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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원균(元均)과 권율(權慄) 등 장군의 왜정(倭情)에 대한 보고와 흉적으로부터 끝까지 구제해 주기를 청하는 조선국왕의 주문(奏文)

12. 倭情奏文
  • 발신자
    조선국왕 신 이(李) 휘(諱)
  • 발송일
    1594년 2월 16일(음)(만력 22년 2월 16일)
발신: 조선국왕 신 이(李) 휘(諱)는 삼가 상주합니다.
사유: 흉적이 변경에 머물러 탄서(呑噬)의 화가 임박하여 성명께서 특별히 긍민을 내리어 끝까지 구제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입니다.
 
[조선국왕] 앞서 작년(1593) 12월 중에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이 치계했습니다.
[원균] 초군(哨軍) 김은금(金銀金)이 보고했습니다.
[김은금] 본월 초3일, 제가 거제현(巨薺縣) 내량(乃梁) 지역 높은 곳에서 주위를 살피다가 왜노 1명을 마주쳐, 곧장 사로잡아 왔습니다. 이에 즉시 심문하니 일명 망고지로(望古之老)라고 하는 자의 공술입니다.
[망고지로] 나이 25세로 일본국 시거물(是巨勿)주 001
각주 001)
확실하지 않으나 ‘시가의 사람(滋賀のもの)’인 듯하다. 시가는 교토에 근접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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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입니다. 본년(1593) 2월 28일에 우리들 신병(新兵) 600명은 상관 조승감(趙承甘)주 002
각주 002)
초소카베(長宗我部) 가문의 무장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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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라 바다를 건너 조선 양산군(梁山郡) 하룡당(下龍堂) 등지에 도착하여 성자(城子)를 수축했습니다. 조선의 병선이 한산도(閑山島)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탐청하고 본현으로 들어가 현의 협로를 파절했습니다. 장문포(場門浦)에 원래 정박하고 있는 전선은 200여 척이고 군졸은 1,000여 명이며, 영등포(永登浦)에 원래 정박하고 있는 전선은 500여 척이고 군졸은 5,000여 명입니다. 군량은 본국(일본)에서 운반하여 세 군데에 나누어 쌓아 두었습니다.
[조선국왕] 또 본월 내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고언백(高彦伯)이 치계했습니다.
[고언백] 본월 초2일에 주회인(走回人)주 003
각주 003)
전쟁 등으로 적대국에게 납치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가 스스로 되돌아온 사람들을 가리킨다. 교섭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어 공식적으로 돌아온 경우는 쇄환(刷還)이라고 하며 상대가 돌려보내는 경우는 송환(送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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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門善)이 다음의 내용을 아뢰었습니다.
[문선] 본년 윤11월 19일에 경주부(慶州府)에서 적(일본군)에게 공격을 받아 임랑포(林郞浦) 본영으로 보내져 기회를 엿보며 성자 주위를 살펴보니 본부(경주부)의 성과 성안이 비슷했습니다. 산 위에 2층 고각과 대옥 세 곳을 지어 주변을 조망하는 곳으로 삼고, 임시 막사가 촘촘하게 들어서서 적도(賊徒)의 숫자가 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성 밖에는 또한 목책을 설치하고 강변에는 전선을 나란히 정박시켰습니다. 어느 날 내부의 적추(賊酋) 3인이 남쪽으로부터 왔습니다. 제가 알아보니 본월 19일에 두모포(豆毛浦)에 주둔하는 적이 본부(경주부)를 노략했으나 우리 군사에게 많이 죽음을 당하여 이 때문에 괴이하게 여기면서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저 적추들이 모두 와서 상의하고 장차 크게 보복하려 한다고 합니다.
[고언백] 또 주회 부녀 옥진(玉眞)이 다음의 내용을 아뢰었습니다.
[옥진] 본년 9월 11일에 적에게 공격을 받아 임랑포 영(營)으로 보내져 머물게 되었는데, 들어 보니 본적(本賊)은 병마를 휴식시키며 내년 봄에 따뜻해지는 시기를 기다려 전라도 지역을 차례로 공격할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월 내 경상도관찰사 한효순(韓效淳)주 004
각주 004)
한효순(韓孝純, 1543~1621)이다. 이하 모두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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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치계했습니다.
[한효순] 경상좌도의 동래(東萊)·기장(機張)·부산포(釜山浦)·서생포(西生浦)·임랑포(林郞浦)·구법곡(仇法谷)과 경상우도의 김해(金海)·웅천(熊川)·가덕(加德)·덕교(德橋)·죽도(竹島)에 머물던 여러 적들이 전과 같이 가득 차 있는데 거제현에 적도가 가장 많이 모여 있습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년 1월 내 순변사 이빈(李薲)이 치계했습니다.
[이빈] 김해부 청무인(聽撫人)주 005
각주 005)
왜적에게 붙었다가 면사첩(免死帖)을 매개로 한 초무에 응하여 도로 귀부(歸附)해 온 조선인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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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말석(朴抹石)이 아뢰었습니다.
[박말석] 천성(天城)·가덕·웅포(熊浦)·삼포(森浦)·안골포(安骨浦)에 주둔하는 적이 토굴을 견고하게 쌓고 참호를 깊이 파며, 병기를 주조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고 있으며, 강어귀에 줄을 세워 정박한 전선이 50여 척입니다. 들으니 봄에 순풍이 불기를 기다려 새로이 충원한 정예병과 한꺼번에 전라도 지역을 차례로 공격할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월 내 제도도순찰사 권율(權慄)이 치계했습니다.
[권율] 체탐인 달망(達亡)이 아뢰었습니다.
[달망] 제가 몰래 연해의 적영에 가서 여러 적이 모두 “관백이 회군하는 것을 불허하여 장차 진주(晉州) 영성창(永城倉)으로 바로 나아가 미량(米粮)을 탈취하고 이어서 전라도 지역을 침범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권율] 또한 체탐인 이겸수(李謙受) 등이 아뢰었습니다.
[이겸수] 두모포 등에서 왜적들이 이야기했습니다.
[왜적] 내년 3월 우리는 영산현(靈山縣) 서쪽 길을 거쳐 전라 지역 통로의 주현으로 들어가 각각 5일간 머물며 도로를 닦으려 한다. 대부대를 3기(起)로 나누어 1기는 살마주(薩摩州)주 006
각주 006)
일본 사츠마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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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1기는 평호도(平胡島)주 007
각주 007)
일본 히라도(平戶)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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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1기는 전라를 경유하여 대명(大明)을 차례로 공격할 것이다.
[이겸수] 또한 (두모포의 왜적들이) 이야기했습니다.
[왜적] 양곡을 실은 배 1만 여 척으로 날을 정해 바다를 건너서 각 해당 부대에 공급하려 한다.
[조선국왕] 또한 본월 내 경상도관찰사 한효순이 치계했습니다.
[한효순] 초탐인 제옥(諸玉)이 아뢰었습니다.
[제옥] 거제·웅천에서 여러 적이 예전보다 더욱 치성하여 제가 찾아가 보니, 본적이 본년 3월에 장차 전항의 지역에서 모두 모여 침범하고자 성세(聲勢)를 날로 키우고 있는 듯합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관(한효순)이 치계했습니다.
[한효순] 본월 초1일에 기장현 사인(士人) 신응륭(申應隆)이 아뢰었습니다.
[신응륭] 두모포에 주둔하는 적이 “봄에 순풍이 불기를 기다려 본토의 군사가 모두 나와 대거 공격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월 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성윤문(成允門)이 치계했습니다.
[성윤문] 본월 초8일에 안복장(按伏將) 최강(崔堈)이 급히 보고했습니다.
[최강] 김해·가덕·천성·안골포·영등포·제포(薺浦)의 적선 40여 척 또는 80여 척을 모두 거제현을 향하도록 한곳에 매어놓고 있습니다. “거제에 주둔하는 적이 올해 봄 따뜻해지는 때 장차 전라도로 나가 공격하고 이어서 대명의 지방을 침범할 것이다.”라고 들었습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월 내 본관(성윤문)이 치계했습니다.
[성윤문] 김해부 청무인(聽撫人) 우음산(羽音山)이 아뢰었습니다.
[우음산] 작년 11월 중 죽도의 왜적에게 공격을 받아 늘 포로 관리자 곁에서 부려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왜적이 저에게 “‘조선 산천을 너희들이 이미 익숙하게 내달렸다. 이제 또한 너희들이 다시 싸워서 공을 세워야 하니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관백의 분부를 최근에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월 내 부총병 유정(劉綎)의 사후배신(伺候陪臣) 김찬(金瓚)이 치계했습니다.
[김찬] 본월 초7일에 왜적 6명이 심 참장의 가정을 함께 따라와 본부에 와서 이르기를 “군량을 실은 배 40여 척이 바람에 휩쓸려 전라 지역에 표류하여 가서 찾아보고자 한다.”라고 했습니다. 총병이 “그대들의 배가 만약 진실로 우리 쪽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이나 지금 실제로 있지 않고, 어느 경계로 향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유키나가(行長)는 이전에 15척이라고 했다가 다시 16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다시 40여 척이라고 하니 그대들의 말이 자꾸 변하여 정확하지 않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어서 통사 유의빈(柳依檳)으로 하여금 “본적은 배를 찾으려 한다는 말을 핑계 삼고 있으나 그 실제는 전라도 형세를 탐지하여 흉모를 멋대로 하려는 것이니 그대 나라는 삼가 방비를 더하여 후회를 끼치지 마십시오.”라고 (조선 측에) 전하도록 했습니다.주 008
각주 008)
이 내용은 1594년 2월 1일에 조선국왕이 순무요동도찰원․순안요동도찰원․총독병부․요동도지휘사사에게 보고한 내용이기도 하다. 『事大文軌』 卷8, 萬曆二十二年二月初一日 緊急倭情咨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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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또한 본월 내 경상도관찰사 한효순이 치계했습니다.
[한효순] 안복장 제득호(諸得浩)가 보고했습니다.
[제득호] 왜적이 거제현 및 옥포(玉浦) 아주(牙州)에서 임시 막사를 지었는데 그 수를 이루 다 적을 수 없습니다. 또한 현(거제현)의 치소에서 장문포·영등포·소진포(所珎浦)에 이르기까지 적도가 가득 차 있고 횃불이 하늘에 닿아 성세가 매우 드높습니다.
[조선국왕] 또한 2월 내 본관이 치계했습니다.
[한효순] 체탐인 서윤복(徐允福)이 아뢰었습니다.
[서윤복] 제가 또한 걸인과 같은 행색으로 꾸며 임랑포 영으로 잠입하니 피로인(被擄人) 김봉서(金奉瑞) 등이 “본적이 천병을 엿보아 철수할 것이라 보고 이제 신병을 다시 조발하여 보내어 내지로 진격하려 한다.”라고 제게 말했습니다.
[조선국왕] 또한 본월 내 본관(한효순)이 치계했습니다.
[한효순] 심 참장의 답응통사(答應通事) 이유(李愉)의 정문을 받았습니다.
[이유] 참장은 작년 12월 24일에 적의 진영에 갔다가 본년 1월 20일에 돌아왔고 24일에 팔거현(八莒縣)에 도착했습니다. 비직(이유)이 알아본 바 적추 히데요시(秀吉)은 그 나라의 국도(國都)에 있으면서 항표(降表)를 다듬어 참장이 머문 웅천현의 적진에 보냈고 이어서 왜인 12명을 차견하여 참장을 수행하여 (내지로) 가도록 했습니다. 갖추어 온 장계를 받고 신은 삼가 작년 12월 이전의 적정을 각각 조사하여 이미 현장 조사를 마치고 주본을 갖추어 주문(奏聞)하는 외에, 이번 (주본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았습니다. 신(臣)이 하늘과 땅에 죄를 지어 참혹한 병화(兵禍)를 입었습니다. 처음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옮겨 왔던 것은 구구한 마음으로 다만 부모와도 같은 (명의) 강역에 달려가 죽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애초부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보존되기를 도모하여 오늘날의 일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겠습니까? 다행히 성천자(聖天子)의 특별한 은혜에 힘입어 전례 없이 천하의 군사를 움직이는 것을 소요로 여기지 않으셨고 은과 곡식을 내려 주시는 것을 낭비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적을 쫓아 대구(大丘)에 이르렀지만 멀다고 여기지 않으셨고 몇 년을 주둔하고 방어하되 길다고 여기지 않으셨으니 이는 천지의 부모와도 같은 인(仁)과 죽어 가는 자를 일으키고 포악한 자를 끊는 의(義)에서 나왔으니 실로 미약한 신이 바랄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왕사(王師)는 전쟁에 죽고 역병에 죽고 굶주림에 병들어 (조선의) 수토(水土)에서 상한 자가 어찌 끝이 있겠으며, 말과 가축이 죽거나 다치고 기계가 망가진 것 또한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무릇 이는 모두 신 때문인 까닭에 신이 지극히 미련하나 은혜에 감사하고 죄를 생각함에 실로 몸을 가누기가 어려우며 비록 살갗을 벗기는 재앙이 조석 간에 닥친다 하여도 감히 다시 번거롭게 호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신이 오랫동안 적정을 살펴보고 최근 체탐인이 말한 바를 참작해 보니, 그 음모와 흉계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오직 이 적은 본성이 흉악하고 교활하여 진실로 사람의 도리로 책망하기 어렵고, 그 풍습을 돌아보면 대개 용병(用兵)을 치밀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처음 적이 한성(漢城)에서 떠나고 두 자식을 돌려준 것은 신이 크게 바라는 것을 얻은 것이니 신은 마땅히 오로지 기뻐해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건대, 남모르게 걱정하는 바가 있으니 저들이 바라는 바를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기에 장차 (그것을) 취하고자 잠시 내준 것입니다. 이미 부산에 주둔하였으니 저들은 변경 가까이에 있어 군량과 군사 지원이 모두 편리하지만 천병의 피로함은 또한 다시 천 리로 늘어났고 경상도는 이미 군사를 먹이기에 부족하여 소방이 신속하게 군량을 실어 날라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형편을 얻고 주둔을 연장하여 떠나지 않는 것, 이야말로 진실로 싸우지 않고 남을 굴복시키는 방법입니다. 왕사는 고립돼 이치상 오래 머물기 어려워지고 소방은 탕잔돼 양식이 고갈되기를 기다릴 수 있으니, 그런즉 이에 핑계만 대고 시기를 지체하며 적절한 때의 기회를 늦추었다가 가장 적정한 시점에 올라타려는 것이니 이런 이유로 적은 더욱 강화를 바라는 것입니다. 한성에서 이미 이로써 (우리 측의) 새롭게 승전한 파죽지세를 늦추었고 부산에 이르러서는 또 이로써 황령(皇靈)이 소탕할 시기를 늦춤으로써 (저들이) 얻은 이익은 매우 큽니다. 이 적은 실로 해외의 흉독한 별종으로서 잘난 체 하며 날뛰어 끝까지 거역하고 다시는 군신부자의 예가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역추(逆酋) 히데요시(秀吉)는 또한 방자하게도 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여 마침내 품어서는 안 될 야망을 품고서 몇 년째 음모를 간직하다가 군사를 내니 (그) 나라가 기울 정도였습니다. 지금 멀리까지 뻗치며 흘겨보니 성세가 이미 충만하고 뜻을 지극하게 이루었는데도 오히려 떠나지 않고 타국에서 해를 보내고 추위와 더위를 겪으면서 성을 쌓고 군량을 비축하며 군사를 훈련시키니 어찌 그 계획으로만 끝나겠습니까? 신은 천병의 허실이 오래 될수록 엿보임을 면치 못하리라 걱정되니 섬나라의 요망한 족속이 끝내 대국에 대항할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상이 참혹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성명께서 통찰하시고 묘당에서 주획할 바인지라 신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안타깝고 절박한 뜻은 오히려 변방의 실정을 갖추어 아룀으로서 우러러 환란을 대비하심을 돕고 싶습니다만 궐문이 너무 멀어 쉽게 도달할 수 없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큰 것입니다. 이른바 항표라는 것은 신이 보지 못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단지 히데요시는 국도로 이미 돌아갔다고 하는데 가서 항표를 가져오는 데는 20일 정도만 걸렸으니 또한 어찌 그리 빠릅니까? 가령 표문은 거짓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말은 지극히 공손하여 오히려 믿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적은 이미 원래의 소굴로 돌아가 명을 기다릴 뜻이 없었고 군사의 위력으로 스스로 버티려는 계책을 갖고서 감히 천병과 대치하여 항전하여 죽이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으로 봉공(封貢)을 청하였으니 그것은 거짓에서 나온 것이지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감출 수 없습니다. 지금 일찍 조처하지 않는다면 신은 진실로 이 때문에 더 큰 화를 빚을 것이라 걱정됩니다. 신이 선인(先人)에게 듣건대 타인의 마음을 뺏을 수 있다면 적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쓰임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들이 이미 우리에게 화친을 청하였으니, 우리라고 해서 적에게 그럴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매번 이르기를 혹 적들이 다시 침범한다면 반드시 전라도를 거쳐 군량을 탈취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바야흐로 계절이 얼음이 녹는 봄철이며 대군이 마침 철수하니 바로 저들이 다시 침범할 기회입니다. 양곡을 실은 배[糧船]를 찾겠다고 가장하여 전라(도) 지역을 다니고자 하니 본 도에 침을 흘리는 정상이 현저한데, 각처에서 알린 바와 신이 헤아린 바가 서로 부합됩니다. 본 도의 동쪽 군현은 이미 전란을 겪었고 오직 서쪽 지역만 약간 온전하여 군사를 징병하고 군량을 운반하여 오로지 여기에서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지만, 이미 오랫동안 물력이 탕갈되어 혹여 갑자기 공격을 받는다면 막을 계책이 없습니다. 본 도가 파괴되고 나면 소방은 다시 근거할 만한 땅이 없어져 이미 회복한 땅도 차례로 와해되고 망하는 화를 당하여 눈썹이 타오르는 때보다 다급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만나도 천병은 멀리서 다시 나오기 어렵고 소방의 연로 수천 리는 이미 텅 빈 땅이 되었으니, 흉봉(兇鋒)이 이르는 곳마다 마치 무인지경을 밟듯이 하여 이는 실로 민박(悶迫)한 사정이 전날보다 두 배가 될 것입니다. 신은 참으로 형편없지만 스스로 쇠미한 데서 떨쳐 일어남으로써 성천자의 칙유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뜻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묘사직과 철류(綴旒)주 009
각주 009)
임금을 표장(表章)한 깃발로 곧 임금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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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통서(統緖)는 기력의 쇠잔함이 극에 달했고 적은 문앞에 있어 비록 뜻을 절실히 분발한다 해도 실로 계책으로 삼기 어렵습니다. 신이 모독의 벌과 번거로움의 죄를 두려워해서 제때 달려가 실상을 호소하지 않는다면 소방은 적에게 삼켜질 뿐 아니라 영원히 번병의 임무를 잃게 되고 신은 천조에서 시종 구제해 준 은혜를 실로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소방이 병란을 입은 이래 농사짓기를 완전히 포기하여 열읍이 황폐하고 사람과 가축이 사라졌으며 밥 짓는 연기가 끊겨 길에 굶어죽은 이들이 이어졌고 해골이 쌓여 산을 이루었습니다. 참으로 만약 이 적이 혹시라도 모두 바다를 건너 성심으로 화친을 빌었다면 신은 마땅히 그사이를 틈타 백성을 불러 모아 잠시도 휴식을 도모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감히 장황하게 적정을 논하여 성명의 위엄을 번독하고 외람되게 해서 굳이 대군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길가에서 이슬을 맞게 하고 유민들을 (군량) 공급하는 일로 피로하게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위태로운 형세를 살피시며 신이 죄를 기다리는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더욱 큰 은혜를 내리셔서 끝내 다시 살리고 덧붙여 만전의 계책을 도모하도록 한다면 크게 다행이겠습니다. 흉적이 변방에 머물러 있는 관계로 화(禍)가 임박하여 병탄될 지경이오니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어 끝까지 구제해 주시라는 사리(事理)를 아룁니다. 이에 삼가 주본을 갖추어 아룁니다.
 
만력 22년 2월 16일 조선국왕 신 이(李) 휘(諱)가 이같이 삼가 주문하고 성지를 기다리겠습니다.

  • 각주 001)
    확실하지 않으나 ‘시가의 사람(滋賀のもの)’인 듯하다. 시가는 교토에 근접한 지역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초소카베(長宗我部) 가문의 무장으로 추정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전쟁 등으로 적대국에게 납치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가 스스로 되돌아온 사람들을 가리킨다. 교섭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어 공식적으로 돌아온 경우는 쇄환(刷還)이라고 하며 상대가 돌려보내는 경우는 송환(送還)이라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4)
    한효순(韓孝純, 1543~1621)이다. 이하 모두 동일하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왜적에게 붙었다가 면사첩(免死帖)을 매개로 한 초무에 응하여 도로 귀부(歸附)해 온 조선인을 이른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일본 사츠마를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일본 히라도(平戶)로 추정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8)
    이 내용은 1594년 2월 1일에 조선국왕이 순무요동도찰원․순안요동도찰원․총독병부․요동도지휘사사에게 보고한 내용이기도 하다. 『事大文軌』 卷8, 萬曆二十二年二月初一日 緊急倭情咨 참고. 바로가기
  • 각주 009)
    임금을 표장(表章)한 깃발로 곧 임금을 뜻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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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元均)과 권율(權慄) 등 장군의 왜정(倭情)에 대한 보고와 흉적으로부터 끝까지 구제해 주기를 청하는 조선국왕의 주문(奏文) 자료번호 : sdmg.k_0002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