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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미호(卑彌呼)가 명제(明帝)에게 난승미(難升米)와 도시우리(都市牛利)를 보내니 명제가 물건과 작위를 하사함

  • 국가
    왜(倭)
[위(魏) 명제(明帝)] 경초(景初) 2년(238)주 001
각주 001)
“景初二年”은 ‘景初三年’(239)의 誤記이다. 왜냐하면 『日本書紀』에 인용된 『魏志』와 『梁書』는 모두 “三年”으로 기재하였기 때문이다(石原道博, 2005:50). 景初 2년까지 약 50년간, 公孫氏가 요동에서 세력을 떨쳐 일시적으로는 독립하여 燕王을 자칭하였으므로, 왜국의 사자는 魏에 갈 수 없었다. 景初 3년 정월에 이르러 위는 본격적으로 공손씨를 공격하여 8월에 이르러서 드디어 승리를 거두고, 요동에서 낙랑, 대방에 이르는 지역을 위의 지배로 편입하였다. 이처럼 景初 3년에 요동, 낙랑 등 5군이 平州로 편제되어 위의 땅이 되면서, 왜국은 직접 위에 사자를 파견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森浩一, 1985: 14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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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왜(倭)의 여왕이 대부(大夫) 난승미(難升米) 주 002
각주 002)
難升米:內藤虎次郞에 따르면, 難升米는 垂仁朝(전29~70)에 常世란 나라에 使臣으로 파견되었다가 景行朝(71~130)에 귀국한 田道間守(다지마모리)라고 한다(石原道博, 20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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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으로 하여금 [대방]군에 이르게 하여, 천자(天子)에게 나아가서 조헌(朝獻)하기를 요청하므로, [대방군] 태수(太守)주 003
각주 003)
太守:본래 戰國時代에 郡守의 존칭이었다. 前漢 景帝 中元 2年(전142)에 郡守를 太守로 바꾸었다. 이후 역대에 太守가 설치되었으나, 南北朝時代(317~589)에 州를 설치하는 것이 점차 많아지면서 郡의 境域은 갈수록 더욱 축소되었다. 마침내 州와 郡은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隋初에 처음으로 州를 폐지하고 군을 존치하였다. 이후 隋 煬帝와 唐 玄宗 때 州를 郡으로 개칭하였고, 郡에는 太守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唐 肅宗이후에 太守는 正式 官名이 되지 못하였고, 단지 刺史 혹은 知府의 別稱이 되었다. 明淸시대에는 太守는 知府의 尊稱으로 바뀌었다(臧云浦 외 2인, 19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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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劉夏) 주 004
각주 004)
『三國志』 〈韓條〉에 “景初 중에 明帝가 몰래 帶方太守 劉昕과 樂浪太守 鮮于嗣를 보내어 바다 건너 2군을 정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보이는 유흔과 같은 인물이 가능성이 있다(森浩一, 198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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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관]리(官吏)를 시켜서 [의 사절을] 전송(傳送)하게 하여 경도(京都)에 이르게 하였다. 그해(239) 12월에 [명제는] 조서(詔書)를 내려서 의 여왕에게 답하여 말하였다. “친위왜왕(親魏倭王)주 005
각주 005)
魏가 外臣에게 수여하는 작위 중에서 “親魏倭王”은 가장 높은 것 중 하나였다. 이보다 10년 전인 太和 3년(229)에 명제는 서쪽의 대국인 大月氏(쿠샨왕국) 국왕 波調를 ‘親魏大月氏王’에 임명하였다. 왜국과 대월지국은 모두 여러 나라가 종속되어 있으므로, 大庭修는 “魏王朝의 外蕃政策은 몇 개의 나라를 통속하고 있는 국왕에게 ‘親魏某王’이라는 왕호를 주어 관계를 맺은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森浩一, 198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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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미호(卑彌呼)에 제조(制詔)주 006
각주 006)
制詔:詔書와 같은 뜻으로서 “조서를 내린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史書 등에서 詔勅을 인용하는 경우, 대부분 ‘制詔’라는 부분은 생략되는데, 卑彌呼에 대한 조칙에서는 이 부분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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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라. 대방군 태수인 유하(劉夏)가 사인(使人)을 보내어 너의 대부(大夫) 난승미(難升米)와 차사(次使)주 007
각주 007)
이 문장의 “次使”란 단어를 단서로 삼아서 유추하면, 倭의 大夫 難升米는 ‘正使’에 해당하고 次使 都市牛利는 副使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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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우리(都市牛利) 주 008
각주 008)
都市牛利:內藤虎次郞의 주장에 따르면, 都市는 즈시(出石)를 나타내며, 淡路津名郡의 都志(豆之)도 但馬의 出石과 관계가 있으므로, 이즈시의 略字라고 한다. 牛利는 고리(心)란 뜻으로서 出石心(이즈시고리), 즉 都市牛利란 사람 이름일 것이라고 한다. 上田正昭는 都市牛利가 牛利로만 기록되기도 한 사실에 주목하여, 都市는 都護, 都司, 都水처럼 시를 관장하는 관직명으로 이해하였다(上田正昭, 1999:29). 또 伊佐我命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出雲의 都我利神社의 都我利일 가능성도 제기되어 있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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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호송해 왔는데, 네가 바친 남자 생구(生口) 4인, 여자 생구 6인 그리고 반포(斑布)주 009
각주 009)
斑布:무명의 일종이라는 주장과 얼룩얼룩한 무늬가 있는 베라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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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필(匹)2장(丈)주 010
각주 010)
匹:動物의 수나 織物의 길이를 計量하는 중국 고대의 量詞이다. 여기에서는 당연히 후자에 해당된다. 중국 고대에 織物의 폭은 얼마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길이는 비단 1匹=4丈=40尺이었고, 2匹 2丈은 100척이 된다. 1尺=23.5cm이므로(丘光明, 1992:520), 전체는 23.5m에 이른다. 한편 靜岡縣 白岩遺跡에서는 자아낸 실을 감는 얼레가 발굴되었는데 그 길이가 72.6cm로 魏晉尺의 3척에 해당하였다. 그래서 당시 일본에 尺을 단위로 하였을 가능성이 지적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2필 2장의 길이에 대하여 “왜에서 바친 물품의 길이가 위나라의 단위로 환산해서 2丈의 나머지가 생겼다.”는 견해가 있었으나, 『漢書』 食貨志에 따르면 “布帛은 2척 2촌을 폭으로 하고 길이는 4장을 필로 한다.”고 하였으며, 2필 2장이 100척이 되는 사실로 미루어, 왜가 위와 같은 척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森浩一, 1985: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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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들고 왔다. 네가 있는 곳은 대단히 먼데도, 사신을 파견하여 공헌(貢獻)하였다. 이는 너의 충성(忠誠)과 효심(孝心)이니, 나는 너를 심히 어여쁘게 여기노라. 이제 너를 친위왜왕(親魏倭王)으로 삼고, 금인자수(金印紫綬)주 011
각주 011)
金印紫綬:금으로 만든 인장(金印)과 자주색의 도장끈(紫綬)을 합한 것을 말하고, ‘金章紫綬’라고도 한다. 秦漢時代에는 丞相, 三公 그리고 列侯 등 高官들이 佩用하였다. 後世에는 帝王들이 이것을 高官으로서 退職하는 자와 後宮의 妃嬪들에게 하사하였다(徐連達, 1991:633).
한편 1784년 현재의 福岡市 志賀島에서 백성인 甚兵衛라는 사람이 ‘漢委奴國王’이라는 인문을 가진 금인을 발견하였다. 이는 ‘漢의 倭(委) 奴國王’이라는 뜻으로, 후한 광무제가 57년에 조공해 온 왜노국에게 내린 인수로 보고 있다. 『後漢書』에서는 印綬를 주었다고만 기록하였고, 도장의 재질에나 수실의 색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金印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奴國王에게도 ‘金印紫綬’가 하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인의 크기는 한 변이 2.34cm이며, 높이는 2.23cm이다. 한 변의 길이는 당시 한 대의 1寸에 대응하는 것이다.
후한의 황제가 이민족에게 金印紫綬를 내린 사례는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먼 곳에 있는 나라가 조공한 경우, ② 한에 귀순한 경우, ③ 군사적인 측면에서 공로가 있는 경우, ④ 많은 군사를 이끌고 항복한 경우. 실제 사례로 보면 122년 西羌王 麻奴가 부족 3, 000여 호를 이끌고 한에 항복하였을 때 금인자수를 내렸다. 이 경우는 ④의 경우에 해당한다. 한편 먼 곳에 있는 나라가 조공한 경우로는 버마의 撣國, 스리랑카로 추정되는 葉調國의 예를 들 수 있다.
한편 금인의 손잡이부분(鈕)은 蛇鈕, 즉 뱀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晉이 주변의 이민족들에게 준 인장에는 虺鈕가 있는데, 이는 남쪽 지역에 뱀이 많기 때문에 그 지역적인 특징을 살려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雲南省 昆明市 晉寧縣 石寨山古墳에서 蛇鈕金印이 출토되어 蛇鈕가 남쪽의 이민족에게 사여된 것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인문은 ‘滇王之印’이었다. 그 밖에도 蛇鈕銅印의 예로는 京都 有鄰館이 소장하고 있는 ‘蠻夷里長’과 ‘晉蠻夷率善仟長’ 동인과 大谷大學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晉蠻夷率善邑長’과 ‘晉蠻夷率善佰長’ 銅印 등이 있다. 漢·魏·晉代의 인장으로는 ‘廣陵王璽’라는 인문을 가진 龜鈕金印(江蘇省 邗江縣 甘泉 2호분, 한 대), ‘魏率善氐仟長’이라는 인문을 가진 駝鈕銅印(陝西省 扶豊縣), ‘晉歸義羌侯’라는 인문을 가진 羊鈕金印 등이 있는데, 여러 가지 동물을 손잡이부분에 표현하였다. 氐는 낙타와 양, 羌은 양에 대응시키고 있다. 낙타는 그 밖에도 흉노, 선비, 오환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평양의 정백리에서 발굴된 전한 말의 토광묘에서 나온 ‘夫租薉君’의 銀印도 역시 낙타鈕이다. 같은 東夷면서도 濊는 낙타, 倭는 뱀으로 대응시킨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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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수여하노라. [그것들을] 장봉(裝封)하여 대방태수(帶方太守)에게 보내어 수여토록 하겠다. 너는 너의 나라 사람[種人]들을 편안하게 하고 어루만져주며, 주 012
각주 012)
中華書局標에서는 원래 “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 其綏撫種人, 勉爲孝順”으로 표정하였으나, 일본의 石原道博(2005:51)은 “裝封付帶方太守假授, 汝其綏撫種人, 勉爲孝順”으로 보았다. 여기에서는 石原道博의 방법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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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에게] 효순(孝順)하는 데 힘쓰도록 하라. 네가 보낸 사신 난승미(難升米)[도시]우리(都市牛利)는 먼 곳을 건너오느라 길에서 부지런히 힘썼으니, 이제 [짐은] 난승미를 솔선중랑장(率善中郞將)주 013
각주 013)
率善中郞將:中郞將은 秦代에 처음 설치된 관직으로 郎中領의 屬官이었다. 三署郞을 거느리고 宿衛하면서 宮殿과 後宮의 門戶를 지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前漢 역시 秦의 제도를 계승하여 이 관직을 설치하였는데, 光祿勳이 이들을 다스렸다. 후한은 동, 서, 남, 북, 4中郞將을 增置하였다. 또 虎賁中郞將과 羽林中郞將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使匈奴中郞將’과 같이 임시로 설치된 중랑장이 있었는데, 이들을 雜中郞將이라고 하였고, 率善中郞將도 그 중 하나이다.
秩祿은 比二千石이고, 그 지위는 將軍 다음이었다. 魏晉王朝 이후에는 지방에서 각각 스스로 官署와 官號를 설치하였는데, 中郞將이란 官號가 가장 많았다. 隋代에는 ‘中’자를 避諱하여 郞將으로 줄였다. 唐代에 다시 中郞將을 설치하고, 이들을 諸衛의 大將軍과 將軍에 예속시켰다(徐連達, 1991:186).
그 밖에 率善이라는 용어를 쓴 사례는 〈馬韓條〉에서 “그 관직에 魏의 率善邑君, 歸義侯, 中郞將, 都尉, 佰長이 있다.”고 한 곳에서 보인다. 率善이라는 문자를 가진 魏印으로는 大谷大學 禿庵文庫컬렉션에 ‘魏率善氐邑長’, ‘魏鮮卑率善仟長’ 등의 駝鈕銅印이 있다(森浩一, 198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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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도시]우리를 솔선교위(率善校尉)주 014
각주 014)
率善校尉:校尉는 戰國時代부터 있었으며 본래는 전투부대의 隊長이었다. 그러나 한대에 들어서 禁衛軍의 將領으로, 武帝의 치세에 8校尉를 설치하였고, 그 지위는 대략 將軍 다음이었다. 둘째로 校尉는 중국 변경의 異民族을 장악하여 감독하는 군정장관을 가리킨다. 이런 임무를 띤 교위는 漢代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는데, 예를 들면, 戌己校尉, 護烏丸校尉, 護羌校尉 등이 이에 해당한다. 魏晉時代(220~317)와 南朝時代(317~589)에도 漢代의 제도를 본받아서 校尉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校尉를 폐지하거나 刺史로 명칭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때에는 刺史가 校尉를 겸직하는 경우도 있었다, 셋째로 校尉는 軍府官이었다. 唐代에는 府兵軍府를 折衷府라고 하였다. 그 編制로서 團, 旅, 隊, 火가 있었다. 200人을 1團으로 삼고, 校尉를 설치하여 그들을 統領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校尉는 團主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 임무는 1團 府兵을 훈련시켜서, 순번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京師를 宿衛하거나 변경지대를 守備하였다. 마지막으로 校尉는 武散官 品階였다. 隋唐時代 이후, 校尉를 武散官으로 삼았는데, 品階는 6品~9品으로 동일하지 않았다. 淸代에는 8품 이하의 武散官을 校尉라고 하였다. 넷째로 校尉는 衛士였다. 明代에는 錦衣衛의 衛士를 校尉라고 불렀다(徐連達, 1991:809~810). 여기에서 校尉는 둘째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秩祿은 中郞將과 마찬가지로 比二千石으로, 郡太守 등의 秩祿 二千石에 비견되는 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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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고, [그들에게] 은인청수(銀印靑綬)주 015
각주 015)
銀印靑綬:은으로 만든 인장(金印)과 청색의 도장끈(靑綬)을 합한 것을 가리킨다. 아울러 漢代에 秩祿 中二千石의 卿官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중앙의 御史大夫, 九卿, 中尉(執金吾), 內史(京兆尹, 左馮翊), 主爵中尉(右扶風), 司隷校尉, 城門校尉, 京師八校尉 그리고 지방의 郡 太守와 王國(侯國)의 相이 모두 銀印靑綬를 패용하였다(臧云浦 외 2인, 1991:67~68 및 徐連達, 1991:914). 綬는 길고 폭이 넓은 비단으로 만든 매듭으로, 한쪽 끝은 허리띠에 묶고, 다른 끝은 도장에 묶어 품안에 넣는다. 『後漢書』 「輿服志」에 따르면 天子는 黃赤綬, 諸侯王은 赤綬, 諸國의 貴人과 相國은 綠綬, 公侯·將軍은 紫綬, 九卿·中二千石은 靑綬, 千石·六百石은 黑綬를 쓰며, 각각 길이와 문양에도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紫綬와 靑綬는 길이가 1장 7척이다. 또한 『東觀書』에서는 後漢 光武帝가 建武 원년(25)에 정한 제도로서, 諸侯王은 金璽綟綬, 公侯에게는 金印紫綬, 九卿 등 中二千石과 君太守 등의 二千石, 校尉 中郞將 등의 比二千石에게는 銀印靑綬, 그 이하는 銅印黃綬를 준다고 하였다(森浩一, 198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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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수여하노라. 그들을 [궁궐에서] 만나서 위로하고, [물품을] 하사하여 돌려보내노라. 이제 강지교룡금(絳地交龍錦)주 016
각주 016)
絳地交龍錦:絳은 짙은 붉은색의 천을 가리키는데, 아래 裴松之의 注에 따르면 이 말은 진홍색의 두껍게 짠 비단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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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필(匹)[배송지주], 강지추속계(絳地縐粟罽)주 017
각주 017)
絳地縐粟罽:진홍색 비단으로 짠 絨緞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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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張), 천강(蒨絳)주 018
각주 018)
蒨絳:선홍색의 비단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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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필, 감청(紺靑)주 019
각주 019)
紺靑:고운 남빛을 띤 비단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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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필로써, 네가 공물로 헌납한 [물품의] 값에 보답하겠다. 또 특별히 너에게 감지구문금(紺地句文錦)주 020
각주 020)
위에서 언급한 裴松之의 주장에 따르면, ‘紺地句文錦’은 ‘紺綈句文錦’이 될 것이다.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감색의 두텁게 짠 비단으로 문장이 씌어진 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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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필, 세반화계(細班華罽)주 021
각주 021)
細班華罽:가는 무늬가 화려한 絨緞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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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금(金) 8량(兩), 주 022
각주 022)
삼국시대에 1兩은 13.8g 정도였다. 따라서 8兩은 약 110g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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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척도(五尺刀)주 023
각주 023)
五尺刀는 물론 길이가 5尺인 칼일 것이다. 삼국시대에 1尺 24.2cm 정도였으므로, 5척은 약 120cm, 즉 1m 20cm 정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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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구(口), 동경(銅鏡) 100매(枚), 주 024
각주 024)
이때 魏가 하사한 동경은 三角緣神獸鏡으로 생각된다. 전방후원분으로 대표되는 고분시대의 개시기에 해당하는 고분에서 이러한 삼각연신수경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王仲殊는 삼각연신수경이 吳의 장인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현장에서 제작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으나(王仲殊, 1981) 삼각연신수경에 魏의 正始 元年(240)이라는 명문을 기록한 예가 있는가 하면, 紐孔의 형태가 長方形으로 한정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魏에서 특별히 주문한 거울로 보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福永信裁, 1998). 아울러 중국 河北省 易縣에서 채집된 동경의 ‘吾作明竟甚獨奇 宜子孫富無訾’라는 명문이 일본 靜岡縣 松林山古墳에서 출토된 삼각연신수경의 명문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례도 확인되고 있다. 현재 삼각연신수경이 출토된 고분은 230기 이상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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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眞珠)와 연단(鉛丹)주 025
각주 025)
鉛丹:鈆丹으로도 쓴다. 道敎에서는 납[鉛]을 불에 달구어서 정련하면 丹이 된다고 한다. 丹은 곡물 대용으로 먹을 수 있으며, 이것을 먹으면 長壽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현대에는 일종의 無機化合物로서, 分子式은 Pb3O4이고, 鮮紅色의 粉末을 가리킨다. 축전지, 유리, 도자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고, 아울러 이것으로 顔料와 消毒劑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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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50근(斤)주 026
각주 026)
斤:삼국시대에 1斤은 220g 정도였다. 따라서 50근은 11, 000g, 즉 11kg 정도라고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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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사할 것이고, [이것들] 모두를 포장해서 봉하여 난승미[도시]우리에게 부친다. [그들이] 귀환하면 [여기에] 기재된 그대로 받을 것이다. [이것들] 모두는 너의 국중(國中) 사람들에게 보여라. [그리하여 그들에게] 국가(國家)주 027
각주 027)
國家:魏나라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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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너를 어여쁘게 여기는 것을 알게 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정중하게 너에게 좋은 물품들을 사여(賜與)하노라.”

  • 각주 001)
    “景初二年”은 ‘景初三年’(239)의 誤記이다. 왜냐하면 『日本書紀』에 인용된 『魏志』와 『梁書』는 모두 “三年”으로 기재하였기 때문이다(石原道博, 2005:50). 景初 2년까지 약 50년간, 公孫氏가 요동에서 세력을 떨쳐 일시적으로는 독립하여 燕王을 자칭하였으므로, 왜국의 사자는 魏에 갈 수 없었다. 景初 3년 정월에 이르러 위는 본격적으로 공손씨를 공격하여 8월에 이르러서 드디어 승리를 거두고, 요동에서 낙랑, 대방에 이르는 지역을 위의 지배로 편입하였다. 이처럼 景初 3년에 요동, 낙랑 등 5군이 平州로 편제되어 위의 땅이 되면서, 왜국은 직접 위에 사자를 파견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森浩一, 1985: 14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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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難升米:內藤虎次郞에 따르면, 難升米는 垂仁朝(전29~70)에 常世란 나라에 使臣으로 파견되었다가 景行朝(71~130)에 귀국한 田道間守(다지마모리)라고 한다(石原道博, 20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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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太守:본래 戰國時代에 郡守의 존칭이었다. 前漢 景帝 中元 2年(전142)에 郡守를 太守로 바꾸었다. 이후 역대에 太守가 설치되었으나, 南北朝時代(317~589)에 州를 설치하는 것이 점차 많아지면서 郡의 境域은 갈수록 더욱 축소되었다. 마침내 州와 郡은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隋初에 처음으로 州를 폐지하고 군을 존치하였다. 이후 隋 煬帝와 唐 玄宗 때 州를 郡으로 개칭하였고, 郡에는 太守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唐 肅宗이후에 太守는 正式 官名이 되지 못하였고, 단지 刺史 혹은 知府의 別稱이 되었다. 明淸시대에는 太守는 知府의 尊稱으로 바뀌었다(臧云浦 외 2인, 19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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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三國志』 〈韓條〉에 “景初 중에 明帝가 몰래 帶方太守 劉昕과 樂浪太守 鮮于嗣를 보내어 바다 건너 2군을 정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보이는 유흔과 같은 인물이 가능성이 있다(森浩一, 198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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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魏가 外臣에게 수여하는 작위 중에서 “親魏倭王”은 가장 높은 것 중 하나였다. 이보다 10년 전인 太和 3년(229)에 명제는 서쪽의 대국인 大月氏(쿠샨왕국) 국왕 波調를 ‘親魏大月氏王’에 임명하였다. 왜국과 대월지국은 모두 여러 나라가 종속되어 있으므로, 大庭修는 “魏王朝의 外蕃政策은 몇 개의 나라를 통속하고 있는 국왕에게 ‘親魏某王’이라는 왕호를 주어 관계를 맺은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森浩一, 198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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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制詔:詔書와 같은 뜻으로서 “조서를 내린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史書 등에서 詔勅을 인용하는 경우, 대부분 ‘制詔’라는 부분은 생략되는데, 卑彌呼에 대한 조칙에서는 이 부분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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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이 문장의 “次使”란 단어를 단서로 삼아서 유추하면, 倭의 大夫 難升米는 ‘正使’에 해당하고 次使 都市牛利는 副使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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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都市牛利:內藤虎次郞의 주장에 따르면, 都市는 즈시(出石)를 나타내며, 淡路津名郡의 都志(豆之)도 但馬의 出石과 관계가 있으므로, 이즈시의 略字라고 한다. 牛利는 고리(心)란 뜻으로서 出石心(이즈시고리), 즉 都市牛利란 사람 이름일 것이라고 한다. 上田正昭는 都市牛利가 牛利로만 기록되기도 한 사실에 주목하여, 都市는 都護, 都司, 都水처럼 시를 관장하는 관직명으로 이해하였다(上田正昭, 1999:29). 또 伊佐我命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出雲의 都我利神社의 都我利일 가능성도 제기되어 있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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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斑布:무명의 일종이라는 주장과 얼룩얼룩한 무늬가 있는 베라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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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匹:動物의 수나 織物의 길이를 計量하는 중국 고대의 量詞이다. 여기에서는 당연히 후자에 해당된다. 중국 고대에 織物의 폭은 얼마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길이는 비단 1匹=4丈=40尺이었고, 2匹 2丈은 100척이 된다. 1尺=23.5cm이므로(丘光明, 1992:520), 전체는 23.5m에 이른다. 한편 靜岡縣 白岩遺跡에서는 자아낸 실을 감는 얼레가 발굴되었는데 그 길이가 72.6cm로 魏晉尺의 3척에 해당하였다. 그래서 당시 일본에 尺을 단위로 하였을 가능성이 지적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2필 2장의 길이에 대하여 “왜에서 바친 물품의 길이가 위나라의 단위로 환산해서 2丈의 나머지가 생겼다.”는 견해가 있었으나, 『漢書』 食貨志에 따르면 “布帛은 2척 2촌을 폭으로 하고 길이는 4장을 필로 한다.”고 하였으며, 2필 2장이 100척이 되는 사실로 미루어, 왜가 위와 같은 척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森浩一, 1985: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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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金印紫綬:금으로 만든 인장(金印)과 자주색의 도장끈(紫綬)을 합한 것을 말하고, ‘金章紫綬’라고도 한다. 秦漢時代에는 丞相, 三公 그리고 列侯 등 高官들이 佩用하였다. 後世에는 帝王들이 이것을 高官으로서 退職하는 자와 後宮의 妃嬪들에게 하사하였다(徐連達, 1991:633).
    한편 1784년 현재의 福岡市 志賀島에서 백성인 甚兵衛라는 사람이 ‘漢委奴國王’이라는 인문을 가진 금인을 발견하였다. 이는 ‘漢의 倭(委) 奴國王’이라는 뜻으로, 후한 광무제가 57년에 조공해 온 왜노국에게 내린 인수로 보고 있다. 『後漢書』에서는 印綬를 주었다고만 기록하였고, 도장의 재질에나 수실의 색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金印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奴國王에게도 ‘金印紫綬’가 하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인의 크기는 한 변이 2.34cm이며, 높이는 2.23cm이다. 한 변의 길이는 당시 한 대의 1寸에 대응하는 것이다.
    후한의 황제가 이민족에게 金印紫綬를 내린 사례는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먼 곳에 있는 나라가 조공한 경우, ② 한에 귀순한 경우, ③ 군사적인 측면에서 공로가 있는 경우, ④ 많은 군사를 이끌고 항복한 경우. 실제 사례로 보면 122년 西羌王 麻奴가 부족 3, 000여 호를 이끌고 한에 항복하였을 때 금인자수를 내렸다. 이 경우는 ④의 경우에 해당한다. 한편 먼 곳에 있는 나라가 조공한 경우로는 버마의 撣國, 스리랑카로 추정되는 葉調國의 예를 들 수 있다.
    한편 금인의 손잡이부분(鈕)은 蛇鈕, 즉 뱀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晉이 주변의 이민족들에게 준 인장에는 虺鈕가 있는데, 이는 남쪽 지역에 뱀이 많기 때문에 그 지역적인 특징을 살려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雲南省 昆明市 晉寧縣 石寨山古墳에서 蛇鈕金印이 출토되어 蛇鈕가 남쪽의 이민족에게 사여된 것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인문은 ‘滇王之印’이었다. 그 밖에도 蛇鈕銅印의 예로는 京都 有鄰館이 소장하고 있는 ‘蠻夷里長’과 ‘晉蠻夷率善仟長’ 동인과 大谷大學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晉蠻夷率善邑長’과 ‘晉蠻夷率善佰長’ 銅印 등이 있다. 漢·魏·晉代의 인장으로는 ‘廣陵王璽’라는 인문을 가진 龜鈕金印(江蘇省 邗江縣 甘泉 2호분, 한 대), ‘魏率善氐仟長’이라는 인문을 가진 駝鈕銅印(陝西省 扶豊縣), ‘晉歸義羌侯’라는 인문을 가진 羊鈕金印 등이 있는데, 여러 가지 동물을 손잡이부분에 표현하였다. 氐는 낙타와 양, 羌은 양에 대응시키고 있다. 낙타는 그 밖에도 흉노, 선비, 오환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평양의 정백리에서 발굴된 전한 말의 토광묘에서 나온 ‘夫租薉君’의 銀印도 역시 낙타鈕이다. 같은 東夷면서도 濊는 낙타, 倭는 뱀으로 대응시킨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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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中華書局標에서는 원래 “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 其綏撫種人, 勉爲孝順”으로 표정하였으나, 일본의 石原道博(2005:51)은 “裝封付帶方太守假授, 汝其綏撫種人, 勉爲孝順”으로 보았다. 여기에서는 石原道博의 방법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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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率善中郞將:中郞將은 秦代에 처음 설치된 관직으로 郎中領의 屬官이었다. 三署郞을 거느리고 宿衛하면서 宮殿과 後宮의 門戶를 지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前漢 역시 秦의 제도를 계승하여 이 관직을 설치하였는데, 光祿勳이 이들을 다스렸다. 후한은 동, 서, 남, 북, 4中郞將을 增置하였다. 또 虎賁中郞將과 羽林中郞將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使匈奴中郞將’과 같이 임시로 설치된 중랑장이 있었는데, 이들을 雜中郞將이라고 하였고, 率善中郞將도 그 중 하나이다.
    秩祿은 比二千石이고, 그 지위는 將軍 다음이었다. 魏晉王朝 이후에는 지방에서 각각 스스로 官署와 官號를 설치하였는데, 中郞將이란 官號가 가장 많았다. 隋代에는 ‘中’자를 避諱하여 郞將으로 줄였다. 唐代에 다시 中郞將을 설치하고, 이들을 諸衛의 大將軍과 將軍에 예속시켰다(徐連達, 1991:186).
    그 밖에 率善이라는 용어를 쓴 사례는 〈馬韓條〉에서 “그 관직에 魏의 率善邑君, 歸義侯, 中郞將, 都尉, 佰長이 있다.”고 한 곳에서 보인다. 率善이라는 문자를 가진 魏印으로는 大谷大學 禿庵文庫컬렉션에 ‘魏率善氐邑長’, ‘魏鮮卑率善仟長’ 등의 駝鈕銅印이 있다(森浩一, 198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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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率善校尉:校尉는 戰國時代부터 있었으며 본래는 전투부대의 隊長이었다. 그러나 한대에 들어서 禁衛軍의 將領으로, 武帝의 치세에 8校尉를 설치하였고, 그 지위는 대략 將軍 다음이었다. 둘째로 校尉는 중국 변경의 異民族을 장악하여 감독하는 군정장관을 가리킨다. 이런 임무를 띤 교위는 漢代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는데, 예를 들면, 戌己校尉, 護烏丸校尉, 護羌校尉 등이 이에 해당한다. 魏晉時代(220~317)와 南朝時代(317~589)에도 漢代의 제도를 본받아서 校尉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校尉를 폐지하거나 刺史로 명칭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때에는 刺史가 校尉를 겸직하는 경우도 있었다, 셋째로 校尉는 軍府官이었다. 唐代에는 府兵軍府를 折衷府라고 하였다. 그 編制로서 團, 旅, 隊, 火가 있었다. 200人을 1團으로 삼고, 校尉를 설치하여 그들을 統領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校尉는 團主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 임무는 1團 府兵을 훈련시켜서, 순번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京師를 宿衛하거나 변경지대를 守備하였다. 마지막으로 校尉는 武散官 品階였다. 隋唐時代 이후, 校尉를 武散官으로 삼았는데, 品階는 6品~9品으로 동일하지 않았다. 淸代에는 8품 이하의 武散官을 校尉라고 하였다. 넷째로 校尉는 衛士였다. 明代에는 錦衣衛의 衛士를 校尉라고 불렀다(徐連達, 1991:809~810). 여기에서 校尉는 둘째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秩祿은 中郞將과 마찬가지로 比二千石으로, 郡太守 등의 秩祿 二千石에 비견되는 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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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銀印靑綬:은으로 만든 인장(金印)과 청색의 도장끈(靑綬)을 합한 것을 가리킨다. 아울러 漢代에 秩祿 中二千石의 卿官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중앙의 御史大夫, 九卿, 中尉(執金吾), 內史(京兆尹, 左馮翊), 主爵中尉(右扶風), 司隷校尉, 城門校尉, 京師八校尉 그리고 지방의 郡 太守와 王國(侯國)의 相이 모두 銀印靑綬를 패용하였다(臧云浦 외 2인, 1991:67~68 및 徐連達, 1991:914). 綬는 길고 폭이 넓은 비단으로 만든 매듭으로, 한쪽 끝은 허리띠에 묶고, 다른 끝은 도장에 묶어 품안에 넣는다. 『後漢書』 「輿服志」에 따르면 天子는 黃赤綬, 諸侯王은 赤綬, 諸國의 貴人과 相國은 綠綬, 公侯·將軍은 紫綬, 九卿·中二千石은 靑綬, 千石·六百石은 黑綬를 쓰며, 각각 길이와 문양에도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紫綬와 靑綬는 길이가 1장 7척이다. 또한 『東觀書』에서는 後漢 光武帝가 建武 원년(25)에 정한 제도로서, 諸侯王은 金璽綟綬, 公侯에게는 金印紫綬, 九卿 등 中二千石과 君太守 등의 二千石, 校尉 中郞將 등의 比二千石에게는 銀印靑綬, 그 이하는 銅印黃綬를 준다고 하였다(森浩一, 198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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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絳地交龍錦:絳은 짙은 붉은색의 천을 가리키는데, 아래 裴松之의 注에 따르면 이 말은 진홍색의 두껍게 짠 비단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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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絳地縐粟罽:진홍색 비단으로 짠 絨緞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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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蒨絳:선홍색의 비단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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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紺靑:고운 남빛을 띤 비단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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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위에서 언급한 裴松之의 주장에 따르면, ‘紺地句文錦’은 ‘紺綈句文錦’이 될 것이다.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감색의 두텁게 짠 비단으로 문장이 씌어진 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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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細班華罽:가는 무늬가 화려한 絨緞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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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삼국시대에 1兩은 13.8g 정도였다. 따라서 8兩은 약 110g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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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五尺刀는 물론 길이가 5尺인 칼일 것이다. 삼국시대에 1尺 24.2cm 정도였으므로, 5척은 약 120cm, 즉 1m 20cm 정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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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이때 魏가 하사한 동경은 三角緣神獸鏡으로 생각된다. 전방후원분으로 대표되는 고분시대의 개시기에 해당하는 고분에서 이러한 삼각연신수경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王仲殊는 삼각연신수경이 吳의 장인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현장에서 제작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으나(王仲殊, 1981) 삼각연신수경에 魏의 正始 元年(240)이라는 명문을 기록한 예가 있는가 하면, 紐孔의 형태가 長方形으로 한정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魏에서 특별히 주문한 거울로 보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福永信裁, 1998). 아울러 중국 河北省 易縣에서 채집된 동경의 ‘吾作明竟甚獨奇 宜子孫富無訾’라는 명문이 일본 靜岡縣 松林山古墳에서 출토된 삼각연신수경의 명문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례도 확인되고 있다. 현재 삼각연신수경이 출토된 고분은 230기 이상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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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鉛丹:鈆丹으로도 쓴다. 道敎에서는 납[鉛]을 불에 달구어서 정련하면 丹이 된다고 한다. 丹은 곡물 대용으로 먹을 수 있으며, 이것을 먹으면 長壽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현대에는 일종의 無機化合物로서, 分子式은 Pb3O4이고, 鮮紅色의 粉末을 가리킨다. 축전지, 유리, 도자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고, 아울러 이것으로 顔料와 消毒劑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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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斤:삼국시대에 1斤은 220g 정도였다. 따라서 50근은 11, 000g, 즉 11kg 정도라고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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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國家:魏나라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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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명제(明帝), 난승미(難升米), 유하(劉夏), 명제, 비미호(卑彌呼), 유하(劉夏), 난승미(難升米), 도시우리(都市牛利), 난승미(難升米), [도시]우리(都市牛利), 난승미, [도시]우리, 배송지, 난승미, [도시]우리
지명
위(魏), 왜(倭), [대방]군, 대방군, , , 대방군, 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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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미호(卑彌呼)가 명제(明帝)에게 난승미(難升米)와 도시우리(都市牛利)를 보내니 명제가 물건과 작위를 하사함 자료번호 : jo.k_0004_0030_004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