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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변방의 방비에 관한 어사중승(御史中丞) 가창조(賈昌朝)의 상소

  • 날짜
    1042년 10월 (음)(慶曆 2年(1042) 10月 戊辰)
  • 출전
    卷138, 慶曆 2年(1042) 10月 戊辰
어사중승(御史中丞)주 001
각주 001)
御史中丞 : 북송의 관직. 御史臺의 실질적인 장관이다. 宋初에는 당~오대의 제도에 기반하여 정4품이었으나, 元豊 연간 新制 제정 이후에는 종3품, 元祐 연간에는 정3품으로 승격되었다가 南宋代에 이르러서는 다시 종3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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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조(賈昌朝)주 002
각주 002)
賈昌朝 : 997~1065. 북송의 관인. 開封 사람으로, 字는 子明이다. 眞宗 天禧 元年(1017) 진사시에 급제하여 國子監 說書에 제수되었다. 이후 仁宗代에 崇政殿 說書와 天章閣侍講, 權御史中丞兼判國子監에 올랐고, 慶曆 연간에 參知政事, 樞密使, 同平章事 등의 직을 역임하고, 慶曆 7年(1047) 재상직에서 물러나 判大名府를 맡았다. 英宗代에는 鳳翔節度使로 옮기고 魏國公에 봉해졌다. 治平 2年(1065)에 사망했고 司空兼侍中을 추증되었다. 시호는 文元으로 영종은 그의 묘비에 친히 ‘大儒元老之碑’라 제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박학하고 논변에 뛰어났다고 평가를 받았다. 그의 문집이 3권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으며, 음운에 밝은 그가 남긴 『群經音辨』, 『春秋要論』 등의 저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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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상소를 올려 이르기를, “태조주 003
각주 003)
太祖 : 927~976. 재위 960~976. 송을 건국한 趙匡胤이다. 시호 英武睿文神德聖功至明大孝皇帝. 처음 後周의 世宗 밑에서 禁軍의 장이 되었고, 거란·南唐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금군총사령이 되었다. 세종의 사후 北漢 침입의 위기를 당하여 금군에 옹립되어 제위에 올랐다. 즉위 후 후주 유신의 반란을 진압하여 화북의 땅을 확보하고 963년 이후 荊南·湖南·後蜀·南漢·남당 등의 江南 및 四川의 후국들을 병합하였다. 안으로는 명신 趙普의 獻策을 받아들여 무인정치를 폐하고 문치주의에 의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하였다. 즉, 節度使 지배체제를 폐지, 중앙에 민정·병정·재정의 3권을 집중하고 금군을 강화하여 황제의 독재권을 강화하였다. 지방통치를 위해 전국에 파견되는 관료의 채용을 위한 과거제도를 정비하고 최종시험을 황제 스스로 실시하는 殿試 또는 御試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실행함에 있어 점진적인 온건한 수단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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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천하에 당말오대(唐末五代) 방진(方鎭)[번진]의 무신(武臣)·토병(土兵)·아교(牙校)주 004
각주 004)
牙校 : 낮은 직급의 武官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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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성행함을 거울로 삼아 그 권한을 모두 거두니, 당시 만세의 이로움이라 생각하였습니다. 태종이 천명을 받기에 이르자 장수들은 대부분 권세있는 자들에게 붙으려 하고, 옛 신료들은 귀족들과 친척이 되니, 상이 벌보다 무겁고 위엄이 은혜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신령(神靈)에 기대어 일을 계획하고는 군사를 내어 외구(外寇)를 방어하면서 공이 있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이때 이래로 병사들은 다시 기세를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세에 은행(恩倖) 자제들이 주전(廚傳)을 거짓으로 꾀어내고 명예를 탐내어 훈효(勳效)를 거치지 않고 앉아서 무작(武爵)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전천(轉遷)을 빠르게 하고 봉사(俸賜)를 두텁게 하여 이익을 챙기는 것에 불과할 뿐이니, 외침을 막아내고 환난을 평정하는 것을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변방에 변고가 없는 것에 힘입어 겨우 의탁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서강(西羌)의 반역주 005
각주 005)
西羌之叛 : 1038년 西夏의 李元昊가 황제라 칭하고 大夏를 건국한 이후, 1040~1042년까지 군사를 일으킨 전투에서 송군이 격파당한 것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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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장령(將領)을 갑작스럽게 선발하고 병사들을 모았는데, 병사가 평소 훈련하지 않았기에 지휘에 어려움이 많고, 장수가 사람을 얻지 못하니 어찌 (장수가) 자주 바뀌는 것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자주 바뀌는 장수가 숙련되지 않은 군사를 부리기에 전쟁에서 반드시 패배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번진의 병권을 심하게 거둔 것의 폐단입니다. 또 친구(親舊)·은행(恩倖)이 이미 군직(軍職)으로 임명된 경우에는 곧바로 장수가 되어 군사를 움직이는 계략[병모(兵謀)]과 전법(戰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루아침에 천만 사졸의 목숨을 맡기니 용인(庸人)을 사지로 내몰게 됩니다. 이는 친구·은행을 등용하는 것의 폐단입니다.
신은 방진을 담당하는 자를 무수하게 바꾸는 것에 대하여, 관군(管軍)과 자사(刺史)주 006
각주 006)
刺史 : 북송의 관직. 한 무제 연간 처음 둔 것으로, 본래 郡·國을 감독하기 위하여 각 州에 둔 검찰관이었다. 행정장관이 아니므로 정해진 위치 없이 항상 관내를 이동하였다. 처음에는 직위가 郡의 太守보다 낮았으나 점차 지위가 높아져 한 州의 장관으로서 군사·민정을 관장하는 軍閥로 성장하였다. 당·송을 거쳐 明代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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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관질은 그 제수하는 바를 잘 마땅히 살펴 공(功)이 있기를 기다릴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양숭훈(楊崇勳)주 007
각주 007)
楊崇勳 : 956~1035. 北宋의 관인. 蓟州 사람으로, 字는 寶臣이다. 그의 조부 楊守斌은 태조를 모시며 龍捷指揮使를 역임하였고, 그의 부친 楊全美는 태종대 殿前指揮使를 역임하였다. 양숭훈은 그의 아버지의 직위로 인하여 東西班承旨가 되어 眞宗을 東宮에서부터 보좌하였다. 당시 태종이 그가 학문을 즐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하사하였으며, 그때부터 兵法과 前代의 역사를 통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종이 즉위한 후에 그를 遷左侍禁 西頭供奉官 寄班祗候로 삼았고, 이후 樞密使, 同平章事 河陽三城節度使등을 역임하는 등 오랜 기간 군직을 맡았다. 다만 그의 성품은 탐욕스럽고 인색하였으며 타인을 해치는 것을 즐겨 그를 두려워하여 피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평가받았다. 사후에 太尉를 추증받고, 시호는 恭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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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량(李昭亮)주 008
각주 008)
李昭亮 : ?~1063. 北宋의 관인. 潞州 上黨 사람으로, 字는 晦之이며, 원래 이름은 李昭慶이나 후에 이소량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부친 李繼隆은 태종의 明德李皇后의 오라비이다. 이에 그는 4세에 東頭供奉官이 되어 황궁에 출입하였다. 이후 殿前副都指揮使, 同中書門下平章事 및 武寧·天平·彰信·泰寧·昭德軍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사후에 中書令을 추증받았고, 시호는 良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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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와 같이 총신(寵臣)들이 오히려 변방에 부임해 있으니, 의당 속히 인물을 선별하여 그들을 대신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신이 폐단을 구제할 대강을 아뢰는 바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변방의 방비에 더욱 힘을 써야할 6가지 방안을 아룁니다.
제1조, 장수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중략) 제2조, 토병을 다시 두어야 합니다. (중략) 제3조 영졸(營卒)을 잘 훈련해야 합니다. (중략)
제4조. 외역(外域)을 잘 통제해야 합니다. 지금 원번(遠蕃)들이 동요하며 중국과 통교하고 있습니다. 북방의 여러 나라들은 거란(요)에 신속하고 서방의 여러나라들은 이원호(李元昊)에 신속하고서, 서[서하]와 북[거란]이 연맹하여 중국의 세력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비록 서쪽의 오랑캐들을 오게 하여 예물을 두텁게 주고 있으나, 이는 조정에서 두 적[거란과 서하]에게 세폐(歲幣)를 주는 것으로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변방을 방비할 때에는 서쪽으로는 금성(金城)주 009
각주 009)
金城 : 북송의 지명. 이는 金城關을 지칭하는 것이다. 金城關은 隋 開皇 18年(598)에 金城津을 고쳐서 설치한 것이다. 위치는 현재 甘肅省 蘭州市 서북쪽의 황하 北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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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군(上郡)주 010
각주 010)
上郡 : 唐代 天寶 元年(742)에 綏州를 고쳐서 설치했고, 그 치소는 龍泉縣(현재 陝西省 綏德縣)에 있었다. 乾元 元年(758)에 다시 綏州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북송에는 上郡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아마 북송의 북서쪽 변경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계속 사용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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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으로는 운중(雲中)주 011
각주 011)
雲中 : 거란(요)의 지명. 北周 시기에 太平縣을 고쳐서 설치한 縣이었다. 위치는 현재 山西省 大同市이다. 隋代에 폐지되었다가 唐 開元 18年(730)에 다시 설치되었다. 거란(요)에서는 大同府의 치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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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문(雁門)이었습니다. 지금은 창주(滄州)주 012
각주 012)
滄州 : 북송의 지명. 北魏 熙平 2年(517)에 饒安縣(현재 河北省 鹽山縣의 서남쪽)에 치소를 두고 처음 설치하였다. 隋代에 폐지되었다가 唐代 武德 元年(618)에 다시 설치하면서 치소는 淸池縣(현재 河北省 滄縣의 동남쪽)에 두었다. 이후 天寶 연간에 景城郡으로 개명되었다가, 乾元 元年(758)에 다시 滄州가 되었다. 그 영역은 대략 현재 天津市 海河 이남, 靜海縣과 淸縣 및 泊頭市 이동, 山東省 寧津, 無棣 이북 지역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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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진주(秦州)주 013
각주 013)
秦州 : 북송의 지명. 魏代부터 隴右 지역(현재 甘肅省 서쪽, 황하 동쪽 지역에 해당)을 나누어 설치한 것으로, 秦邑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치폐, 치소 이동을 거쳤고 唐代 乾元 元年(758)에 秦州로 이름을 되돌렸고, 치소는 成紀縣(현재 甘肅省 秦安縣의 서북쪽)에 있었다. 토번에 함락되었다가 大中 3年(849)에 당이 수복했다. 북송이 치소를 현재 甘肅省 天水市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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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기까지 수천리가 이어져 있고 산과 바다의 험준함이 없어서 오직 주현(州縣)의 진수(鎭戍)에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해마다 지급하는 바가 수천만 이상인데 천하로부터 세입(歲入)한 수로 겨우 충족시키고 있으나, 일곡(一穀)이라도 익지 않으면 간혹 낭패를 보기도 합니다. 거란(요)은 근래에 연인(燕人)을 함께 등용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관제를 세우니 중국[中夏]과 모두 같습니다. 이원호의 무리들은 하남(河南)의 여러 군(郡)에 근거를 두고는 상벌(賞罰)을 행하고 사람을 잘 쓰고 있으니, 이는 중국의 근심입니다. 사주(沙州)주 014
각주 014)
沙州 : 漢에서 魏晋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명칭은 敦煌郡이었다. 前凉의 張駿이 敦煌, 晋昌, 高昌 세 郡과 西域都護, 戊己校尉, 玉門大護軍의 세 軍營을 합하여 沙州로 삼았는데, 그 지역에 鳴沙山이 있어서 沙州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이후에 西胡校尉 楊宣을 刺史로 삼았다. 3년 후에 다시 郡이 되었다. 北凉이 敦煌을 차지하자 沙州를 설치하였고, 원래 孟敏을 사주자사로 삼았다. 正光 6年(525)에 명칭을 瓜州로 바꾸고 또 義州로 바꾸었다가, 莊帝가 다시 瓜州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모두 치소는 敦煌에 있었다. 隋代에는 관할 영역이 축소되어 단지 敦煌, 常樂, 玉門 세 縣만을 관할하였다. 唐 武德 5年(622)에 瓜州의 명칭을 西沙州로 바꾸었고 치소는 敦煌에 두었다. 貞觀 7年(633)에는 명칭에서 西를 삭제하고 凉州都督府에 예속시켰다. 貞元 2年(786, 建中 2년이라는 설도 있다)에 토번에 의해 함락되었다. 大中 2年(848)에 張議潮가 주의 백성들을 이끌고 토번 군대를 몰아내면서 다시 당의 州 제도로 돌아갔다. 大中 5年(851)에 당 宣宗이 沙州에 歸義軍을 설치하는 조서를 내리고, 張議潮를 歸義軍節度使에 봉하였다. 이후 沙州는 歸義軍의 중심으로서 거의 200년에 걸쳐 張, 索, 曹氏 가문이 웅거하는 지역이 되었다. 北宋 景祐 3年(1036)에는 西夏에 의해 점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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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시라(唃厮囉)주 015
각주 015)
唃厮囉 : 吐番 贊普의 후예인 唃厮囉는 高昌 磨棆國에서 출생하여 河州를 거쳐 宗哥族 승려 李立遵 등의 추대로 수령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송 인종 天聖 10年(1032)에는 靑唐으로 옮겨 제도를 정비하고, 이후 백년 가까이 湟水 뿐만 아니라 秦鳳路 이서의 黃河 유역과 洮水 유역을 포괄하는 지배자가 되었으며, 그가 세운 정권을 唃厮囉라 칭한다. 재위기간 동안 인접국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주력하여, 송에 귀부하고 서하에는 반대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원호의 공격을 수차례 받았으나 모두 막아냈으며 그의 계승자들 역시도 대대로 모두 송조에서 관직을 받고 책봉을 받아 북송의 서하에 대한 관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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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明珠)주 016
각주 016)
明珠 : 북송과 서하의 경계 지역인 현재 甘肅省 일대에는 羌族과 토번 계열의 민족들이 있었는데, 明珠도 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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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장(滅藏)주 017
각주 017)
滅藏 : 송과 서하의 경계 지역인 현재 甘肅省 일대에는 羌族과 토번 계열의 민족들이 있었는데, 滅藏도 그 중 하나였다. 滅臧으로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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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종족과 같은 서쪽의 여러 나라들과 흑수여진(黑水女眞)·고려(高麗)·신라(新羅) 등과 같이 가까운 북쪽은 오래전부터 중국과 통교를 하였는데, 지금 두 적[거란과 서하]과 사이가 격절하고 있음을 잘 헤아려 가능하면 (이들에게) 사신으로 갈 인재를 모아 내조하도록 초유하여 그와 같이 한다면 두 적이 필시 여러 나라들을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적의 미워함은 곧 (우리의) 방비함이 될 것이고, 방비함은 곧 세력이 나뉘는 것이니 이는 중국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제5조. 번부(蕃部)를 안무해야 합니다. (중략) 제6조. 정찰을 잘 해야 합니다.
처음에 가창조는 거란(요)의 사신을 관반(館伴)하였던 인물로 화친은 나라를 욕보이는 것이고 좁은 땅이라도 역시 허락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음에, 조정에서는 금백(金帛)으로 거란(요)을 꾀어 이원호를 공격하게 하고자 할 것을 논의하였다. 가창조가 이르기를, “거란(요)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을 세운다면 보답으로 요구하는 바가 끝이 없을 것이고, 또한 우리를 두고 이원호와 거래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상결찬(尙結贊)주 018
각주 018)
尙結贊 : 샹겔젠(라낭)으로 唐代 토번의 大相이다. 당 德宗 建中 4年(783) 朱泚의 난에 奉天으로 피한 덕종은 위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서역의 北庭과 伊西의 영역 일부를 할양하고, 매년 토번에 彩絹 1만 필을 歲幣로 주는 대가로 토번의 출병을 제안하였고, 결찬은 이를 수락하였다. 이에 이듬해 토번의 2만의 군사는 당군과 연합하여 반군의 주력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고 돌아갔으나, 당은 토번군이 京師 함락에까지 함께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맹약을 파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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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을 도와 주차(朱泚)주 019
각주 019)
朱泚 : 742~784. 唐의 관인. 幽州 昌平 사람이다. 처음에 幽州盧龍節度使 李懷仙의 部將으로 있었는데 代宗 大曆 3年(768) 朱希彩 등과 함께 이회선을 살해하고, 주희채와의 갈등 끝에 대력 7年(772) 스스로 절도사가 되었다. 德宗 建中 3年(782) 동생 朱滔가 당에 반기를 들어 파직되자 다음 해 군사를 일으켜 長安을 공격하였다. 덕종은 奉天으로 달아나고, 그는 주변세력들의 옹립을 받아 황제가 되고 나라 이름을 秦, 연호를 應天이라 하였다. 興元 元年(784) 나라임을 다시 漢으로 고치고 ‘漢元天皇’이라 자칭하였다. 이후 李晟이 京師를 수복하자 彭原으로 달아났다가 부장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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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육지(陸贄)주 020
각주 020)
陸贄 : 754∼805. 당의 관인. 蘇州 嘉興 출신으로, 字는 敬輿이다. 大曆 6年(771) 진사시에 급제하여 華州鄭縣尉가 되고, 이후 渭南主簿, 監察御史, 翰林學士, 諫議大夫, 兵部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덕종의 신임을 얻었으나, 황제에게 직언을 잘하여 점차 덕종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다. 주차의 난 당시 봉천으로까지 덕종을 시종하며 재상으로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하였다. 貞元 10年(793) 모함으로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忠州 別駕로 좌천되어 은거하며 지냈다. 順宗이 즉위하며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이미 졸하였다. 시호는 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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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불가하다 하였는데, 후에 토번(吐蕃)주 021
각주 021)
吐蕃 : 7세기 초에서 9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티베트왕국 및 그 후의 티베트인에 대한 唐宋代의 호칭. 티베트인들은 스스로를 보에(Bod)라고 불렀으나 중국 사람들은 이들을 토번이라 칭했으며 이 호칭은 티베트왕국이 망한 후에도 14세기 무렵까지 사용되었다. 토번의 조상은 원래 네팔 북서부에서부터 카슈미르 동쪽 사이에 거주하면서 세력을 확장, 4∼5세기경에는 동부 티베트의 캄으로 이동하여 더욱 강성해졌다. 6세기 후반에는 중앙 티베트 남부에 거점을 두고 대두하기 시작한 이들 일부가 왕조의 기초를 만들고, 송짼감뽀왕 말기부터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강대한 나라를 이룩하였다. 동왕이 죽은 후 吐谷渾의 귀속을 둘러싸고 당나라와 싸워 점차 전쟁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군사국가조직과 기마부대에 의한 기동력을 활용하여 8세기 후반 이후에는 당나라로부터 西域의 지배권을 빼앗기도 하였으나 같은 무렵 성행하기 시작한 불교사상의 영향으로 822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 후 불교에 의한 이상적 국가의 실현을 꿈꾸었으나 군사국가로서 운영상의 모순으로 846년 붕괴하였고 토번시대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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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차와 몰래 화합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거란(요)의 계략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가창조에게 사신을 거란(요)에 보내 보고하게 명하였으나 가창조가 힘써 사양하고, 이와 같은 상소를 올려 아뢴 것이니 황제께서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 각주 001)
    御史中丞 : 북송의 관직. 御史臺의 실질적인 장관이다. 宋初에는 당~오대의 제도에 기반하여 정4품이었으나, 元豊 연간 新制 제정 이후에는 종3품, 元祐 연간에는 정3품으로 승격되었다가 南宋代에 이르러서는 다시 종3품이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賈昌朝 : 997~1065. 북송의 관인. 開封 사람으로, 字는 子明이다. 眞宗 天禧 元年(1017) 진사시에 급제하여 國子監 說書에 제수되었다. 이후 仁宗代에 崇政殿 說書와 天章閣侍講, 權御史中丞兼判國子監에 올랐고, 慶曆 연간에 參知政事, 樞密使, 同平章事 등의 직을 역임하고, 慶曆 7年(1047) 재상직에서 물러나 判大名府를 맡았다. 英宗代에는 鳳翔節度使로 옮기고 魏國公에 봉해졌다. 治平 2年(1065)에 사망했고 司空兼侍中을 추증되었다. 시호는 文元으로 영종은 그의 묘비에 친히 ‘大儒元老之碑’라 제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박학하고 논변에 뛰어났다고 평가를 받았다. 그의 문집이 3권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으며, 음운에 밝은 그가 남긴 『群經音辨』, 『春秋要論』 등의 저서가 남아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太祖 : 927~976. 재위 960~976. 송을 건국한 趙匡胤이다. 시호 英武睿文神德聖功至明大孝皇帝. 처음 後周의 世宗 밑에서 禁軍의 장이 되었고, 거란·南唐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금군총사령이 되었다. 세종의 사후 北漢 침입의 위기를 당하여 금군에 옹립되어 제위에 올랐다. 즉위 후 후주 유신의 반란을 진압하여 화북의 땅을 확보하고 963년 이후 荊南·湖南·後蜀·南漢·남당 등의 江南 및 四川의 후국들을 병합하였다. 안으로는 명신 趙普의 獻策을 받아들여 무인정치를 폐하고 문치주의에 의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하였다. 즉, 節度使 지배체제를 폐지, 중앙에 민정·병정·재정의 3권을 집중하고 금군을 강화하여 황제의 독재권을 강화하였다. 지방통치를 위해 전국에 파견되는 관료의 채용을 위한 과거제도를 정비하고 최종시험을 황제 스스로 실시하는 殿試 또는 御試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실행함에 있어 점진적인 온건한 수단을 사용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4)
    牙校 : 낮은 직급의 武官을 지칭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5)
    西羌之叛 : 1038년 西夏의 李元昊가 황제라 칭하고 大夏를 건국한 이후, 1040~1042년까지 군사를 일으킨 전투에서 송군이 격파당한 것을 지칭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刺史 : 북송의 관직. 한 무제 연간 처음 둔 것으로, 본래 郡·國을 감독하기 위하여 각 州에 둔 검찰관이었다. 행정장관이 아니므로 정해진 위치 없이 항상 관내를 이동하였다. 처음에는 직위가 郡의 太守보다 낮았으나 점차 지위가 높아져 한 州의 장관으로서 군사·민정을 관장하는 軍閥로 성장하였다. 당·송을 거쳐 明代에 폐지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楊崇勳 : 956~1035. 北宋의 관인. 蓟州 사람으로, 字는 寶臣이다. 그의 조부 楊守斌은 태조를 모시며 龍捷指揮使를 역임하였고, 그의 부친 楊全美는 태종대 殿前指揮使를 역임하였다. 양숭훈은 그의 아버지의 직위로 인하여 東西班承旨가 되어 眞宗을 東宮에서부터 보좌하였다. 당시 태종이 그가 학문을 즐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하사하였으며, 그때부터 兵法과 前代의 역사를 통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종이 즉위한 후에 그를 遷左侍禁 西頭供奉官 寄班祗候로 삼았고, 이후 樞密使, 同平章事 河陽三城節度使등을 역임하는 등 오랜 기간 군직을 맡았다. 다만 그의 성품은 탐욕스럽고 인색하였으며 타인을 해치는 것을 즐겨 그를 두려워하여 피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평가받았다. 사후에 太尉를 추증받고, 시호는 恭毅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8)
    李昭亮 : ?~1063. 北宋의 관인. 潞州 上黨 사람으로, 字는 晦之이며, 원래 이름은 李昭慶이나 후에 이소량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부친 李繼隆은 태종의 明德李皇后의 오라비이다. 이에 그는 4세에 東頭供奉官이 되어 황궁에 출입하였다. 이후 殿前副都指揮使, 同中書門下平章事 및 武寧·天平·彰信·泰寧·昭德軍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사후에 中書令을 추증받았고, 시호는 良僖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9)
    金城 : 북송의 지명. 이는 金城關을 지칭하는 것이다. 金城關은 隋 開皇 18年(598)에 金城津을 고쳐서 설치한 것이다. 위치는 현재 甘肅省 蘭州市 서북쪽의 황하 北岸에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0)
    上郡 : 唐代 天寶 元年(742)에 綏州를 고쳐서 설치했고, 그 치소는 龍泉縣(현재 陝西省 綏德縣)에 있었다. 乾元 元年(758)에 다시 綏州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북송에는 上郡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아마 북송의 북서쪽 변경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계속 사용된 듯하다. 바로가기
  • 각주 011)
    雲中 : 거란(요)의 지명. 北周 시기에 太平縣을 고쳐서 설치한 縣이었다. 위치는 현재 山西省 大同市이다. 隋代에 폐지되었다가 唐 開元 18年(730)에 다시 설치되었다. 거란(요)에서는 大同府의 치소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2)
    滄州 : 북송의 지명. 北魏 熙平 2年(517)에 饒安縣(현재 河北省 鹽山縣의 서남쪽)에 치소를 두고 처음 설치하였다. 隋代에 폐지되었다가 唐代 武德 元年(618)에 다시 설치하면서 치소는 淸池縣(현재 河北省 滄縣의 동남쪽)에 두었다. 이후 天寶 연간에 景城郡으로 개명되었다가, 乾元 元年(758)에 다시 滄州가 되었다. 그 영역은 대략 현재 天津市 海河 이남, 靜海縣과 淸縣 및 泊頭市 이동, 山東省 寧津, 無棣 이북 지역에 해당된다. 바로가기
  • 각주 013)
    秦州 : 북송의 지명. 魏代부터 隴右 지역(현재 甘肅省 서쪽, 황하 동쪽 지역에 해당)을 나누어 설치한 것으로, 秦邑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치폐, 치소 이동을 거쳤고 唐代 乾元 元年(758)에 秦州로 이름을 되돌렸고, 치소는 成紀縣(현재 甘肅省 秦安縣의 서북쪽)에 있었다. 토번에 함락되었다가 大中 3年(849)에 당이 수복했다. 북송이 치소를 현재 甘肅省 天水市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바로가기
  • 각주 014)
    沙州 : 漢에서 魏晋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명칭은 敦煌郡이었다. 前凉의 張駿이 敦煌, 晋昌, 高昌 세 郡과 西域都護, 戊己校尉, 玉門大護軍의 세 軍營을 합하여 沙州로 삼았는데, 그 지역에 鳴沙山이 있어서 沙州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이후에 西胡校尉 楊宣을 刺史로 삼았다. 3년 후에 다시 郡이 되었다. 北凉이 敦煌을 차지하자 沙州를 설치하였고, 원래 孟敏을 사주자사로 삼았다. 正光 6年(525)에 명칭을 瓜州로 바꾸고 또 義州로 바꾸었다가, 莊帝가 다시 瓜州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모두 치소는 敦煌에 있었다. 隋代에는 관할 영역이 축소되어 단지 敦煌, 常樂, 玉門 세 縣만을 관할하였다. 唐 武德 5年(622)에 瓜州의 명칭을 西沙州로 바꾸었고 치소는 敦煌에 두었다. 貞觀 7年(633)에는 명칭에서 西를 삭제하고 凉州都督府에 예속시켰다. 貞元 2年(786, 建中 2년이라는 설도 있다)에 토번에 의해 함락되었다. 大中 2年(848)에 張議潮가 주의 백성들을 이끌고 토번 군대를 몰아내면서 다시 당의 州 제도로 돌아갔다. 大中 5年(851)에 당 宣宗이 沙州에 歸義軍을 설치하는 조서를 내리고, 張議潮를 歸義軍節度使에 봉하였다. 이후 沙州는 歸義軍의 중심으로서 거의 200년에 걸쳐 張, 索, 曹氏 가문이 웅거하는 지역이 되었다. 北宋 景祐 3年(1036)에는 西夏에 의해 점령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5)
    唃厮囉 : 吐番 贊普의 후예인 唃厮囉는 高昌 磨棆國에서 출생하여 河州를 거쳐 宗哥族 승려 李立遵 등의 추대로 수령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송 인종 天聖 10年(1032)에는 靑唐으로 옮겨 제도를 정비하고, 이후 백년 가까이 湟水 뿐만 아니라 秦鳳路 이서의 黃河 유역과 洮水 유역을 포괄하는 지배자가 되었으며, 그가 세운 정권을 唃厮囉라 칭한다. 재위기간 동안 인접국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주력하여, 송에 귀부하고 서하에는 반대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원호의 공격을 수차례 받았으나 모두 막아냈으며 그의 계승자들 역시도 대대로 모두 송조에서 관직을 받고 책봉을 받아 북송의 서하에 대한 관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6)
    明珠 : 북송과 서하의 경계 지역인 현재 甘肅省 일대에는 羌族과 토번 계열의 민족들이 있었는데, 明珠도 그 중 하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7)
    滅藏 : 송과 서하의 경계 지역인 현재 甘肅省 일대에는 羌族과 토번 계열의 민족들이 있었는데, 滅藏도 그 중 하나였다. 滅臧으로 쓰기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8)
    尙結贊 : 샹겔젠(라낭)으로 唐代 토번의 大相이다. 당 德宗 建中 4年(783) 朱泚의 난에 奉天으로 피한 덕종은 위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서역의 北庭과 伊西의 영역 일부를 할양하고, 매년 토번에 彩絹 1만 필을 歲幣로 주는 대가로 토번의 출병을 제안하였고, 결찬은 이를 수락하였다. 이에 이듬해 토번의 2만의 군사는 당군과 연합하여 반군의 주력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고 돌아갔으나, 당은 토번군이 京師 함락에까지 함께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맹약을 파기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9)
    朱泚 : 742~784. 唐의 관인. 幽州 昌平 사람이다. 처음에 幽州盧龍節度使 李懷仙의 部將으로 있었는데 代宗 大曆 3年(768) 朱希彩 등과 함께 이회선을 살해하고, 주희채와의 갈등 끝에 대력 7年(772) 스스로 절도사가 되었다. 德宗 建中 3年(782) 동생 朱滔가 당에 반기를 들어 파직되자 다음 해 군사를 일으켜 長安을 공격하였다. 덕종은 奉天으로 달아나고, 그는 주변세력들의 옹립을 받아 황제가 되고 나라 이름을 秦, 연호를 應天이라 하였다. 興元 元年(784) 나라임을 다시 漢으로 고치고 ‘漢元天皇’이라 자칭하였다. 이후 李晟이 京師를 수복하자 彭原으로 달아났다가 부장에게 살해당했다. 바로가기
  • 각주 020)
    陸贄 : 754∼805. 당의 관인. 蘇州 嘉興 출신으로, 字는 敬輿이다. 大曆 6年(771) 진사시에 급제하여 華州鄭縣尉가 되고, 이후 渭南主簿, 監察御史, 翰林學士, 諫議大夫, 兵部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덕종의 신임을 얻었으나, 황제에게 직언을 잘하여 점차 덕종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다. 주차의 난 당시 봉천으로까지 덕종을 시종하며 재상으로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하였다. 貞元 10年(793) 모함으로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忠州 別駕로 좌천되어 은거하며 지냈다. 順宗이 즉위하며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이미 졸하였다. 시호는 宣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1)
    吐蕃 : 7세기 초에서 9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티베트왕국 및 그 후의 티베트인에 대한 唐宋代의 호칭. 티베트인들은 스스로를 보에(Bod)라고 불렀으나 중국 사람들은 이들을 토번이라 칭했으며 이 호칭은 티베트왕국이 망한 후에도 14세기 무렵까지 사용되었다. 토번의 조상은 원래 네팔 북서부에서부터 카슈미르 동쪽 사이에 거주하면서 세력을 확장, 4∼5세기경에는 동부 티베트의 캄으로 이동하여 더욱 강성해졌다. 6세기 후반에는 중앙 티베트 남부에 거점을 두고 대두하기 시작한 이들 일부가 왕조의 기초를 만들고, 송짼감뽀왕 말기부터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강대한 나라를 이룩하였다. 동왕이 죽은 후 吐谷渾의 귀속을 둘러싸고 당나라와 싸워 점차 전쟁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군사국가조직과 기마부대에 의한 기동력을 활용하여 8세기 후반 이후에는 당나라로부터 西域의 지배권을 빼앗기도 하였으나 같은 무렵 성행하기 시작한 불교사상의 영향으로 822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 후 불교에 의한 이상적 국가의 실현을 꿈꾸었으나 군사국가로서 운영상의 모순으로 846년 붕괴하였고 토번시대는 막을 내렸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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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방비에 관한 어사중승(御史中丞) 가창조(賈昌朝)의 상소 자료번호 : jt.k_0004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