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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부필(富弼)과 장무실(張茂實)이 거란에 가서 결혼과 세폐의 증액을 선택하도록 함

  • 날짜
    1042년 7월 (음)(慶曆 2年(1042) 7月 壬戌)
  • 출전
    卷137 慶曆 2年(1042) 7月 壬戌
이전에 부필(富弼)주 001
각주 001)
富弼 : 1004∼1083. 북송의 관인. 河南府 洛陽 사람으로 字는 彦國이다. 天聖 8年(1030)에 將作監丞, 知河南府長水縣의 관직을 받았다. 이후 僉書河陽判官, 通判絳州, 知諫院, 知制誥 등의 직을 역임했다. 慶曆 3年(1043)에는 樞密副使가 되었다. ‘慶曆新政’을 힘써 도와 당시의 사무 10여 조목과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13개의 계책을 상주하기도 했다. 至和 2年(1055)에 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되었다. 嘉祐 6年(1061)에 모친상으로 인해 직위에서 물러났다가 英宗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樞密使로 삼고 鄭國公에 봉했다. 熙寧 2年(1069)에 다시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변법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武勝軍節度使가 되었다가 判毫州로 폄출되고, 다시 判汝州로 옮겼다. 熙寧 5年(1072)에 司空, 同平章事, 武寧節度使를 받고 致仕했으며 韓國公에 봉해졌다. 사망하고 난 이후 諡號는 文忠이었다. 저서로는 『富鄭公詩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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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장무실(張茂實)주 002
각주 002)
張茂實 : 997∼1063. 북송의 관인. 開封府 祥符 사람으로 字는 濟叔이다. 원래 이름은 張茂實인데, 이후 英宗의 옛 이름을 피휘하면서 張孜로 개명했다. 그의 생모인 朱氏는 출신이 貧賤했는데, 至道元年(995)에 壽王府(壽王은 宋 眞宗)에 들어가 壽王의 次子 趙祐의 유모가 되었다. 張茂實이 태어나자 眞宗은 환관 張景宗에게 주어 양자로 삼게 했다. 蔭補로 관직에 들어와 供奉官, 眞定路兵馬鈐轄, 知瀛州, 幷代副總管 등의 직을 역임했다. 皇祐 연간에는 濟州防禦使, 侍衛馬軍都虞候가 되었다. 이후 殿前都虞候, 侍衛步軍副都指揮使, 馬軍副都指揮使 등을 역임했다. 嘉祐 6年(1061)에 公使錢을 무역에 쓰고 파견한 병졸이 外地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知曹州로 폄출되었다. 사망한 이후에 太尉를 추증받았고, 諡號는 勤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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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혼과 세폐의 증액 두 가지 사안을 거란(요)에 가서 알리고 마음대로 선택하게 하였다. 부필 등이 몰타하(沒打河)주 003
각주 003)
沒打河 : 河流의 명칭이다. 현재 河北省 張北縣 경내에 있는 安固里淖의 지류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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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자 유륙부(劉六符)주 004
각주 004)
劉六符 : ?∼1055. 거란(요)의 관인. 河間 사람이다. 北府宰相 劉愼行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 政事舍人, 翰林學士, 參知政事, 漢人行宮副部署, 長寧軍節度使, 三司使, 同中書門下平章事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重熙 3年(1034)과 10年(1041) 및 11年(1042)에 수차례에 걸쳐 송에 사신으로 가서 關南 10현의 할양을 놓고 송과 협상하여 송으로부터 세폐의 증액이라는 결과를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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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부필 등을) 숙소에 묵게 하고, 부필에게 말했다. “북조(北朝)의 황제께서는 확고하게 땅을 떼어주기를 바라고 계시는데,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부필이 말했다. “북조에서 만약 땅을 떼어주기를 바란다면, 이는 반드시 그 뜻이 맹약을 파기하는 것에 있고 이를 명분으로 삼으면 남조(南朝)는 결단코 따르지 않을 것이니 창을 맞대어 서로 대치할 뿐입니다.” 유륙부가 말했다. “만약 남조가 확고하게 고집을 부리면, 일이 어찌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부필이 말했다. “북조에서 이유도 없이 땅을 떼어주기를 요구하는데, 남조에서는 즉시 군사를 내어 거절하지 않고 사신을 파견하여 좋은 말로 여성을 시집보내는 것과 세폐를 늘리는 일을 다시 논의하자고 했으니 오히려 이에 따르지 않고서 어찌 남조가 확고하게 고집을 부린다고 하십니까?”
(거란)국의 군주를 알현하고 부필이 말했다. “양조(兩朝)의 군주가 부자(父子)의 우호 관계를 계속 유지한 것이 거의 40년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땅을 떼어주기를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거란)국의 군주가 말했다. “남조가 맹약을 어기면서 안문(雁門)주 005
각주 005)
雁門 : 북송의 지명. 雁門關을 지칭하는 것으로, 雁門關은 西陘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唐代에 설치되었고, 옛터는 현재 山西省 代縣의 서북쪽에 위치한 雁門山의 위에 있다. 북송 시기 거란(요)을 방어하기 위한 요충지였고, 元代에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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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막고 제방의 물을 늘리고 성과 해자를 수리하고 민병(民兵)을 징집하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신료들이 다투어 군사를 일으킬 것을 청했지만, 과인은 사신을 파견해 관남(關南)주 006
각주 006)
關南 : 후주 顯德 6年(959)에 거란(요)으로부터 瓦橋(현재 河北省 雄縣 서남쪽), 益津(현재 河北省霸州), 淤口(현재 北京) 3개의 關과 그 이남의 瀛州와 莫州를 후주 세종이 탈환했고, 북송시대에 세 關의 이남 지역을 關南이라고 칭했다. 대략 현재의 河北省 白洋淀 동쪽의 大淸河 유역 이남에서 河間市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된다. 景德 元年(1004)에 북송과 거란(요)이 전연지맹을 맺을 때에 거란(요)이 關南 땅을 요구했지만 북송 측에서는 이를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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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옛 땅을 요구하는 것만 못하고 요구했는데도 얻지 못했을 때에 거병을 해도 늦지 않는다고 했다.” 부필이 말했다. “북조는 장성황제(章聖皇帝)주 007
각주 007)
章聖皇帝 : 968∼1022, 재위 998∼1022. 북송의 3대 황제 眞宗을 지칭한다. 진종이 사망한 이후 天聖 2年(1024)에 諡號가 결정되었는데 ‘文明武定章聖元孝皇帝’라고 하였다. 이 諡號를 줄여서 章聖皇帝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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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큰 덕을 잊으셨습니까? 전연(澶淵)주 008
각주 008)
澶淵 : 북송의 지명. 澶州를 일컫는 말이다. 澶州는 唐 武德 4年(621)에 설치되어 그 치소는 澶水縣(현재 河南省 濮陽縣의 서쪽 20리)에 두어졌다가 貞觀 元年(627)에 폐지되었다. 大曆 7年(772)에 다시 설치되었고, 그 치소는 頓丘縣(현재 河南省 淸豊縣 서남쪽)에 두어졌다. 후진 天福 4年(939)에 치소가 德勝城(현재 濮陽縣의 동남쪽 5리)으로 옮겨졌다가 후주에서 현재의 濮陽縣으로 치소를 이동시켰다. 북송 崇寧 5年(1106)에는 開德府로 승격되었다가 금이 다시 澶州로 바꾸었다. 皇統 4年(1144)에는 開州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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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전쟁에서 만약 (장성황제가) 여러 장군들의 말을 따랐다면 북조의 병사는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북조와 중국이 통호하게 되면 군주만 그 이익을 차지하고 신하들은 얻는 것이 없는데, 만약 전쟁을 하게 되면 이익은 신하들에게 돌아가지만 군주는 그 화를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북조의 여러 신하들은 다투어 전쟁을 권하는 것이니 모두 자신을 위한 모략이지 국가의 계책은 아닙니다.” (거란)국의 군주가 놀라며 말했다. “무슨 말인가?” 부필이 말했다. “(후)진 고조(高祖)는 하늘을 속이고 군주를 배신하면서 북조에 도움을 청했고, 말제(末帝)주 009
각주 009)
末帝 : 五代 시기 後晋의 마지막 황제인 石重貴(914∼?)를 가리킨다. 出帝 혹은 少帝라고도 불린다. 晋高祖 석경당의 조카로 석경당이 즉위한 이후 北京留守가 되어 金紫光祿大夫의 관함을 받았다. 天福 3年(938)에는 開封尹이 되고 鄭王에 봉해졌고, 6年(941)에는 廣寧尹이 되고 齊王에 봉해졌다. 7年(942)에 황제에 즉위했다. 거란(요)에 대해 자신을 단지 손자라고만 하고, 신하라고 칭하지 않자 거란(요) 태종은 후진을 정벌했다. 거란(요) 大同 元年(947)에 후진이 망하면서 북쪽으로 옮겨져 黃龍府(현재 遼寧省 朝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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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혼란하여 신과 사람이 그를 버렸습니다. 이때 중국은 협소하고 상하가 이반하였기 때문에 거란(요)은 군대를 보전하며 승리만 거두었는데, 비록 금과 비단을 노획하여 여러 신하들의 집을 채웠다고 하더라도 장사(壯士)와 튼튼한 말 및 물건의 태반을 잃었으니 그 화는 누구의 책임입니까? 지금 중국의 땅은 만리에 달하고, 보유한 정예병도 만 단위를 헤아리며 법령은 바르고 상하가 한 마음이니 북조가 전쟁을 하고 싶어도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거란국 군주가) 말했다. “그럴 수 없다.” 부필이 말했다. “승부는 알 수가 없는데 승리를 거두게 하려면 죽은 병사와 말은 신하들이 감당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군주가 감당하는 것입니까? 만약 통호가 끊어지지 않으면, 세폐가 모두 군주에게 돌아가고 신하들 중에서 얻는 자는 단지 사신으로 해마다 온 1∼2명일 뿐이니 신하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거란)국의 군주가 크게 깨닫고, 오랫동안 수긍하였다.
부필이 또 말했다. “안문을 막은 것은 이원호(李元昊)주 010
각주 010)
李元昊 : 1003∼1048, 재위 1038∼1048. 서하의 개국황제이다. 탕구트족이며, 원래 拓跋氏였다. 李氏姓은 唐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다. 李繼遷의 손자이자 李德明의 큰아들이며, 生母는 衞慕氏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크게 힘써서 손에 책을 놓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법률서와 병서를 좋아했으며, 漢語와 蕃語에 능통하고 회화에도 조예가 깊은 등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부친이 재위할 때 계속 출전하면서 세력을 확대해갔다. 1032년 재위를 계승하면서 송에 대해 칭번했지만 이후 독립을 표명하면서 당과 송으로부터 각각 하사받았던 李氏姓과 趙氏姓을 버리고 嵬名씨로 성을 고쳤다. 아울러 엄격하고 철저하게 수구파를 제거하였다. 그는 서하 大慶 3年(1038) 10월 11일 자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송조로부터 분리하여 국호를 大夏라 하였고 수도를 興慶府에 정했다. 大臣 野利仁榮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도록 하여 크게 서하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건국 이후 교육을 발전시키고 蕃學을 창달하면서 文敎를 일으켰다. 또한 “李王渠”를 개착하면서 농경을 촉진시켰다. 특히 3차에 걸쳐서 각각 三川口(현재 陝西省 延安의 서북쪽), 好水川(현재 寧夏回族自治區隆德의 동쪽) 및 定川砦(현재 甘肅省 固原의 서북쪽)의 전투에서 북송을 크게 패배시켰으며, 아울러 賀蘭山에서 거란(요)에 대승을 거두면서 서하가 거란(요), 송 양국과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원래 이원호는 關中 지역을 공격하여 長安을 점령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송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한 패배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서하의 경제와 국력 등이 훼손되자 1044년 마침내 북송과 慶曆和議를 맺고 송에 대해 칭신하고 하국왕으로 책봉을 받았다. 이렇듯 그는 서하의 건국에 많은 기초를 쌓았던 일세의 영웅이라 할 만하다. 특히 문무 두 방면에서 모두 탁월한 성과를 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그에게도 단점은 있었는데, 예컨대 재위한 지 16년 때에 공신을 질시하여 약간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즉각 파직시키거나 죽여 버렸다. 이리하여 공신집단이 거의 제거된 가운데 이후 母黨이 전권을 휘두르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이외에 그의 만년에 주색에 빠지고 규모가 큰 공사와 공치사하는 것을 좋아하면서 서하 내부의 부패를 야기하였으며, 결국 이반하는 자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가 民夫에게 능묘 한 기를 만들도록 하여 가는 족족 360개의 능묘를 만들도록 하여 그의 疑塚으로 삼았다. 그 후 이 능묘를 조성했던 민부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고 한다. 이원호는 황후 野利氏를 폐하고 太子 寧林格의 妻인 沒移氏를 빼앗아 새 황후로 삼았지만 이것은 스스로 화를 자초한 꼴이 되어버렸다. 서하 延祚 11년 정월 초(1048년 1월 19일)에 아들 寧林格이 아버지를 증오한 끝에 이원호가 술이 취한 틈을 타고 그의 숙소로 난입하여 칼로 그의 코를 베어버렸다. 이원호는 도망갔지만 그 다음날 출혈과다로 사망하니 향년 46세였다. 이후 이원호의 두 번째 부인인 沒藏氏의 동생인 沒藏訛龐이 朝政을 장악하고는 임금을 시해한 죄로 寧林格과 寧林格의 모친이자 이원호에게 폐위된 野利皇后를 죽이고, 누나 沒藏氏의 1살 된 아들 李諒祚를 皇帝位에 올렸으니 바로 夏의 毅宗이다. 이원호의 재위 기간 동안의 尊號는 1. 風帝或風角城皇帝(風角歌皇帝) 2. (始文)盛武(興)法建禮主孝皇帝, 또는 世祖始文本武興法建禮仁孝皇帝 3. 聖文英武崇仁至孝皇帝이며, 廟號는 景宗이고 諡號는 武烈皇帝이며 泰陵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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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방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방의 물은 하승구(何承矩)주 011
각주 011)
何承矩 : 946∼1006. 북송의 관인. 河南府 사람으로 字는 正則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何繼筠을 따라 전투에 참여하였고, 棣州衙內指揮使가 되었다. 開寶 4年(971)에는 閑厩副使에 임명되었다. 宋太宗 시기에는 知河南府, 知潭州, 制置河北緣邊屯田使, 知滄州, 知雄州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北邊의 도로와 하천의 형세를 잘 알고 있어 沿邊에 제방을 만들 것을 청했고 넓은 順安軍의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에 이르는 지역을 稻田으로 개간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 眞宗이 즉위한 이후에는 雄州團練使, 河北緣邊安撫使가 되었다. 여러 해에 걸쳐 변경을 지켜 변경이 안정되었다. 齊州團練使가 그의 마지막 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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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일은 통호 이전에는 땅이 낮아 물이 모여들어 그 형세가 늘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과 해자는 모두 옛것을 수리한 것이고, 민병 또한 이전에 징집한 것에서 특별히 비어있는 것을 보완했을 뿐이니 맹약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거란)국 군주가 말했다. “경의 말로는 그 소상함을 알 수가 없다. 그저 과인이 얻고자 하는 것은 조종(祖宗)의 옛 땅일 뿐이다.” 부필이 말했다. “(후)진 고조가 노룡(盧龍)주 012
각주 012)
盧龍 : 唐代 藩鎭의 명칭으로 河北 3鎭 중의 하나이다. 寶應 元年(762)에 幽州節度使가 盧龍節度使를 겸하게 하면서 盧龍節度使로 통칭했다. 치소는 幽州(현재 북경의 서남쪽)에 있었다. 관할하는 영역은 현재 河北省 懷來縣과 永淸縣 및 북경시 房山區 동쪽과 장성 남쪽 지역에 해당된다. 이후로 李懷山, 朱希彩, 朱泚, 劉濟, 張仲武, 李全忠 부자형제 등이 장기간 할거했고, 元和 연간에 잠시 唐朝 중앙의 명령을 따랐다. 乾寧 2年(895)에 劉仁恭이 藩帥에 임명되었고, 후량 乾化 元年(911)에는 그의 아들 劉守光이 칭제하여 국호를 燕이라 하였다. 乾化 3年(913)에 晋王 李存勖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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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한 도(道)를 거란(요)에게 뇌물로 주었고, (후)주 세종(世宗)주 013
각주 013)
周世宗 : 921∼959, 재위 954∼959. 五代 시기 後周의 2대 황제로, 이름은 柴榮이다. 邢州 龍岡(현재 河北省 邢臺) 사람이다. 후주 太祖 郭威의 양자였다. 顯德 元年(954)에 곽위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후, 군사와 정치, 경제 등을 정비하여 後蜀, 南唐, 거란(요)을 정벌하여 瓦橋(현재 河北省 雄縣 서남쪽), 益津(현재 河北省 霸州), 淤口(현재 北京)의 세 關을 수복하고 돌아와서 사망했다. 慶陵에 묻혔고, 諡號는 睿武孝文皇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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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시 정벌하여 관남을 취했는데 모두 다른 왕조 시기의 일입니다. 송이 흥한 지 이미 90년이 되었고, 만약 각자 다른 왕조의 옛 땅을 요구하고자 한다면, 어찌 북조의 이익이 되겠습니까?” (거란)국의 군주는 말이 없다가 천천히 말했다. “이원호는 번을 칭하지만 여전히 군주인데, 남조가 그를 정벌하면서 나에게 먼저 고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부필이 말했다. “북조가 고려와 흑수(黑水)주 014
각주 014)
黑水 : 여기에서의 黑水는 黑水部 혹은 黑水女眞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黑水部는 이미 수말당초의 靺鞨 7부 중의 하나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변경 지대와 흑룡강 하류 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당조에서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開元 13年(725)에 黑水軍을 설치했고, 開元 14年(726)에는 黑水軍을 黑水都督府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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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향해 정벌할 때 어찌 일찍이 남조에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천자께서는 신으로 하여금 폐하께 안부를 여쭙게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이전에 이원호와 동생이 혼인을 했음을 몰랐고, 그 은혜를 저버리고 변경을 소란스럽게 했기 때문에 토벌한 것인데 동생이 불만을 말하니 지금 공격한다면 형제의 정을 상하게 할 것이고, 공격하지 않는다면 관리와 백성의 죽음을 차마 좌시할 수 없으니 동생이 어떻게 처리할지를 모르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거란)국의 군주가 그 신하를 돌아보며 오랑캐의 말[胡語]로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난 후 말했다. “이원호가 침략을 했으니 어찌 남조가 공격하지 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물러난 이후에 유륙부가 부필에게 말했다. “이전에 태종(太宗)주 015
각주 015)
太宗 : 939∼997, 재위 976∼997. 북송의 2대 황제이다. 처음 이름은 趙匡義였으나 즉위한 이후에 趙炅으로 이름을 고쳤다. 太平興國 4年(979)에 北漢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승리의 기운을 타서 거란(요)까지 공격했다가 패배를 당했다. 雍熙 3年(986)에 거란(요)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도했지만, 참패를 당했다. 결국 태종이 河東을 평정하고 幽燕을 습격했다는 것은 北漢을 멸망시키고 그 기세로 거란(요)의 영역까지 노렸다는 것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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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동(河東)주 016
각주 016)
河東 : 唐代의 번진에서 기원한 명칭이다. 開元 18年(730)에 河東節度使가 세워지고 그 치소는 太原府(현재 山西省 太原市 서남쪽)에 설치되었다. 오랫동안 태원부와 石州, 儀州, 武州 등을 다스렸는데 관할 영역은 현재 산서성의 장성 이남 지역에 해당한다. 5대 10국 시기 北漢을 건국한 劉崇이 바로 하동절도사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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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평정하고 마침내 유연(幽燕)을 습격했는데, 지금 비록 서하주 017
각주 017)
西夏 : 1038~1227. 오아시스로 상의 교역국. 오늘날의 중국 서북부 甘肅과 오르도스 일대에서 티베트계 탕구트 일족인 拓跋氏가 세운 나라다. 7~8세기에 靑海와 四川의 변경 지역 농목지에서 오르도스의 夏州 지역으로 이주해온 탁발씨 집단은 9세기 초에 당으로부터 李氏 성을 하사받았다. 이어 990년 거란으로부터 王號를 얻은 李繼遷은 北流 황하 연안의 靈州를 함락하고, 그 후 13세기까지 河西 지방을 석권하였다. 그는 송나라로부터 자립해 말 무역과 소금 밀무역 등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그의 아들 李德明 때는 興州(현재의 銀川)에 도읍을 정하고 송나라와의 絹馬貿易을 재개하였다. 그의 아들 李元昊는 1028년부터 하서 지방에 출정해 瓜州와 敦煌을 점령하고 흥주를 興慶府로 격상, 1038년 大夏 황제라고 자칭하면서 서하의 전성기를 맞았는데, 송은 대하 대신 ‘서하’라고 불렀다. 서하는 1044년 송과 화약을 맺고 신하로 자처하는 등 송·거란(요)·여진(금)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이면서 무역으로 이득을 챙겼다. 금의 수도에까지 隊商을 보내는 등 오아시스로를 통한 무역을 크게 확대하였다. 서하는 자체의 국호와 연호, 관제와 병제, 문자를 가진 독특한 서하문화로 일세를 풍미한 교역 대국이었다. 1227년 칭기스 칸의 정토군에게 멸망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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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전쟁을 한다고 말하지만 또 연계(燕薊)를 도모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부필이 말했다. “태종 시기에는 북조가 먼저 예랄매리(拽剌梅里)주 018
각주 018)
拽剌梅里 : 拽剌梅里는 人名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우선 拽剌은 거란(요)의 군대 명칭으로 猛士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거란(요)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출현한 조직으로, 주로 적의 정세를 정탐하고 정보와 군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평상시의 拽剌軍은 주로 변방 구역에 배치되어 변경을 순찰하고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梅里는 부족의 官名으로 위구르 시기에도 사용되었던 칭호이다. 군사를 통할하거나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고, 皇家를 總管하는 직책에도 梅里가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나오는 拽剌梅里는 북송과의 경계 지대에 배치된 拽剌軍의 梅里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宋會要輯稿』 兵7, 親征, 太宗을 보면 太平興國 4年(979) 2월 27일에 송 태종이 臨城縣에 주둔하고 있을 때 거란(요)이 耶律尙書와 拽剌梅里를 보내 表를 바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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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파견해 내빙했는데 이후에 석령(石嶺)주 019
각주 019)
石嶺 : 북송의 지명. 石嶺關을 지칭하는 것이다. 현재 山西省 陽曲縣의 동북쪽에 있다. 金代에는 이곳에 石嶺關鎭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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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출병하여 하동을 원조하니 태종께서 그 반복(反覆)함에 노하여 마침내 연계를 정벌한 것이니 아마도 북조가 자처한 일입니다.” 유륙부가 또 말했다. “우리 군주께서 염치없이 금과 비단을 받고 있지만, 확고하게 10현주 020
각주 020)
十縣 : 關南에 위치해 있는 10개의 현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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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縣)을 바라고 계시니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부필이 말했다. “남조의 황제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짐이 사람의 자손으로서 어찌 감히 망령되이 조종의 옛 땅을 남에게 주겠는가. 이전에 전연에서 칼을 서로 겨누고 있으면서도 장성황제께서는 오히려 소성(昭聖)주 021
각주 021)
昭聖 : 거란(요) 聖宗을 지칭하는 것이다. 성종이 즉위한 해(982)에 거란(요)의 신료들은 昭聖皇帝의 존호를 성종에게 올렸다. 統和 5年(989)에는 至德廣孝昭聖天輔皇帝로 존호가 바뀌었고, 統和 24年(1008)에는 같은 존호가 신료들에 의해 또 바쳐졌다. 開泰 元年(1012)에는 弘文宣武尊道至德崇仁廣孝聰睿昭聖神贊天輔皇帝로 존호가 변경되었고, 太平 元年(1021)에는 睿文英武遵道至德崇仁廣孝功成治定昭聖神贊天輔皇帝로 바뀌었다. 거란(요) 성종의 존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昭聖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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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관남을 주지 않았는데 어찌 오늘 땅을 떼어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또 북조가 10현을 얻고자 하는 것은 그 조부(租賦)를 탐내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지금 금과 비단으로 대신하면 또한 국가의 비용을 마련하는 데에 충분할 것이다. 짐은 두 국가의 백성을 걱정하여 그들을 참혹하게 죽게 하지 않고자 하고, 금과 비단을 아끼지 않고 북조의 요구를 따를 것이다. 만약 북조가 반드시 땅을 얻고자 한다면, 이의 뜻은 맹약을 배신하고 우호 관계를 저버리는 것에 있는데 짐이 홀로 전쟁을 피할 수 있겠는가? 또 전연의 맹약은 하늘의 신령과 땅의 신령이 실로 함께 살피신 것이다. 지금 북조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으니 짐은 마음으로 부끄럽지 않고, 또한 하늘의 신령과 땅의 신령께도 부끄럽지 않다.’” 유륙부가 그를 보좌하는 사람에게 말했다. “남조의 황제가 이와 같은 마음을 잊지 않아서 아주 좋다. 마땅히 함께 상주하여 양국 군주의 뜻이 통하게 하자.”
다음날, (거란)국의 군주가 부필을 불러 함께 사냥을 하다가 부필의 말을 끌어당겨 스스로 가까이 오더니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부필이 말하기를, “남조는 오직 기뻐하고 좋아하는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다. (거란)국의 군주가 말하기를, “내가 땅을 얻으면 기뻐하고 좋아하는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라고 했다. 부필이 말하기를, “남조 황제께서 신을 보내 폐하께 보고하라며 말씀하시기를 ‘북조가 조종의 옛 땅을 얻고자 하는데, 남조 또한 어찌 조종의 옛 땅을 상실하는 것을 수긍하겠는가. 또 북조가 이미 땅을 얻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면, 남조는 반드시 땅을 잃는 것을 치욕으로 삼게 될 것이다. 형과 동생의 국가에서 어찌 한쪽은 영광이 되고 한쪽은 치욕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짐은 연계(燕薊)가 옛 영역이었음을 잊지 않고 있는데, 또한 어찌 이 사안을 다시 다룰 수 있겠는가. 확실히 서로 간에 스스로 깨우쳐야 할 따름이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부필이) 물러나자 유륙부가 부필에게 말하기를, “황제께서 공이 영광과 치욕의 말을 했던 것을 들으시고, 그 뜻에 큰 깨달음을 느끼셨습니다. 그런데 금과 비단은 반드시 취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므로 다만 결혼을 논의할 수 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부필이 말하기를, “결혼으로는 틈이 생기기 쉽고 더구나 부부의 정이 좋을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우며, 인명(人命)의 길고 짧음이 혹여 다르다면 의탁하는 바가 견고하지 못한 것이니 금과 비단을 늘리는 것의 편안함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유륙부가 말하기를, “남조 황제에게는 반드시 자신의 딸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부필이 말하기를, “황제의 딸은 겨우 네 살이니 혼인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10여 년 이후여야 하고, 비록 딸을 맞아들여 혼인을 할 것을 허락한다고 해도 또한 4~5년 이후가 될 것입니다. 지금 눈앞의 의심을 풀려고 하는데, 어찌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부필은 적(敵)[거란]이 혼인을 하려는 것은 금과 비단을 많이 얻으려는 것에 뜻이 있음을 파악하고 이에 말하기를, “남조에서 장공주(長公主)주 022
각주 022)
長公主 : 황제의 여자 형제에게 주었던 封號이다. 이 명칭은 前漢 시기부터 사용되었는데, 皇女 중 가장 연장자에게 붙여주었던 칭호였다. 後漢 시기부터는 황제의 여동생에게도 長公主의 封號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長公 혹은 長主라고 줄여서 표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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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시집보냈던 이전 사례(事例)에서는 재물을 보내는 것이 10만 민(緡)은 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적이 결혼을 하려는 뜻이 누그러졌고, 또 부필에게 돌아갈 것을 깨우쳤다. 부필이 말하기를, “두 가지 논의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도로 돌아가겠습니까. 머물러서 논의를 마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거란)국의 군주가 말하기를, “경이 다시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당연히 한 가지 사안을 선택해서 알려줄 것이고, 마땅히 글로 서약해서 오겠다.”라고 했다. 부필은 돌아가서 상주(上奏)했고, (황제는) 다시 부필에게 이부낭중(吏部郎中)주 023
각주 023)
吏部郎中 : 북송의 관직. 吏部에 소속된 관원으로 북송 전기에는 당의 제도를 이어받아 品秩이 從5品上이었다가 元豐新制 이후에는 從6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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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주 024
각주 024)
樞密直學士 : 북송의 관직. 樞密院의 관원으로 五代 後唐 시기에 崇政院直學士를 고쳐 설치한 것이다. 주로 추밀원의 軍政 문서를 관장했다. 品秩은 正3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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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주었는데 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각주 001)
    富弼 : 1004∼1083. 북송의 관인. 河南府 洛陽 사람으로 字는 彦國이다. 天聖 8年(1030)에 將作監丞, 知河南府長水縣의 관직을 받았다. 이후 僉書河陽判官, 通判絳州, 知諫院, 知制誥 등의 직을 역임했다. 慶曆 3年(1043)에는 樞密副使가 되었다. ‘慶曆新政’을 힘써 도와 당시의 사무 10여 조목과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13개의 계책을 상주하기도 했다. 至和 2年(1055)에 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되었다. 嘉祐 6年(1061)에 모친상으로 인해 직위에서 물러났다가 英宗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樞密使로 삼고 鄭國公에 봉했다. 熙寧 2年(1069)에 다시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변법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武勝軍節度使가 되었다가 判毫州로 폄출되고, 다시 判汝州로 옮겼다. 熙寧 5年(1072)에 司空, 同平章事, 武寧節度使를 받고 致仕했으며 韓國公에 봉해졌다. 사망하고 난 이후 諡號는 文忠이었다. 저서로는 『富鄭公詩集』 등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張茂實 : 997∼1063. 북송의 관인. 開封府 祥符 사람으로 字는 濟叔이다. 원래 이름은 張茂實인데, 이후 英宗의 옛 이름을 피휘하면서 張孜로 개명했다. 그의 생모인 朱氏는 출신이 貧賤했는데, 至道元年(995)에 壽王府(壽王은 宋 眞宗)에 들어가 壽王의 次子 趙祐의 유모가 되었다. 張茂實이 태어나자 眞宗은 환관 張景宗에게 주어 양자로 삼게 했다. 蔭補로 관직에 들어와 供奉官, 眞定路兵馬鈐轄, 知瀛州, 幷代副總管 등의 직을 역임했다. 皇祐 연간에는 濟州防禦使, 侍衛馬軍都虞候가 되었다. 이후 殿前都虞候, 侍衛步軍副都指揮使, 馬軍副都指揮使 등을 역임했다. 嘉祐 6年(1061)에 公使錢을 무역에 쓰고 파견한 병졸이 外地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知曹州로 폄출되었다. 사망한 이후에 太尉를 추증받았고, 諡號는 勤惠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沒打河 : 河流의 명칭이다. 현재 河北省 張北縣 경내에 있는 安固里淖의 지류에 해당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4)
    劉六符 : ?∼1055. 거란(요)의 관인. 河間 사람이다. 北府宰相 劉愼行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 政事舍人, 翰林學士, 參知政事, 漢人行宮副部署, 長寧軍節度使, 三司使, 同中書門下平章事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重熙 3年(1034)과 10年(1041) 및 11年(1042)에 수차례에 걸쳐 송에 사신으로 가서 關南 10현의 할양을 놓고 송과 협상하여 송으로부터 세폐의 증액이라는 결과를 받아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雁門 : 북송의 지명. 雁門關을 지칭하는 것으로, 雁門關은 西陘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唐代에 설치되었고, 옛터는 현재 山西省 代縣의 서북쪽에 위치한 雁門山의 위에 있다. 북송 시기 거란(요)을 방어하기 위한 요충지였고, 元代에 철폐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關南 : 후주 顯德 6年(959)에 거란(요)으로부터 瓦橋(현재 河北省 雄縣 서남쪽), 益津(현재 河北省霸州), 淤口(현재 北京) 3개의 關과 그 이남의 瀛州와 莫州를 후주 세종이 탈환했고, 북송시대에 세 關의 이남 지역을 關南이라고 칭했다. 대략 현재의 河北省 白洋淀 동쪽의 大淸河 유역 이남에서 河間市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된다. 景德 元年(1004)에 북송과 거란(요)이 전연지맹을 맺을 때에 거란(요)이 關南 땅을 요구했지만 북송 측에서는 이를 거절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章聖皇帝 : 968∼1022, 재위 998∼1022. 북송의 3대 황제 眞宗을 지칭한다. 진종이 사망한 이후 天聖 2年(1024)에 諡號가 결정되었는데 ‘文明武定章聖元孝皇帝’라고 하였다. 이 諡號를 줄여서 章聖皇帝라고 한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8)
    澶淵 : 북송의 지명. 澶州를 일컫는 말이다. 澶州는 唐 武德 4年(621)에 설치되어 그 치소는 澶水縣(현재 河南省 濮陽縣의 서쪽 20리)에 두어졌다가 貞觀 元年(627)에 폐지되었다. 大曆 7年(772)에 다시 설치되었고, 그 치소는 頓丘縣(현재 河南省 淸豊縣 서남쪽)에 두어졌다. 후진 天福 4年(939)에 치소가 德勝城(현재 濮陽縣의 동남쪽 5리)으로 옮겨졌다가 후주에서 현재의 濮陽縣으로 치소를 이동시켰다. 북송 崇寧 5年(1106)에는 開德府로 승격되었다가 금이 다시 澶州로 바꾸었다. 皇統 4年(1144)에는 開州로 변경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末帝 : 五代 시기 後晋의 마지막 황제인 石重貴(914∼?)를 가리킨다. 出帝 혹은 少帝라고도 불린다. 晋高祖 석경당의 조카로 석경당이 즉위한 이후 北京留守가 되어 金紫光祿大夫의 관함을 받았다. 天福 3年(938)에는 開封尹이 되고 鄭王에 봉해졌고, 6年(941)에는 廣寧尹이 되고 齊王에 봉해졌다. 7年(942)에 황제에 즉위했다. 거란(요)에 대해 자신을 단지 손자라고만 하고, 신하라고 칭하지 않자 거란(요) 태종은 후진을 정벌했다. 거란(요) 大同 元年(947)에 후진이 망하면서 북쪽으로 옮겨져 黃龍府(현재 遼寧省 朝陽)에 안치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0)
    李元昊 : 1003∼1048, 재위 1038∼1048. 서하의 개국황제이다. 탕구트족이며, 원래 拓跋氏였다. 李氏姓은 唐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다. 李繼遷의 손자이자 李德明의 큰아들이며, 生母는 衞慕氏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크게 힘써서 손에 책을 놓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법률서와 병서를 좋아했으며, 漢語와 蕃語에 능통하고 회화에도 조예가 깊은 등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부친이 재위할 때 계속 출전하면서 세력을 확대해갔다. 1032년 재위를 계승하면서 송에 대해 칭번했지만 이후 독립을 표명하면서 당과 송으로부터 각각 하사받았던 李氏姓과 趙氏姓을 버리고 嵬名씨로 성을 고쳤다. 아울러 엄격하고 철저하게 수구파를 제거하였다. 그는 서하 大慶 3年(1038) 10월 11일 자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송조로부터 분리하여 국호를 大夏라 하였고 수도를 興慶府에 정했다. 大臣 野利仁榮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도록 하여 크게 서하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건국 이후 교육을 발전시키고 蕃學을 창달하면서 文敎를 일으켰다. 또한 “李王渠”를 개착하면서 농경을 촉진시켰다. 특히 3차에 걸쳐서 각각 三川口(현재 陝西省 延安의 서북쪽), 好水川(현재 寧夏回族自治區隆德의 동쪽) 및 定川砦(현재 甘肅省 固原의 서북쪽)의 전투에서 북송을 크게 패배시켰으며, 아울러 賀蘭山에서 거란(요)에 대승을 거두면서 서하가 거란(요), 송 양국과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원래 이원호는 關中 지역을 공격하여 長安을 점령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송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한 패배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서하의 경제와 국력 등이 훼손되자 1044년 마침내 북송과 慶曆和議를 맺고 송에 대해 칭신하고 하국왕으로 책봉을 받았다. 이렇듯 그는 서하의 건국에 많은 기초를 쌓았던 일세의 영웅이라 할 만하다. 특히 문무 두 방면에서 모두 탁월한 성과를 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그에게도 단점은 있었는데, 예컨대 재위한 지 16년 때에 공신을 질시하여 약간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즉각 파직시키거나 죽여 버렸다. 이리하여 공신집단이 거의 제거된 가운데 이후 母黨이 전권을 휘두르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이외에 그의 만년에 주색에 빠지고 규모가 큰 공사와 공치사하는 것을 좋아하면서 서하 내부의 부패를 야기하였으며, 결국 이반하는 자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가 民夫에게 능묘 한 기를 만들도록 하여 가는 족족 360개의 능묘를 만들도록 하여 그의 疑塚으로 삼았다. 그 후 이 능묘를 조성했던 민부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고 한다. 이원호는 황후 野利氏를 폐하고 太子 寧林格의 妻인 沒移氏를 빼앗아 새 황후로 삼았지만 이것은 스스로 화를 자초한 꼴이 되어버렸다. 서하 延祚 11년 정월 초(1048년 1월 19일)에 아들 寧林格이 아버지를 증오한 끝에 이원호가 술이 취한 틈을 타고 그의 숙소로 난입하여 칼로 그의 코를 베어버렸다. 이원호는 도망갔지만 그 다음날 출혈과다로 사망하니 향년 46세였다. 이후 이원호의 두 번째 부인인 沒藏氏의 동생인 沒藏訛龐이 朝政을 장악하고는 임금을 시해한 죄로 寧林格과 寧林格의 모친이자 이원호에게 폐위된 野利皇后를 죽이고, 누나 沒藏氏의 1살 된 아들 李諒祚를 皇帝位에 올렸으니 바로 夏의 毅宗이다. 이원호의 재위 기간 동안의 尊號는 1. 風帝或風角城皇帝(風角歌皇帝) 2. (始文)盛武(興)法建禮主孝皇帝, 또는 世祖始文本武興法建禮仁孝皇帝 3. 聖文英武崇仁至孝皇帝이며, 廟號는 景宗이고 諡號는 武烈皇帝이며 泰陵에 장사지냈다. 바로가기
  • 각주 011)
    何承矩 : 946∼1006. 북송의 관인. 河南府 사람으로 字는 正則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何繼筠을 따라 전투에 참여하였고, 棣州衙內指揮使가 되었다. 開寶 4年(971)에는 閑厩副使에 임명되었다. 宋太宗 시기에는 知河南府, 知潭州, 制置河北緣邊屯田使, 知滄州, 知雄州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北邊의 도로와 하천의 형세를 잘 알고 있어 沿邊에 제방을 만들 것을 청했고 넓은 順安軍의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에 이르는 지역을 稻田으로 개간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 眞宗이 즉위한 이후에는 雄州團練使, 河北緣邊安撫使가 되었다. 여러 해에 걸쳐 변경을 지켜 변경이 안정되었다. 齊州團練使가 그의 마지막 직임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2)
    盧龍 : 唐代 藩鎭의 명칭으로 河北 3鎭 중의 하나이다. 寶應 元年(762)에 幽州節度使가 盧龍節度使를 겸하게 하면서 盧龍節度使로 통칭했다. 치소는 幽州(현재 북경의 서남쪽)에 있었다. 관할하는 영역은 현재 河北省 懷來縣과 永淸縣 및 북경시 房山區 동쪽과 장성 남쪽 지역에 해당된다. 이후로 李懷山, 朱希彩, 朱泚, 劉濟, 張仲武, 李全忠 부자형제 등이 장기간 할거했고, 元和 연간에 잠시 唐朝 중앙의 명령을 따랐다. 乾寧 2年(895)에 劉仁恭이 藩帥에 임명되었고, 후량 乾化 元年(911)에는 그의 아들 劉守光이 칭제하여 국호를 燕이라 하였다. 乾化 3年(913)에 晋王 李存勖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3)
    周世宗 : 921∼959, 재위 954∼959. 五代 시기 後周의 2대 황제로, 이름은 柴榮이다. 邢州 龍岡(현재 河北省 邢臺) 사람이다. 후주 太祖 郭威의 양자였다. 顯德 元年(954)에 곽위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후, 군사와 정치, 경제 등을 정비하여 後蜀, 南唐, 거란(요)을 정벌하여 瓦橋(현재 河北省 雄縣 서남쪽), 益津(현재 河北省 霸州), 淤口(현재 北京)의 세 關을 수복하고 돌아와서 사망했다. 慶陵에 묻혔고, 諡號는 睿武孝文皇帝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4)
    黑水 : 여기에서의 黑水는 黑水部 혹은 黑水女眞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黑水部는 이미 수말당초의 靺鞨 7부 중의 하나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변경 지대와 흑룡강 하류 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당조에서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開元 13年(725)에 黑水軍을 설치했고, 開元 14年(726)에는 黑水軍을 黑水都督府로 바꾸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5)
    太宗 : 939∼997, 재위 976∼997. 북송의 2대 황제이다. 처음 이름은 趙匡義였으나 즉위한 이후에 趙炅으로 이름을 고쳤다. 太平興國 4年(979)에 北漢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승리의 기운을 타서 거란(요)까지 공격했다가 패배를 당했다. 雍熙 3年(986)에 거란(요)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도했지만, 참패를 당했다. 결국 태종이 河東을 평정하고 幽燕을 습격했다는 것은 北漢을 멸망시키고 그 기세로 거란(요)의 영역까지 노렸다는 것을 지칭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6)
    河東 : 唐代의 번진에서 기원한 명칭이다. 開元 18年(730)에 河東節度使가 세워지고 그 치소는 太原府(현재 山西省 太原市 서남쪽)에 설치되었다. 오랫동안 태원부와 石州, 儀州, 武州 등을 다스렸는데 관할 영역은 현재 산서성의 장성 이남 지역에 해당한다. 5대 10국 시기 北漢을 건국한 劉崇이 바로 하동절도사 출신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7)
    西夏 : 1038~1227. 오아시스로 상의 교역국. 오늘날의 중국 서북부 甘肅과 오르도스 일대에서 티베트계 탕구트 일족인 拓跋氏가 세운 나라다. 7~8세기에 靑海와 四川의 변경 지역 농목지에서 오르도스의 夏州 지역으로 이주해온 탁발씨 집단은 9세기 초에 당으로부터 李氏 성을 하사받았다. 이어 990년 거란으로부터 王號를 얻은 李繼遷은 北流 황하 연안의 靈州를 함락하고, 그 후 13세기까지 河西 지방을 석권하였다. 그는 송나라로부터 자립해 말 무역과 소금 밀무역 등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그의 아들 李德明 때는 興州(현재의 銀川)에 도읍을 정하고 송나라와의 絹馬貿易을 재개하였다. 그의 아들 李元昊는 1028년부터 하서 지방에 출정해 瓜州와 敦煌을 점령하고 흥주를 興慶府로 격상, 1038년 大夏 황제라고 자칭하면서 서하의 전성기를 맞았는데, 송은 대하 대신 ‘서하’라고 불렀다. 서하는 1044년 송과 화약을 맺고 신하로 자처하는 등 송·거란(요)·여진(금)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이면서 무역으로 이득을 챙겼다. 금의 수도에까지 隊商을 보내는 등 오아시스로를 통한 무역을 크게 확대하였다. 서하는 자체의 국호와 연호, 관제와 병제, 문자를 가진 독특한 서하문화로 일세를 풍미한 교역 대국이었다. 1227년 칭기스 칸의 정토군에게 멸망당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8)
    拽剌梅里 : 拽剌梅里는 人名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우선 拽剌은 거란(요)의 군대 명칭으로 猛士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거란(요)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출현한 조직으로, 주로 적의 정세를 정탐하고 정보와 군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평상시의 拽剌軍은 주로 변방 구역에 배치되어 변경을 순찰하고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梅里는 부족의 官名으로 위구르 시기에도 사용되었던 칭호이다. 군사를 통할하거나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고, 皇家를 總管하는 직책에도 梅里가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나오는 拽剌梅里는 북송과의 경계 지대에 배치된 拽剌軍의 梅里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宋會要輯稿』 兵7, 親征, 太宗을 보면 太平興國 4年(979) 2월 27일에 송 태종이 臨城縣에 주둔하고 있을 때 거란(요)이 耶律尙書와 拽剌梅里를 보내 表를 바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19)
    石嶺 : 북송의 지명. 石嶺關을 지칭하는 것이다. 현재 山西省 陽曲縣의 동북쪽에 있다. 金代에는 이곳에 石嶺關鎭이 설치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20)
    十縣 : 關南에 위치해 있는 10개의 현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1)
    昭聖 : 거란(요) 聖宗을 지칭하는 것이다. 성종이 즉위한 해(982)에 거란(요)의 신료들은 昭聖皇帝의 존호를 성종에게 올렸다. 統和 5年(989)에는 至德廣孝昭聖天輔皇帝로 존호가 바뀌었고, 統和 24年(1008)에는 같은 존호가 신료들에 의해 또 바쳐졌다. 開泰 元年(1012)에는 弘文宣武尊道至德崇仁廣孝聰睿昭聖神贊天輔皇帝로 존호가 변경되었고, 太平 元年(1021)에는 睿文英武遵道至德崇仁廣孝功成治定昭聖神贊天輔皇帝로 바뀌었다. 거란(요) 성종의 존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昭聖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2)
    長公主 : 황제의 여자 형제에게 주었던 封號이다. 이 명칭은 前漢 시기부터 사용되었는데, 皇女 중 가장 연장자에게 붙여주었던 칭호였다. 後漢 시기부터는 황제의 여동생에게도 長公主의 封號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長公 혹은 長主라고 줄여서 표기하기도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23)
    吏部郎中 : 북송의 관직. 吏部에 소속된 관원으로 북송 전기에는 당의 제도를 이어받아 品秩이 從5品上이었다가 元豐新制 이후에는 從6品이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24)
    樞密直學士 : 북송의 관직. 樞密院의 관원으로 五代 後唐 시기에 崇政院直學士를 고쳐 설치한 것이다. 주로 추밀원의 軍政 문서를 관장했다. 品秩은 正3品이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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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필(富弼)과 장무실(張茂實)이 거란에 가서 결혼과 세폐의 증액을 선택하도록 함 자료번호 : jt.k_0004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