루 『흠정통전』과 『회전지도』와 『일통여도』를 두루 살펴서 거듭 도문강이 경계가 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제 삼가 지도를 살펴 물길을 따라가니 홍토산수(紅土山水)는 바로 대도문강(大圖們江)이었습니다. 귀국처 또한 응당 폐직과 같이 수긍할 것이고 같이 『일통전도』와 『길림지도』를 보고 충분히 일일이 대조해 증명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필 괜히 필설(筆舌)을 허비해가며 시일(時日)만 묵힐 것입니까? 귀국처는 이제 목비(穆碑)주 340 일안(一案)으로 명백히 당시 성유(聖諭) 중 그 나라와 상관이 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우리나라 변계를 조사해보니 예로부터 원래 정한 경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穆咨)주 341 중에 또한 이르기를, ‘원래 강북(江北)은 대국(大國 : 淸國)의 경계가 되고 강남(江南)은 소국(小國 : 朝鮮)의 경계가 된다. 세월이 이미 오래고 의논하지 않았다’고 하니, 당시 유지(諭旨)를 받들어 변경을 조사한다고 한 것은 바로 원래 정한 경계에 비를 세웠다는 것을 자세히 밝히는 것입니다. 소국에 다른 일이 있어서가 아니니 따라서 그 나라와 상관이 없다는 성유(聖諭)이지 않을까 합니다. 대개 변경을 조사하고 비를 세우는 것은 경계를 정하고 비를 세우는 것과 그 뜻이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비문(碑文)에 ‘분계(分界)’라는 글자가 없다는 것은 당일에 비로소 분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전례대로 표시했다는 것일 뿐이니 ‘분계’라는 글자가 있고 없는 것이 무엇이 족히 의아하게 생각됩니까? 귀국처는 매번 이 비(碑)로써 족히 증거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돌리는데, 우리나라에 있어서 황조(皇朝)의 올바르고 알맞은 법으로 받들어 삼는 것이 지금까지 3백 년으로 그 관계됨은 지극히 중차대한 것인데 어찌 폐직(敝職 : 이중하) 일개가 홀로 주장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지금 도문강의 계한(界限)을 조사하는 것은 이미 명백히 도지(圖誌)에서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니 다만 마땅히 홍토(紅土)주 342 위에 한 비석을 더 세워서 목비(穆碑)주 343에서 토문(土門)의 뜻주 344을 명확히 하려는 까닭에 일전에 이미 속마음을 토로했고 감히 헤아려 증변(證卞)한 6조(六條)주 345로 어리석은 저의 견해를 끝에 붙일까 하니 받들어 보아주십시오. 모름지기 한번 공당(公堂)에서 뵙고 논의를 해 상세히 증거한 후에 산에 들어갈 날짜를 상의해 정하고 따라서 빨리 쫓아서 출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바로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답장 잘 알았습니다. 폐직(敝職 : 이중하)이 일전에 우러러 답장했는데 스스로 ‘글자마다 진실하다’하시더니 이제 보내주신 글을 받자오니 오히려 ‘억지의 말과 이치에 벗어난다’고 하니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르치심에 또한 혹시 글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지요? 연래 폐방(敝邦 : 조선)이 토문계지사(土門界址事)로 상국(上國)을 번거롭게 하고 아직도 깨끗이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은혜는 하늘처럼 크고 배반을 포용하고 거짓을 관대히 용서하니 폐방(敝邦)은 황공해 하는 정성은 돌려서 더욱 조치할 바 없습니다. 왕년에 폐직(敝職 : 이중하)이 와서는 일이 중대한 관계로 감히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형편 사실을 돌아가서 우리 조정에 알렸습니다. 이로부터 이후에는 토문·두만은 하나의 강이고 비계(碑界) 동쪽 도랑은 송화강으로 들어감을 다 이미 살펴서 분별했습니다. 이제 지명(地名)과 땅의 지형(土形), 짐을 나르는 것[輸卜], 경계를 지우는 것[邊限] 등 허다한 명확히 하기 어려운 말로는 할 수 없지만 다시 감히 자질구레하게 합니다. 이 한 가지 일은 이미 타당하게 정했으니 대소국 간에 3백 년간 원래 정한 경계는 본래부터 전과 같은데 다시 어찌 한마디 말로 분별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황조(皇朝)는 번국(藩國)의 처지가 되어 동정하고 국경을 몹시 슬프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혹 경계가 옛 제도와 합치되지 않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총서 찰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무산 서쪽 위로 있는 분수령은 목극등이 돌에 새겨 비를 세운 땅으로 응당 고증할 것이 있고 분별하여야 할 것이 있으면 관원을 파견하여 모여 조사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의한다면, 귀국처와 폐직(敝職 : 이중하)은 지금 그 임무를 맡고 있으니 마땅히 어떻게 고증하고 어떻게 분별해야 하겠습니까? 반드시 도지(圖誌)에서 산수(山水)를 비교하고 그 경계 지점(界址)을 증험하고 그 명칭을 자세히 대조하여 조사해야 합니다. 이번에 지난해 총서(總署) 주고(奏稿)로 또한 두루 『흠정통전』과 『회전지도』와 『일통여도』를 두루 살펴서 거듭 도문강이 경계가 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제 삼가 지도를 살펴 물길을 따라가니 홍토산수(紅土山水)는 바로 대도문강(大圖們江)이었습니다. 귀국처 또한 응당 폐직과 같이 수긍할 것이고 같이 『일통전도』와 『길림지도』를 보고 충분히 일일이 대조해 증명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필 괜히 필설(筆舌)을 허비해가며 시일(時日)만 묵힐 것입니까? 귀국처는 이제 목비(穆碑)주 340 일안(一案)으로 명백히 당시 성유(聖諭) 중 그 나라와 상관이 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우리나라 변계를 조사해보니 예로부터 원래 정한 경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穆咨)주 341 중에 또한 이르기를, ‘원래 강북(江北)은 대국(大國 : 淸國)의 경계가 되고 강남(江南)은 소국(小國 : 朝鮮)의 경계가 된다. 세월이 이미 오래고 의논하지 않았다’고 하니, 당시 유지(諭旨)를 받들어 변경을 조사한다고 한 것은 바로 원래 정한 경계에 비를 세웠다는 것을 자세히 밝히는 것입니다. 소국에 다른 일이 있어서가 아니니 따라서 그 나라와 상관이 없다는 성유(聖諭)이지 않을까 합니다. 대개 변경을 조사하고 비를 세우는 것은 경계를 정하고 비를 세우는 것과 그 뜻이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비문(碑文)에 ‘분계(分界)’라는 글자가 없다는 것은 당일에 비로소 분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전례대로 표시했다는 것일 뿐이니 ‘분계’라는 글자가 있고 없는 것이 무엇이 족히 의아하게 생각됩니까? 귀국처는 매번 이 비(碑)로써 족히 증거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돌리는데, 우리나라에 있어서 황조(皇朝)의 올바르고 알맞은 법으로 받들어 삼는 것이 지금까지 3백 년으로 그 관계됨은 지극히 중차대한 것인데 어찌 폐직(敝職 : 이중하) 일개가 홀로 주장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지금 도문강의 계한(界限)을 조사하는 것은 이미 명백히 도지(圖誌)에서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니 다만 마땅히 홍토(紅土)주 342 위에 한 비석을 더 세워서 목비(穆碑)주 343에서 토문(土門)의 뜻주 344을 명확히 하려는 까닭에 일전에 이미 속마음을 토로했고 감히 헤아려 증변(證卞)한 6조(六條)주 345로 어리석은 저의 견해를 끝에 붙일까 하니 받들어 보아주십시오. 모름지기 한번 공당(公堂)에서 뵙고 논의를 해 상세히 증거한 후에 산에 들어갈 날짜를 상의해 정하고 따라서 빨리 쫓아서 출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바로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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