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미호(卑彌呼)가 왕으로 추대됨
그 나라도 본래 남자를 왕으로 삼았으나, 주 00170년~80년이 지나자주 002
각주 002)
왜국에서 난리가 일어나서주 003帥升이 生口를 바친 107년에 70~80년을 더하면 180년을 전후한 시기가 된다. 『後漢書』에서는 倭國大亂의 시기를 “桓靈之間”, 즉 桓帝와 靈帝 무렵이라고 하였으며, 『太平御覽』에 인용된 『魏志』에서는 “漢 靈帝의 光和中”, 즉 178~183년 사이라고 하였다(森浩一, 1985:137). 『梁書』와 『北史』에서도 “光和年中”이라고 하였다. 桓帝는 후한의 제11대 황제로 이름은 劉志이고, 치세기간은 146~167년이다. 靈帝는 후한의 제12대 황제로 이름은 劉宏이고, 치세기간은 167~189년의 22년간이다. 따라서 시기적으로는 靈帝의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桓靈之間”은 중국에서 혼란의 시기를 나타내는 용어로 자주 사용되므로, 『後漢書』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각주 003)
서로 공벌(攻伐)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주 004倭國亂:180년대를 중심으로 九州地域에서 關東地域에 걸쳐서 발생하였던 大亂을 말한다. 이 대란의 흔적을 고고학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北部九州 내부에서 전쟁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고, 北部九州에서 東部九州를 잇는 지역에서 봉수대를 포함하는 高地性 集落이 조성되었다. 이는 동쪽 즉 畿內와 瀨戶內 등으로부터의 군사적 압박에 대하여 北部九州가 대비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瀨戶內 연안부에서도 바다에 면한 高地性 集落이 조성된 예가 많다. 또한 2세기 말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奈良縣 櫻井市의 纏向遺跡에서는 동쪽으로는 關東에서, 서쪽으로는 北部九州에서 반입된 토기가 전체 토기의 15%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 유적이 이 시기에 九州에서 關東에 이르는 인적·물적 교류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유적 주변에는 前方後圓墳의 祖形으로 간주되는 纏向石塚 및 호케노야마고분, 그리고 가장 오래된 전방후원분으로 추정되는 箸墓古墳 등이 위치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濃尾平野를 중심으로 한 일본 中部(東海)地域은 彌生時代 중기까지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1세기 말에 銅鐸(말방울과 같은 실용적인 도구에서 기원한 청동기)이 급격하게 대형화되고 祭器로서 사용된다. 그러한 銅鐸에는 近畿式과 三遠式이 있는데 東海地域은 三遠式 동탁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2세기 말이 되면 三遠式 銅鐸은 사라지고, 이 지역에서 銅鐸을 생산하던 사람들은 畿內式 銅鐸의 생산조직에 흡수되고 近畿式 銅鐸만 제작된다. 이는 中部地域의 자립성이 畿內勢力에 의하면 부정되었음을 상징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彌生時代 후기에 關東地域의 개발이 활발해지고, 각지에서 환호집락이 격증한다. 이러한 집락에서는 東海系 土器가 대량으로 출토되는데, 이는 關東地域의 개발에 東海地域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깊이 관여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시기에 關東地域에서 군사적인 긴장이 고조되었던 사실도 확인된다.
이처럼 2세기 말엽에 해당하는 彌生時代 후기 왜인 사회에서는 관동에서 북부 구주에 걸친 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國立歷史民俗博物館編, 1996:180~181).
18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北部九州 내부에서 전쟁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고, 北部九州에서 東部九州를 잇는 지역에서 봉수대를 포함하는 高地性 集落이 조성되었다. 이는 동쪽 즉 畿內와 瀨戶內 등으로부터의 군사적 압박에 대하여 北部九州가 대비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瀨戶內 연안부에서도 바다에 면한 高地性 集落이 조성된 예가 많다. 또한 2세기 말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奈良縣 櫻井市의 纏向遺跡에서는 동쪽으로는 關東에서, 서쪽으로는 北部九州에서 반입된 토기가 전체 토기의 15%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 유적이 이 시기에 九州에서 關東에 이르는 인적·물적 교류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유적 주변에는 前方後圓墳의 祖形으로 간주되는 纏向石塚 및 호케노야마고분, 그리고 가장 오래된 전방후원분으로 추정되는 箸墓古墳 등이 위치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濃尾平野를 중심으로 한 일본 中部(東海)地域은 彌生時代 중기까지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1세기 말에 銅鐸(말방울과 같은 실용적인 도구에서 기원한 청동기)이 급격하게 대형화되고 祭器로서 사용된다. 그러한 銅鐸에는 近畿式과 三遠式이 있는데 東海地域은 三遠式 동탁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2세기 말이 되면 三遠式 銅鐸은 사라지고, 이 지역에서 銅鐸을 생산하던 사람들은 畿內式 銅鐸의 생산조직에 흡수되고 近畿式 銅鐸만 제작된다. 이는 中部地域의 자립성이 畿內勢力에 의하면 부정되었음을 상징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彌生時代 후기에 關東地域의 개발이 활발해지고, 각지에서 환호집락이 격증한다. 이러한 집락에서는 東海系 土器가 대량으로 출토되는데, 이는 關東地域의 개발에 東海地域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깊이 관여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시기에 關東地域에서 군사적인 긴장이 고조되었던 사실도 확인된다.
이처럼 2세기 말엽에 해당하는 彌生時代 후기 왜인 사회에서는 관동에서 북부 구주에 걸친 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國立歷史民俗博物館編, 1996:180~181).
각주 004)
마침내 모두 함께 한 여자를 추대하여주 005왕으로 삼았는데, 이름은 비미호(卑彌呼)
주 006왜국의 大亂이 끝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는 奈良縣 天理市 東大寺古墳에서 출토된 ‘中平刀’가 있다. 이 칼의 명문에는 “中平□□ 五月丙午 造作文刀 百鍊精剛 上應星宿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中平은 184~189년이다. 중국 사서에는 이 기간에 왜국이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왜국의 대란이 종결된 이후 왜국왕이 후한에 사신을 보냈고 그 사절에게 하사한 검으로 볼 수 있다(國立歷史民俗博物館編, 1996:182). 그렇다면 光和 연간의 왜국대란은 오래 지속된 것이 아니라 中平 연간에는 이미 종결된 셈이다.
각주 006)
라고 한다. [그녀는] 귀도(鬼道)주 007卑彌呼:‘히미코’(ヒミコ, 日命, 日尊이란 자의 略稱) 또는 ‘히메코’(ヒメコ, 姬子)라고 읽는다. 新井白石은 ‘日御子’로서 天皇으로 간주하고 있다(『古史通或問』). 大和說에서는 『日本書紀』에 기재되어 있는 神功皇后, 倭姬命 그리고 崇神天皇의 여동생 倭迹迹日百襲姬命(笠井新也) 등에 비정되고 있고, 九州說에서는 熊襲女酋, 『日本書紀』 神代卷에 보이는 火之戶幡姬兒千千姬命 및 萬幡姬兒玉依姬命 그리고 土蜘蛛田油津媛의 先代 등으로 비정되고 있다. 더불어서 那珂通世와 白鳥庫吉 등의 지지를 받는 熊襲 혹은 隼人族의 女酋란 설도 있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9~50).
각주 007)
를 섬겨서, 능히 무리를 미혹하며, 나이가 이미 많았음에도 지아비가 없고, 남동생[男弟]주 008이 있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비미호가] 왕이 된 이래, [그녀를] 본 자가 적었다. [그녀는] 여자 종[婢] 1천 명으로써 자신을 모시도록 하였으며, 오직 남자 1명이 있어서, [그는] 음식을 올리거나 말을 전달하러 출입하였다.주 009궁실(宮室)과 누관(樓觀)에 거처하였고, [주변에는] 성책(城柵)주 010이 엄중하게 설치되어 있고, 항상 병기(兵器)를 지닌 사람이 있어서 [그녀를] 지켰다.鬼道:일반적으로 ‘惑世誣民하는 術法’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넓게는 중국의 신선사상, 보다 직접적으로는 후한 말에 유행하였던 張魯의 五斗米道와도 일정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三國志』 「張魯傳」에서는 漢中地域에서 교세를 떨쳤던 張魯에 대하여, “魯는 漢中에 거점을 두고, 鬼道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스스로 師君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森浩一, 1985:137).
한편 魏가 여왕에게 하사한 동경은 三角緣神獸鏡인데, 이 거울은 神仙과 상서로운 동물을 배치한 道敎的인 성격의 거울이다. 이전 시대까지 일본열도에서 제기로 사용된 銅鐸을 대신하여 銅鏡이 새로운 祭儀 특히 葬送儀禮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 무렵 일본열도의 수장층들이 신선사상을 수용하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魏가 여왕에게 하사한 동경은 三角緣神獸鏡인데, 이 거울은 神仙과 상서로운 동물을 배치한 道敎的인 성격의 거울이다. 이전 시대까지 일본열도에서 제기로 사용된 銅鐸을 대신하여 銅鏡이 새로운 祭儀 특히 葬送儀禮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 무렵 일본열도의 수장층들이 신선사상을 수용하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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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帥升이 生口를 바친 107년에 70~80년을 더하면 180년을 전후한 시기가 된다. 『後漢書』에서는 倭國大亂의 시기를 “桓靈之間”, 즉 桓帝와 靈帝 무렵이라고 하였으며, 『太平御覽』에 인용된 『魏志』에서는 “漢 靈帝의 光和中”, 즉 178~183년 사이라고 하였다(森浩一, 1985:137). 『梁書』와 『北史』에서도 “光和年中”이라고 하였다. 桓帝는 후한의 제11대 황제로 이름은 劉志이고, 치세기간은 146~167년이다. 靈帝는 후한의 제12대 황제로 이름은 劉宏이고, 치세기간은 167~189년의 22년간이다. 따라서 시기적으로는 靈帝의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桓靈之間”은 중국에서 혼란의 시기를 나타내는 용어로 자주 사용되므로, 『後漢書』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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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倭國亂:180년대를 중심으로 九州地域에서 關東地域에 걸쳐서 발생하였던 大亂을 말한다. 이 대란의 흔적을 고고학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北部九州 내부에서 전쟁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고, 北部九州에서 東部九州를 잇는 지역에서 봉수대를 포함하는 高地性 集落이 조성되었다. 이는 동쪽 즉 畿內와 瀨戶內 등으로부터의 군사적 압박에 대하여 北部九州가 대비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瀨戶內 연안부에서도 바다에 면한 高地性 集落이 조성된 예가 많다. 또한 2세기 말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奈良縣 櫻井市의 纏向遺跡에서는 동쪽으로는 關東에서, 서쪽으로는 北部九州에서 반입된 토기가 전체 토기의 15%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 유적이 이 시기에 九州에서 關東에 이르는 인적·물적 교류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유적 주변에는 前方後圓墳의 祖形으로 간주되는 纏向石塚 및 호케노야마고분, 그리고 가장 오래된 전방후원분으로 추정되는 箸墓古墳 등이 위치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濃尾平野를 중심으로 한 일본 中部(東海)地域은 彌生時代 중기까지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1세기 말에 銅鐸(말방울과 같은 실용적인 도구에서 기원한 청동기)이 급격하게 대형화되고 祭器로서 사용된다. 그러한 銅鐸에는 近畿式과 三遠式이 있는데 東海地域은 三遠式 동탁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2세기 말이 되면 三遠式 銅鐸은 사라지고, 이 지역에서 銅鐸을 생산하던 사람들은 畿內式 銅鐸의 생산조직에 흡수되고 近畿式 銅鐸만 제작된다. 이는 中部地域의 자립성이 畿內勢力에 의하면 부정되었음을 상징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彌生時代 후기에 關東地域의 개발이 활발해지고, 각지에서 환호집락이 격증한다. 이러한 집락에서는 東海系 土器가 대량으로 출토되는데, 이는 關東地域의 개발에 東海地域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깊이 관여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시기에 關東地域에서 군사적인 긴장이 고조되었던 사실도 확인된다.
이처럼 2세기 말엽에 해당하는 彌生時代 후기 왜인 사회에서는 관동에서 북부 구주에 걸친 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國立歷史民俗博物館編, 1996:180~181).
- 각주 00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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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卑彌呼:‘히미코’(ヒミコ, 日命, 日尊이란 자의 略稱) 또는 ‘히메코’(ヒメコ, 姬子)라고 읽는다. 新井白石은 ‘日御子’로서 天皇으로 간주하고 있다(『古史通或問』). 大和說에서는 『日本書紀』에 기재되어 있는 神功皇后, 倭姬命 그리고 崇神天皇의 여동생 倭迹迹日百襲姬命(笠井新也) 등에 비정되고 있고, 九州說에서는 熊襲女酋, 『日本書紀』 神代卷에 보이는 火之戶幡姬兒千千姬命 및 萬幡姬兒玉依姬命 그리고 土蜘蛛田油津媛의 先代 등으로 비정되고 있다. 더불어서 那珂通世와 白鳥庫吉 등의 지지를 받는 熊襲 혹은 隼人族의 女酋란 설도 있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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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鬼道:일반적으로 ‘惑世誣民하는 術法’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넓게는 중국의 신선사상, 보다 직접적으로는 후한 말에 유행하였던 張魯의 五斗米道와도 일정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三國志』 「張魯傳」에서는 漢中地域에서 교세를 떨쳤던 張魯에 대하여, “魯는 漢中에 거점을 두고, 鬼道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스스로 師君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森浩一, 1985:137).
한편 魏가 여왕에게 하사한 동경은 三角緣神獸鏡인데, 이 거울은 神仙과 상서로운 동물을 배치한 道敎的인 성격의 거울이다. 이전 시대까지 일본열도에서 제기로 사용된 銅鐸을 대신하여 銅鏡이 새로운 祭儀 특히 葬送儀禮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 무렵 일본열도의 수장층들이 신선사상을 수용하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색인어
- 이름
- 비미호(卑彌呼), 비미호
- 지명
- 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