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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고려와 중국의 학술교류와 성리학 수용

2. 고려와 중국의 학술교류와 성리학 수용

1) 고려 중기 관학진흥과 ‘존경학풍’
고려에서 종교와 사회생활을 지도한 것이 불교였다면, 유학은 개국 초기부터 국가의 정치적 지도 이념으로 역할하였다. 태조대에는 최응(崔凝), 최언위(崔言撝) 등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활동하면서 유교 정치체제 확립에 기여하였고, 광종대 과거제 시행은 유학 발달의 흐름을 더욱 촉진시켰다. 성종대에는 최승로 등의 건의에 따라 불교행사를 축소하는 대신 유학의 오례(五禮)를 시행하였고 국자감 증수, 경학박사 파견, 효자 표창 등 유학 진흥을 위한 여러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고려의 유학은 11세기 최충(崔沖, 984~1068)의 활동과 더불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최충은 1005년(목종 8)에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덕종~문종 연간에 관료로 활동하였으며, 치사(致仕) 이후 고려에는 12개의 사학이 형성되었는데주 312
각주 312)
고려 중기 사학십이도(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명칭과 설립자의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다.
[전거 : 『고려사(高麗史)』]
명칭소재지설립자설립자 관직설립자 출신지
文憲公徒개경崔忠侍中海州
弘文公徒개경 남문밖鄭倍傑侍中草溪
匡憲公徒-盧旦參政谷山
南山徒개경 남산金尙賓祭酒-
西園徒개경 서원金無滯僕射-
文忠公徒-殷鼎侍郞幸州
良愼公徒-金義珍平章事慶州
貞敬公徒-黃塋平章事-
忠平公徒-柳監--
貞憲公徒-文正侍中長淵
徐侍郞徒-徐碩侍郞利川
龜山徒-(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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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은 당시 과거 준비에 가장 효율적인 교육기관으로 역할하며 관학(官學)을 뛰어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최충의 구재학당에서는 9경(經)과 3사(史)를 중심으로 생도들을 교육하였는데, 구재의 명칭이나 교과목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한·당의 훈고학에서 탈피하여 송대 유학에 상당히 접근한 학풍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주 313
각주 313)
구재학당의 명칭은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姓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으로, 이는 모두 『중용』에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한편, 구재학당의 교과목 중 9경(九經)은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등이고, 3사(三史)는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등이다[문철영(2005), 『고려 유학사상의 새로운 모색』(경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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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중심의 고려 유학은 12세기 예종~인종대에 들어 큰 변화를 보이면서 한층 더 성장하게 되는데, 특히 이 시기에는 학문의 중심이 사학에서 관학으로 옮겨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숙종대부터 추진되던 개혁 정책과 맥을 같이한다. 숙종은 문벌귀족이나 외척세력들의 정치적 전횡을 막고 왕권을 강화하여 국왕 중심의 관료체제를 확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예종은 부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국왕 중심의 관료체제 확립을 완성시키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유교적 정치이념과 합리주의로 무장하여 귀족과 외척을 견제하면서 귀족적 정실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관료형이 필요하였다. 예종은 관학 진흥을 통한 신진관료의 양성으로 이러한 필요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예종은 즉위 직후 “학교를 설치하여 현명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삼대(三代) 이래로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이 된다.”라고 하여 관학 진흥의 의지를 피력하였다. 그 결과 1099년(예종 4)에 국학(國學)에 7재(齋)를 설치했는데, 이러한 학제 개혁은 문벌가문과 연결되어 있는 사학 중심의 교학체계를 관학 중심으로 전환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주 314
각주 314)
예종대에 설치된 칠재의 명칭과 교육 과목은 다음과 같다(전거 : 『고려사』).
여택재[麗澤齋 : 주역(周易)], 대빙재[待聘齋 : 상서(尙書)], 경덕재[敬德齋 : 모시(毛詩)], 구인재[求仁齋 : 주례(周禮)], 복응재[服應齋 : 예기(禮記)], 양정재[養正齋 : 춘추(春秋)], 강예재[講藝齋 : 무학(武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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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예종은 1116년(예종11)에 청연각(淸燕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설치하고 학사를 두어 왕의 경연을 담당하도록 하였고, 1119년에는 국학에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였다. 한편 인종대에 들어서 1133년(인종 11)에 무학재(武學齋)를 폐지하고 경사육학(京師六學)을 정비했으며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학식(學式)을 제정함으로써,주 315
각주 315)
인종대에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상정한 학식(學式)에 규정한 국학의 교과목과 교육 연한은 다음과 같다(전거 : 『고려사』).
① 『효경(孝經』 『논어』-1년, ② 『상서』 『공양전』 『곡량전』-2년 반, ③ 『예기』 『좌전』-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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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학은 그 규모를 완성하였다.
예종~인종대에는 학제 개혁과 더불어 과거제를 개혁하여 새로운 관인들이 계속적으로 창출·공급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되었다. 이때의 개혁은 과거의 시험과목에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실용성을 띤 논(論)·책(策)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논·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의 과거제 개혁은 결국 사장(詞章) 학풍에서 존경(尊經) 학풍으로의 이행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존경학풍 속에서는 설사 시부(詩賦)를 한다고 하더라도 글을 기교적으로 꾸미는 병려체(騈儷體)보다는 도를 중시하는 고문(古文)을 숭상하는 쪽으로 발전되어 문체의 개혁까지 낳게 되었다.
예종~인종대의 존경학풍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바로 경연에서의 경서 강론이다. 예종~인종대의 경연에서는 『서경』 『예기』 『주역』 『시경』 등이 강론의 중심을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도 『서경』 『예기』가 특히 중시되었다. 반면 국학의 정규 과목인 『춘추』에 대한 강론은 단 한 차례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서경』 『예기』 『주역』 등의 여러 편 가운데 경연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던 부분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서경』의 경우 황극(皇極)을 중심으로 유교정치의 요체를 설명한 「홍범(洪範)」, 현자(賢者) 등용의 필요성을 강조한 「열명(說命)」, 군주의 나태와 탐락을 경계하고 수신(修身)의 중요성을 강조한 「무일(無逸)」 등 군주가 정치에 임하는 자세에 관한 내용의 편들이 주로 강론되었다. 또 『예기』에서는 군주가 시행해야 할 정치 운영의 내용들을 월별로 정리한 「월령(月令)」이 자주 강론되었으며, 『주역』에서는 각 경전 중에서 군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들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관학 진흥의 궁극적인 목적이 왕권을 강화하여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체제를 확립하는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경연에서 『중용』과 『주역』이 중시되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최충의 구재학당과 함께 북송대 성리학의 도입 가능성을 시사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성리학의 체계에서 우주론(宇宙論)과 심성론(心性論)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이 두 경전이 중시되었다는 사실은, 12세기 고려의 유학 수준이 이미 심성(心性)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성향을 내포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주 316
각주 316)
고려 중기 북송성리학 수용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의 논저들이 있다.
문철영(1992), 「고려중기 사상계의 동향과 신유학」 『국사관논총』37.
   (2000), 「고려중·후기 유학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고려 유학사상의 새로운 모색』 (경세원).
최영성(1996), 「고려중기 북송성리학의 수용과 그 양상」 『대동문화연구』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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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 주자성리학의 수용
12세기에 경학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고려의 유학은 1130년(인종 8) 이후 고려-송 사이의 정치적 교류가 단절되면서 남송의 주자성리학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다. 여기에 1170년(의종 24)부터 약 100여 년간 계속된 무인집권기를 거치면서 고려의 유학은 크게 위축되었다. 문인(文人)·유자(儒者)들이 대부분 숙청되는 화를 입었고, 죽음을 모면한 이들도 대부분 낙향하거나 승려로 전신하여 여생을 마치는 등 문풍이 전반적으로 침체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의 학풍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재도론(載道論)으로 대표되는 송대의 고문운동이 무신집권기 일부 문사들에게 이어졌다. 또 고려 중기에 나타난, 『주역』과 『중용』에 의한 심성화(心性化) 경향은 선종(禪宗) 계통의 승려들을 통해 계속 이어졌는데, 이러한 경향은 고려후기 주자성리학 수용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고려의 유학은 충렬왕대 이후 원(元)으로부터 주자성리학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고려의 성리학 수용은 고려와 원의 문인들간의 활발한 교유를 통해 이루어졌다. 원간섭기 중에 수많은 고려인들이 원에 진출했으며, 원에서도 고려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고려에 건너왔다. 이 과정에서 고려와 원 양국의 수많은 문인·학자들이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으로 접촉·교유하였으며, 이를 통해 원으로부터 고려로 성리학이 전수되었다.주 317
각주 317)
고려와 원나라의 문인들간의 교유 관계에 대한 내용은 장동익(1994), 『고려후기 외교사 연구』(일조각)의 제4장 「려·원 문인의 교유」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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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주자성리학 수용은 안향(安珦,1243~1306)이 충렬왕대에 원나라에서 주희의 서적을 접하고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귀국 후 안향은 국자감에서 생도들에게 주자성리학을 강의하였고, 또 섬학전(贍學錢)을 거두는 등 국학을 중흥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안향의 학문은 이후 그의 문인인 백이정(白頤貞)·권보(權溥)·우탁(禹卓) 등에게 이어졌다. 백이정은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 수도에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정주학의 서적들을 많이 취득하여 귀국하였으며,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 등 문인들에게 이를 가르쳤다. 우탁도 정이(程頤)가 주석한 『이천역전』이 수입되자 이를 스스로 터득하여 국학의 생도들에게 교수하였다. 한편 권보는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註)』 간행을 건의함으로써 성리학의 보급에 기여하였으며, 또 박사 유연(柳衍) 등이 중국의 강남에서 새로 구입해 온 경학 서적들을 권한공(權漢功)·이진(李瑱 등과 함께 고열(考閱)하였다.
백이정 등에 의해 연구된 성리학은 이후 ‘이제현(李齊賢)→이곡(李穀)→이색(李穡)’ 등으로 이어졌다. 이제현·이곡·이색 등은 모두 국내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학문적 기반을 갖춘 후에 원나라에 가서 그곳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적 성장을 이루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제현은 충선왕을 시종하여 만권당(萬卷堂)에서 당대의 석학들과 만나 교유하였으며, 또 충선왕과 함께 강남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활동하던 여러 성리학자들과도 접촉하였다. 이곡은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관직을 제수받았으며, 그 아들 이색은 부친의 후광을 힘입어 원나라의 국자감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원나라의 관학을 공부하였다.
공민왕대 들어 주자성리학은 고려 학계에 더욱 널리 보급되고 연구도 심화되었는데, 여기에는 성균관(成均館)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민왕은 1367년(공민왕 16) 임박(林樸)의 건의에 따라 성균관을 중영(重營)하고 교육체계를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로 개편하였다. 또 이색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박상충(朴尙衷)·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 등을 학관으로 임명하여 생도들을 교육하였는데, 이에 교육이 중흥되고 성리학이 관학의 새로운 학풍으로 정착되었다.
고려말에 성리학이 수입될 당시 원나라의 관학은 지경(持敬) 위주의 실천 윤리를 강조하는 허형(許衡)의 노재학풍(魯齋學風)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학풍은 당시 원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고려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어 성균관을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이색은 인간의 성(性)을 회복하는 수양법으로 계신(戒愼)과 지경(持敬)을 강조하였으며, 이숭인은 『소학(小學)』윤리의 실천을 매우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 정도전도 모든 저술에서 윤리의 문제를 강조하였으며, 이는 그의 전 사상체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고려말 성리학의 특징은 ‘일상윤리(日常倫理)의 강조’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한편, 고려말 성균관에는 원나라의 관학 이외에도 다양한 경향의 성리학풍이 소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고려사』「정몽주전(鄭夢周傳)」에 수록된 성균관 강론 기사인데, 그 내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공민왕) 16년에 (정몽주가) 예의정랑(禮曹正郞)으로 성균박사(成均博士)를 겸하였다. 당시에 동방에 들어온 경서는 오직 주자집주(朱子集註) 뿐이었는데, 정몽주의 강설이 탁월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자못 의심하였다. 후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들어와서 보니 (정몽주의 강설)과 합치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여러 학자들이 더욱 탄복하였다(『고려사』 권117 열전(列傳)30, 「정몽주전(鄭夢周傳)」).
 
당시 정몽주의 강설이 호병문(胡炳文)이 지은 『사서통(四書通)』의 내용과 일치하였다는 「정몽주전」의 기사는 고려말 성균관에서 이미 호병문의 학설이 수용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호병문(1253~1333)은 휘주(徽州) 무원(婺源) 출신의 학자로, 가학(家學)을 통해 주희의 학문을 전수받아 그 학설을 충실히 따르고 존숭하는 학풍을 가졌단 인물이다. 그는 일생을 향리에서 학문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으며, 특히 사서(四書)와 『서경』 『주역』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남겨 당시 중국 동남(東南) 지역의 대학자로 명성을 날렸다.주 318
각주 318)
호병문(胡炳文)의 학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유권종(1993), 「胡炳文의 『四書通』에 관한 연구」 『元代性理學』, 포은사상연구회, 262~266쪽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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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호병문은 허형의 학설이 중심이 된 원대 관학과는 학문 경향을 달리 하는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단편적인 기록이기는 하지만, 고려말 성균관에서 호병문의 학설을 수용한 사실은 고려말에 송·원대 성리학의 여러 학설들이 다양하게 수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성균관의 학문 경향을 단순히 원대 관학으로만 한정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고려 중·후기 학계의 동향과 성리학 연구의 흐름을 검토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관학을 중심으로 경전 연구를 강조하는 존경(尊經) 학풍이 일어났다. 고려 중기의 존경학풍은 비록 무인집권기하는 학문적 침체기를 만나기는 하였지만, 그 전통이 계속 이어져서 고려 후기에 성리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재적 바탕이 되었다. 여기에 원나라로부터 새로이 수입된 성리학이 결합하고 또 성균관의 중영을 통해 많은 학자들이 양성되면서, 성리학은 기존의 불교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주류 사상으로, 나아가 새나라 조선의 지배 이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각주 312)
    고려 중기 사학십이도(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명칭과 설립자의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다.
    [전거 : 『고려사(高麗史)』]
    명칭소재지설립자설립자 관직설립자 출신지
    文憲公徒개경崔忠侍中海州
    弘文公徒개경 남문밖鄭倍傑侍中草溪
    匡憲公徒-盧旦參政谷山
    南山徒개경 남산金尙賓祭酒-
    西園徒개경 서원金無滯僕射-
    文忠公徒-殷鼎侍郞幸州
    良愼公徒-金義珍平章事慶州
    貞敬公徒-黃塋平章事-
    忠平公徒-柳監--
    貞憲公徒-文正侍中長淵
    徐侍郞徒-徐碩侍郞利川
    龜山徒-(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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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313)
    구재학당의 명칭은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姓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으로, 이는 모두 『중용』에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한편, 구재학당의 교과목 중 9경(九經)은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등이고, 3사(三史)는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등이다[문철영(2005), 『고려 유학사상의 새로운 모색』(경세원)]. 바로가기
  • 각주 314)
    예종대에 설치된 칠재의 명칭과 교육 과목은 다음과 같다(전거 : 『고려사』).
    여택재[麗澤齋 : 주역(周易)], 대빙재[待聘齋 : 상서(尙書)], 경덕재[敬德齋 : 모시(毛詩)], 구인재[求仁齋 : 주례(周禮)], 복응재[服應齋 : 예기(禮記)], 양정재[養正齋 : 춘추(春秋)], 강예재[講藝齋 : 무학(武學)]. 바로가기
  • 각주 315)
    인종대에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상정한 학식(學式)에 규정한 국학의 교과목과 교육 연한은 다음과 같다(전거 : 『고려사』).
    ① 『효경(孝經』 『논어』-1년, ② 『상서』 『공양전』 『곡량전』-2년 반, ③ 『예기』 『좌전』-3년. 바로가기
  • 각주 316)
    고려 중기 북송성리학 수용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의 논저들이 있다.
    문철영(1992), 「고려중기 사상계의 동향과 신유학」 『국사관논총』37.
       (2000), 「고려중·후기 유학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고려 유학사상의 새로운 모색』 (경세원).
    최영성(1996), 「고려중기 북송성리학의 수용과 그 양상」 『대동문화연구』 31. 바로가기
  • 각주 317)
    고려와 원나라의 문인들간의 교유 관계에 대한 내용은 장동익(1994), 『고려후기 외교사 연구』(일조각)의 제4장 「려·원 문인의 교유」를 참조. 바로가기
  • 각주 318)
    호병문(胡炳文)의 학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유권종(1993), 「胡炳文의 『四書通』에 관한 연구」 『元代性理學』, 포은사상연구회, 262~266쪽을 참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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