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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성리학의 교학화와 양명학의 출현

1. 명 : 성리학의 교학화와 양명학의 출현

명대(明代)의 유학에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공존하고 있었다. 첫째는 원대(元代)부터 시작된 성리학의 관학화(官學化)가 더욱 강화되면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인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락대전(永樂大全)』의 편찬이다. 둘째는 성리학의 체제교학화에 반발하면서 이에 대립하는 새로운 학문적 흐름이 등장했다는 점인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양명학(陽明學)이다.
1) 『영락대전』과 성리학의 교학화
『영락대전』은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의 명에 따라 1415년(명 영락 13) 9월에 편찬된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통칭하는 말로, ‘영락 3대전(永樂三大全)’이라고도 부른다.
성조 영락제는 1414년 11월에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호광(胡廣), 시강(侍講), 양영(楊榮)·김유우(金幼㪀) 등에게 칙명(勅命)을 내려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을 편찬하게 하였다. 편찬 작업에는 위에서 언급한 3명 외에도 한림편수(翰林編修) 엽시중(葉時中) 등 39명이 더 참여하였다. 성조는 호광등에게 대전의 편찬을 지시하면서 기본적인 편찬의 범례를 제시하였다. 오경과 사서에 대한 전주(傳註)와 여러 유학자들의 경학 논설 중에서 중요한 것을 편집·정리하여 전서(全書)를 편찬할 것, 주돈이(周惇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 장재(張載)의 『정몽(正蒙)』과 『서명(西銘)』 등 여러 성리학자들의 저술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편집할 것 등이 그것이다. 1415년 9월 『영락대전』의 편찬이 완료되자 성조는 어제서문(御製序文)을 붙이고 예조에 명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영락대전』의 체재와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사서대전』은 『대학장구대전(大學章句大全)』 『대학혹문(大學或問)』 『논어집주대전(論語集註大全)』 『맹자집주대전(孟子集註大全)』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 『중용혹문(中庸或問)』 등 6종의 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서에 대한 주희의 집주(集註)·장구(章句)·혹문(或問)을 중심으로 하면서 주희의 주석에 대한 송·원대 성리학자들의 학설들을 모아서 편집·수록하였다.
『오경대전』은 『주역대전(周易大全)』 『서경대전(書經大全)』 『시경대전(詩經大全)』 『예기대전(禮記大全)』 『춘추대전(春秋大全)』 등 5종의 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역』에서는 정이의 『이천역전(伊川易傳)』과 주희의 『주역본의(周易本義)』 『서경』에서는 채침(蔡沈)의 『서집전(書集傳)』 『시경』에서는 주희의 『시집전(詩集傳)』 『예기』에서는 진호(陳澔)의 『예기집설(禮記集說)』 등을 기본 토대로 하면서 정주학(程朱學)에 입각한 송·원대 여러 학자들의 주석들을 모아 편집하였다.
『성리대전』은 송대의 성리학자 120가(家)의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다. 이 중에서 원서(原書)를 채록(採錄)한 것으로는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통서』, 장재의 『정몽』과 『서명』,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주희의 『역학계몽(易學啓蒙)』과 『가례(家禮)』, 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 채침의 『홍범황극내편(洪範皇極內篇)』 등 9종이며, 그밖에 이기(理氣)·귀신(鬼神)·성리(性理)·도통(道統)·성현(聖賢)·제유(諸儒)·학(學)·제자(諸子)·역대(歷代)·군도(君道)·치도(治道)·시(詩)·문(文) 등 성리학의 주요 개념 13가지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모아 항목별로 분류하여 정리·편집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갖춘 『영락대전』은 편찬 직후 간행되어 중앙과 지방의 각 학교에 반포되어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또 과거의 필수 과목으로 채택되었다.주 319
각주 319)
명대 과거에서는 초기부터 성리학에 입각한 주석을 필수 시험과목으로 채택하였다.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의 과거 시험 과목을 보면, 먼저 사서는 주희의 집주(集註)·장구(章句)를 병용하며, 『시경』 『주역』은 고주소(古註疏)의 겸용을 배제하고 오직 주희의 『시집전』 『주역본의』와 정이의 『이천역전』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반면 『서경』은 채침의 『서집전』을 기본으로 하면서 채침의 주석 중에서 오류라고 판단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주석들을 겸용하도록 하였다. 또, 『예기』는 진호의 『예기집설』을 기본 주석으로 사용하면서 고주소도 겸용할 수 있게 하였고, 『춘추』는 「좌전(左傳)」 「곡량전(穀梁傳)」 「공양전(公羊傳)」 등 삼전(三傳)과 호안국(胡安國)의 「춘추전(春秋傳)」을 모두 허용하였다(馬宗霍(1936), 『중국경학사(中國經學史)』 대만상무인서관(臺灣商務印書館), 1987년 제7판,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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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라 『영락대전』은 당나라 때의 『오경정의(五經正義)』에 비견될 만큼 명대 학계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었으며, 『영락대전』에 의거한 성리학은 명나라의 체제교학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다. 또 『영락대전』은 간행 직후 조선에 유입되어 조선 학자들의 경학 및 성리학 연구의 기본 교재로 활용되는 등 대외적인 영향력도 매우 컸다.
하지만, 『영락대전』 편찬에 따른 성리학의 교학화에는 상당한 부자용과 그에 대한 비판이 뒤따랐다. 먼저, 방대한 분량의 3대전이 불과 1년도 안되는 기간에 완성되면서 그 내용 자체가 상당히 부실하며 많은 부분이 기존 저술들을 그대로 표절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영락대전』이 교육과 과거에서 절대적 권위를 가지면서 이를 이용하여 학자들이 사상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학풍 역시 성리학이 가지고 있는 이론 탐구와 윤리 실천의 두 측면 중에서 후자의 측면만 강조되었고, 도(道)를 추구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나 자유로운 비판정신은 사라지게 되었다. 즉, 국가가 공인한 범주 안에서만 연구와 실천이 가능하게 되면서 명대의 성리학은 경직되었고, 학문적·이론적 발전은 크게 뒤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 양명학의 출현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리학의 체제교학화에는 많은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성리학에 대한 반발과 수정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중 가장 큰 줄기를 이룬 것이 바로 양명학이다. 양명학은 왕수인(王守仁, 1472~1528)에 의해 제창된 것으로, 왕수인은 남송대 주희와 논쟁을 벌였던 육구연(陸九淵)의 심학(心學)을 계승하여 양명학으로 발전시켰다.
양명학은 이기론, 심성론, 그리고『대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성리학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먼저 이기론을 보면, 성리학은 리를 기의 근원으로 보는 이원론적인 입장인 데 반하여 양명학에서는 리를 단지 기의 조리(條理)로 간주하는 일원론적 입장을 취하여 리와 기를 둘로 나누는 것에 반대하였다. 다음으로 심성론에서는, 성리학이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한 반면, 양명학에서는 내 마음 속에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는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였다. 이는 다시 내 마음의 이치를 지각하는 본원적인 도덕지(道德知), 즉 양지(良知)를 완전하게 해야 한다는 ‘치양지(致良知)’설로 발전하였다.
양명학의 『대학』 이해는 위에서 본 ‘심즉리’와 ‘치양지’의 연장에서 나타난 것이다. 양명학에서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성리학적 해서, 즉 개별사물에 대한 이치를 하나하나 탐구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우주와 인간 사회 전체를 일관하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이론을 부정하고,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통한 내 마음에 있는 양지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격물치지’의 본의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양명학에서는 『대학』의 ‘지어지선(止於至善)’을 ‘양지’의 완성으로 해석했다. 또 양명학은 마음속의 양지를 완전하게 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사대부층 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도학 실천의 주체로 간주하였다. 그에 따라 양명학에서는 『대학』의 ‘친민(親民)’을 ‘신민(新民)’, 즉 백성을 교화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는 성리학적 해석에 반대하며, 원래대로 ‘친민’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성리학과 양명학의 공부론에 대한 인식 차이는 실천에 대한 인식 차이로 나타났다. 즉, 성리학에서는 지적 탐구활동을 통해 이치를 안 다음 실천할 수 있다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한 반면, 양명학에서는 내 마음에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그 이치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곧 실천이라고 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였다.
이상에서 양명학의 주요 논점들을 살펴보았다. 양명학은 성리학의 체제교학화에 따라 사상적으로 경직되고 학문적 발전이 정체되어 있던 명나라의 학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또 양명학은 이지(李贄, 1527~1602), 황종희(黃宗羲, 1610~1695) 등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개혁 사상가들에게 계승되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도 사상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 각주 319)
    명대 과거에서는 초기부터 성리학에 입각한 주석을 필수 시험과목으로 채택하였다.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의 과거 시험 과목을 보면, 먼저 사서는 주희의 집주(集註)·장구(章句)를 병용하며, 『시경』 『주역』은 고주소(古註疏)의 겸용을 배제하고 오직 주희의 『시집전』 『주역본의』와 정이의 『이천역전』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반면 『서경』은 채침의 『서집전』을 기본으로 하면서 채침의 주석 중에서 오류라고 판단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주석들을 겸용하도록 하였다. 또, 『예기』는 진호의 『예기집설』을 기본 주석으로 사용하면서 고주소도 겸용할 수 있게 하였고, 『춘추』는 「좌전(左傳)」 「곡량전(穀梁傳)」 「공양전(公羊傳)」 등 삼전(三傳)과 호안국(胡安國)의 「춘추전(春秋傳)」을 모두 허용하였다(馬宗霍(1936), 『중국경학사(中國經學史)』 대만상무인서관(臺灣商務印書館), 1987년 제7판, 132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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