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야마 쇼에몬(陶山庄右衛門)과 다카세 하치에몬(高瀬八右衛門)의 조선 파견
眞重이 애초에 정승의 일을 듣고 藩(쓰시마번)으로 돌아가서는, 다시는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논의하는 자들이 생각하기를, ‘조선은 이미 [우리] 나라가 위세를 떨치며 두 개의 섬이 있다는 말을 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울릉이라는 글자를 제거하는 일을 성취하지 못할까 근심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眞重이 무리의 의견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나아갔으나 과연 진퇴(進退)의 근거를 잃기에 이르렀고, 오래지 않아 접위관도 또한 서울로 돌아갔다. 眞重 등이 두 번째 서계에 대한 회답이 없는 것을 가지고 말을 삼아서 머물러 있은 지 오래 되었을 때에, 마침 레이코인공(靈光院公)이 에도에서 세상을 떠나서 다이엔인공(大衍院公) 휘(諱) 요시미치(義方)
주 001께서 가독(家督)을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렸다. 막부에서는 텐류태공(天龍太公) 휘(諱) 요시자네(義眞)
주 002에게 쓰시마번의 정무를 다시 맡도록 명하였다.
이에 군신(群臣)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는데, 陶山存 주 003
“울릉도가 조선에 종속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설령 저들(조선)이 우리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땅을 버리고 이름만 남긴다는 계책을 생각했다 해도 오히려 마땅히 사실에 근거하여 계문을 올려서 봉토(封疆)의 경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지금 이렇게 그 이름까지 아울러 버리게 하려는 것은 진실로 동맹을 맺은 국가와 더불어 서로 잘 지내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고기잡이를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70, 80년 동안 국경을 넘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 어찌 점검하는 일을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에는 주인이 없는 섬으로 생각하게 만들었고, 끝내는 우리나라의 땅으로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대저 일이 이와 같은 즉 저 서계에서는 마땅히 먼저 그 점검의 실책을 스스로 책망한 다음에 그 땅의 유래를 말하고 나서 국토의 경계를 바로 잡고 고기잡이 하러 가는 것을 금해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다짜고짜 국경을 넘었다느니 국경을 침범했다느니 하는 말을 감히 해서는 안 되는데, 어찌 공손한 예의와 온순한 말을 쓰지 않는 것입니까? 이제 마음대로 우리에게 잘못을 돌리면서 스스로 돌아보지는 않고 있으니, 무례함이 이와 같으므로 답서는 결단코 받을 수 없습니다. 사신이 된 자는 오직 마땅히 옳고 그름을 분변하여 속속들이 밝혀서, 저들이 이치가 궁해서 말이 막히도록 한 후에 그쳐야 할 것입니다. 만약 순리대로 따르지 않거나 고쳐 보내려 하지 않는다면 빈청(賓廳)에서 할복을 하여 나의 절개를 나타내겠습니다. 이 일을 막부에 계문을 올린다면 또한 잘했다고 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태공(太公)주 004이 말하였다.
“좋다.”
이에 存을 조선에 가도록 하니주 005 더러 위험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재판(裁判) 高瀨成常(하치에몬[八右衛門]이라고 칭한다)주 006을 파견하여 眞重을 소환하였다. 8년(1695) 을해년 여름에 存 등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眞重 등과 함께 계책을 꾸며 동래부사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그 네 가지 의문 조항을 동래부사 대인(大人)에게 제출하고 한성(國都)에 전하여 아뢰기를 청하였다.
이에 군신(群臣)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는데, 陶山存 주 003
각주 003)
(쇼에몬[庄右衛門]이라고 한다)이 말하였다.스야마 쇼에몬(陶山庄右衛門, 1657~1732년)은 쓰시마번의 유학자(儒學者)이다. 농업 진흥에 힘써 많은 농서를 남겼다. 이름은 나가로(存), 字는 士道, 통칭(通稱)은 쇼에몬(庄右衛門), 별호(別號)는 도쓰안(訥庵), 스야마 돈오(陶山鈍翁)라 칭하기도 한다. 쓰시마번의 유의(儒医) 陶山玄育의 아들로 태어나 11살에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가 되어 학문과 실천의 합일을 배웠다. 쓰시마에 귀향한 후에는 1699년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眞) 휘하에서 쓰시마번 군봉행(郡奉行)에 취임했다. 17세기 말 울릉도쟁계에서 조일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던 그는 조선과의 교섭에서 ‘죽도(竹島)’와 ‘울릉도’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쓰시마번의 강경파에 반대하여, 실상을 에도막부에 그대로 보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스야마가 울릉도 쟁계에 관해서 은퇴한 번사(藩士) 가시마 효스케(賀島兵助)와 주고받은 왕복문서를 수록한 것이 「죽도문담(竹島文談)」인데, 「죽도문담」은 『日本經濟叢書』권13(日本經濟叢書刊行會, 1915년)에 수록되어 있다.
“울릉도가 조선에 종속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설령 저들(조선)이 우리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땅을 버리고 이름만 남긴다는 계책을 생각했다 해도 오히려 마땅히 사실에 근거하여 계문을 올려서 봉토(封疆)의 경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지금 이렇게 그 이름까지 아울러 버리게 하려는 것은 진실로 동맹을 맺은 국가와 더불어 서로 잘 지내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고기잡이를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70, 80년 동안 국경을 넘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 어찌 점검하는 일을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에는 주인이 없는 섬으로 생각하게 만들었고, 끝내는 우리나라의 땅으로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대저 일이 이와 같은 즉 저 서계에서는 마땅히 먼저 그 점검의 실책을 스스로 책망한 다음에 그 땅의 유래를 말하고 나서 국토의 경계를 바로 잡고 고기잡이 하러 가는 것을 금해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다짜고짜 국경을 넘었다느니 국경을 침범했다느니 하는 말을 감히 해서는 안 되는데, 어찌 공손한 예의와 온순한 말을 쓰지 않는 것입니까? 이제 마음대로 우리에게 잘못을 돌리면서 스스로 돌아보지는 않고 있으니, 무례함이 이와 같으므로 답서는 결단코 받을 수 없습니다. 사신이 된 자는 오직 마땅히 옳고 그름을 분변하여 속속들이 밝혀서, 저들이 이치가 궁해서 말이 막히도록 한 후에 그쳐야 할 것입니다. 만약 순리대로 따르지 않거나 고쳐 보내려 하지 않는다면 빈청(賓廳)에서 할복을 하여 나의 절개를 나타내겠습니다. 이 일을 막부에 계문을 올린다면 또한 잘했다고 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태공(太公)주 004이 말하였다.
“좋다.”
이에 存을 조선에 가도록 하니주 005 더러 위험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재판(裁判) 高瀨成常(하치에몬[八右衛門]이라고 칭한다)주 006을 파견하여 眞重을 소환하였다. 8년(1695) 을해년 여름에 存 등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眞重 등과 함께 계책을 꾸며 동래부사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그 네 가지 의문 조항을 동래부사 대인(大人)에게 제출하고 한성(國都)에 전하여 아뢰기를 청하였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스야마 쇼에몬(陶山庄右衛門, 1657~1732년)은 쓰시마번의 유학자(儒學者)이다. 농업 진흥에 힘써 많은 농서를 남겼다. 이름은 나가로(存), 字는 士道, 통칭(通稱)은 쇼에몬(庄右衛門), 별호(別號)는 도쓰안(訥庵), 스야마 돈오(陶山鈍翁)라 칭하기도 한다. 쓰시마번의 유의(儒医) 陶山玄育의 아들로 태어나 11살에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가 되어 학문과 실천의 합일을 배웠다. 쓰시마에 귀향한 후에는 1699년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眞) 휘하에서 쓰시마번 군봉행(郡奉行)에 취임했다. 17세기 말 울릉도쟁계에서 조일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던 그는 조선과의 교섭에서 ‘죽도(竹島)’와 ‘울릉도’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쓰시마번의 강경파에 반대하여, 실상을 에도막부에 그대로 보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스야마가 울릉도 쟁계에 관해서 은퇴한 번사(藩士) 가시마 효스케(賀島兵助)와 주고받은 왕복문서를 수록한 것이 「죽도문담(竹島文談)」인데, 「죽도문담」은 『日本經濟叢書』권13(日本經濟叢書刊行會, 1915년)에 수록되어 있다.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색인어
- 이름
- 眞重, 眞重, 眞重, 레이코인공(靈光院公), 다이엔인공(大衍院公), 요시미치(義方), 텐류태공(天龍太公), 요시자네(義眞), 陶山存, 쇼에몬[庄右衛門], 高瀨成常, 하치에몬[八右衛門], 眞重, 眞重
- 지명
- 울릉, 울릉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