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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거란과 북방 오랑캐들의 군대에 대해 방비해야 한다는 지제고(知制誥) 장방평(張方平)의 상언

  • 날짜
    1044년 6월 (음)(慶曆 4年(1044) 6월)
  • 출전
    卷150 慶曆 4年(1044) 6월
지제고(知制誥) 장방평(張方平)주 001
각주 001)
張方平 : 1007~1091. 북송의 관인. 應天 宋城(현재 河南 商丘 서남쪽) 사람으로 字는 安道이다. 景祐 元年(1034)에 授校書郞, 知昆山縣이 되었고 寶元 元年(1038)에는 著作佐郞, 通判睦州가 되었다. 慶曆 元年(1041)에는 御使中丞, 三司使가 되었다. 至和 元年(1054)에 戶部侍郞知益州가 되고 神宗 즉위 후 관직이 參知政事에 올랐다.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이고 王安石의 변법을 극력 반대하고 신법의 해악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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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했다. “신이 밖의 말을 조용히 듣건대, 북쪽의 적[거란]이 영역을 지키지 않고 국경에 성을 쌓으며 변방의 관리가 (송의) 군대(의 상태)를 조사하여 알려고 염탐하고, 또 다시 사신을 보내어 온다고들 합니다. 일은 진실로 허실을 아직 살필 수 없으므로 국가가 적과 통한 것이 이미 40년이나, 일이 다하면 반드시 변하며, 이익이 다하면 소원해지는 것은 세상의 이치라는 것인데, 돌아보건대 다만 시간만 보내었습니다. 북방의 여러 오랑캐들이 적에게 재갈을 물려 따르니 보해(步奚), 고려, 달단 같은 이들은 항상 안으로는 복속하지 않는 마음을 품고 다만 억지로 속해 있을 따름입니다. 지난 겨울 적이 많은 무리로 하서 지역에 임하여서는 스스로 풀을 줍듯이 쉽다고 여겼으나 얼마 있다가 달아나 흩어져 돌아갔습니다. 속으로는 오랑캐에게 치욕을 느끼면서 또 우리가 서하의 사람을 받아들였다고 의심하니, 이윽고 치욕과 의심으로 말이 일어나고 일이 생겨서 생각은 우리에게 근심을 품게 하니, 어찌 보전에 다름이 있겠습니까? 무릇 군대란 위험한 것이니, 쉬운 말이 아닙니다. 만약 신뢰와 우호를 맺을 수 있다면, 조정이 어찌 사방의 오랑캐와 전쟁하기를 바라겠습니까? 곧 일이 부득이한 데에 이르러서 또한 상하가 모두 힘을 내어 외교적으로 타협하는 계책을 꾀하고 적을 저지하는 계산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하삭[河朔]의 군대는 다만 30만 명일 뿐만 아니라 변경은 1천리이고 당수(塘水)의 2/3를 차지하고 있어, 전력을 다해서 그 요해처의 성읍과 망루를 차지하면 방어는 구천의 위에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많은 군대가 전(澶), 위(魏)주 002
각주 002)
魏 : 북송의 지명. 이는 魏縣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魏縣은 前漢代에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시대가 지나면서 그 위치와 명칭이 여러 번 변경되었다. 북송에서는 魏縣을 大名府에 소속시키고 위치를 현재 魏縣의 서남쪽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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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中山)주 003
각주 003)
中山 : 中山은 春秋時代에 건립된 국가의 명칭이었다. 그 수도는 현재 河北省 定州市에 두어졌고, 이후 前漢 때에도 中山郡이 이곳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中山縣은 五代 後梁 開平 3年(909)에 설치되었는데, 그 위치는 현재 河北省 唐縣의 서남쪽이었다. 後唐 同光 초에 中山縣은 다시 唐縣으로 이름이 변경되었기 때문에 북송에서는 中山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中山은 定州와 唐縣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고, 이곳은 거란(요)과 북송이 접경을 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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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하면서 벽을 굳게 하고 싸우지 않으며, 들판을 비워 (적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린다면 다음에 뛰어난 계책을 내어 편의를 엿볼 수 있고, 많은 적이 돌아가기를 기다린다면, 이러면 우리에게 승리를 거둘 수 없고, 적에게는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적은 오랫동안 중원과 통하여서 즐거운 마음으로 먹이를 먹게 되어, 귀족들은 잘난 체하고 편안한 데에 익숙하고 부족 사람들은 전투를 연습하지 않아 거란(요)의 본속에 있어서는 쇠하여짐이 매우 심하고, 또 모자와 형제가 안으로는 서로 의심하여 틈이 벌어지고 상하가 배반하는 마음을 품었으니, 이것은 바로 위태롭고 어지러운 모습이며 중국이 승세를 탈만한 기회입니다. 만약 조정이 심모원려(深謀遠慮)한 뜻이 있다면, 유주와 계주를 도모할 만한데, 오히려 중원의 근심이 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진실로 그 위명을 떨치시고 조정은 그 계책을 살펴서 내외의 모든 문무 관료들이 각기 자신의 힘을 다하면, 적이 한 번 크게 일어나도 뜻을 이룰 수 없어 내부의 변란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외부의 반란이 있어서 오랑캐의 세력 또한 와해되어 산후(山後)의 땅을, 하늘이 그 누군가에게 다시 중원의 땅으로 통합되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은 폐하께서 근심을 미리 예방할 것을 생각하시고, 먼저 도모할 일을 고찰하셔서 엄정한 기운으로 점차 깨끗이 하여 궁전을 맑게 하여 때에 맞추어 연회를 열고 쉬면서 대신을 불러 만나 그들로 하여금 계책을 내놓게 하여 의논할 참모를 정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루라도 변경에 급한 일이 있어도 창졸간에 생각지도 못한 걱정이 없기를 다만 바랄 뿐입니다. 지금 서쪽의 서하는 처음으로 평안하지만 가만히 놔두면 평온한 상태를 오래 보존하지 못할 것이니, 아침저녁의 근심이 없으려면 장교로 책임을 맡을 만한 이가 조금씩 황하 북쪽으로 옮겨서 사졸들과 함께 훈련을 거듭하고 점차 지역의 풍습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관리를 선발하고 미숫가루를 모으고 각종 무기를 정비하고 마굿간을 수리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금 반드시 해야 할 임무이며 평소에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준비하고 사용하지 않는 것은 정치의 대원칙이며, 일에 닥쳐 어지러워하면 무엇으로 진정하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조정이 오래동안 논의한 것이며, 선비가 언제나 말하는 것입니다. 신은 황송하게도 조정의 가까이에 있으면서 어리석은 걱정이 미치는 바를 감히 스스로 숨기지 못하였으니, 대궐에서 황제 폐하께서 헤아리고 선택하여 생각하여 보십시오.”

  • 각주 001)
    張方平 : 1007~1091. 북송의 관인. 應天 宋城(현재 河南 商丘 서남쪽) 사람으로 字는 安道이다. 景祐 元年(1034)에 授校書郞, 知昆山縣이 되었고 寶元 元年(1038)에는 著作佐郞, 通判睦州가 되었다. 慶曆 元年(1041)에는 御使中丞, 三司使가 되었다. 至和 元年(1054)에 戶部侍郞知益州가 되고 神宗 즉위 후 관직이 參知政事에 올랐다.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이고 王安石의 변법을 극력 반대하고 신법의 해악을 역설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魏 : 북송의 지명. 이는 魏縣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魏縣은 前漢代에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시대가 지나면서 그 위치와 명칭이 여러 번 변경되었다. 북송에서는 魏縣을 大名府에 소속시키고 위치를 현재 魏縣의 서남쪽으로 옮겼다. 바로가기
  • 각주 003)
    中山 : 中山은 春秋時代에 건립된 국가의 명칭이었다. 그 수도는 현재 河北省 定州市에 두어졌고, 이후 前漢 때에도 中山郡이 이곳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中山縣은 五代 後梁 開平 3年(909)에 설치되었는데, 그 위치는 현재 河北省 唐縣의 서남쪽이었다. 後唐 同光 초에 中山縣은 다시 唐縣으로 이름이 변경되었기 때문에 북송에서는 中山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中山은 定州와 唐縣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고, 이곳은 거란(요)과 북송이 접경을 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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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과 북방 오랑캐들의 군대에 대해 방비해야 한다는 지제고(知制誥) 장방평(張方平)의 상언 자료번호 : jt.k_0004_0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