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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중원과 보도근(步度根), 가비능(軻比能) 집단에 대한 관계

  • 국가
    선비(鮮卑)
선비(鮮卑)[배송지주]의 보도근(步度根) 주 001
각주 001)
步度根:檀石槐의 손자이다. 檀石槐 사후 아들인 和連이 大人이 되었으나 후에 北地郡을 공격하다 죽었고, 이에 和連의 조카 魁頭가 大人이 되었으나, 후에 和連의 아들 騫曼과 자리를 다투게 되었다. 步度根은 魁頭가 죽은 후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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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인으로] 즉위한 이후 무리들은 점차 쇠약해졌는데, 둘째 형주 002
각주 002)
원문은 “中兄”인데, ‘仲兄’과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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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라한(扶羅韓) 또한 별도로 무리 수만을 옹유(擁有)하고 대인이 되었다. 건안년간(196~220)에 태조 [조조]가 유주를 점령할 때 보도근가비능(軻比能) 등은 오환교위 염유를 통해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후에 대군오환(代郡烏丸) 능신저(能臣氐) 등이 배반하여 부라한에게 복속하기를 구하자 부라한은 만여 기(騎)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부라한이] 상건[현](桑乾縣) 주 003
각주 003)
桑乾縣:前漢時代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현재의 河北省 蔚縣 동북쪽이다. 代郡에 속하였다. 三國 曹魏시기 廢置되었다. 후에 北魏時代 다시 설치되었고, 治所는 현재 山西省 山陰縣 동쪽이다. 孝昌년간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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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을 때 능신저 등이 의논하였는데, 부라한의 집단[部]은 법령이 관대하고 해이하여 능히 다스려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사람을 보내 가비능을 불러들였다. 가비능은 곧 만여 기를 이끌고 도착하여 함께 맹서(盟誓)하기로 하였다. 가비능은 곧 모임의 장소에서 부라한을 살해하니, 부라한의 아들 설귀니(泄歸泥)와 위하의 무리들은 모두 가비능에 속하게 되었다. 가비능은 자신이 설귀니의 아버지를 살해했기 때문에 특별히 설귀니를 잘 대우해 주었다. 보도근은 이때부터 가비능에 원한을 품었다.
문제(文帝) 주 004
각주 004)
文帝(187~226;재위 220~226):이름은 曹丕, 字는 子桓이며, 曹操의 둘째 아들이다. 建安 16년(211) 五官中郞將이 되어 副丞相의 역할을 맡았다. 曹植과 후계자 자리를 다투다 승리하였다. 曹操가 죽은 후 魏王과 丞相의 지위를 계승하였고 陳羣을 吏部尙書로 삼아 九品官人法을 제정하였다. 延康元年(220) 10월 帝位에 올라 국호를 魏로 정하고 黃初로 改元하였다. 세 차례 吳를 정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廟號는 世祖이다. 曹操·曹植과 함께 ‘三曹’라 칭해진다. 『典論』을 저술하였고, 詩賦 백여 편을 지었으며, 『魏文帝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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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즉위한 후 전예(田豫)를 오환교위(烏丸校尉)에 임명함과 동시에 절(節)주 005
각주 005)
원문은 “持節”인데, 魏晉南北朝時代 都督 혹은 이민족을 관장하는 校尉의 職權을 표시하는 명칭의 하나이다. 持節은 使持節보다 낮고 假節보다 높았다. 持節은 官位가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軍事上으로는 使持節과 권한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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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지게 하였으며 함께 선비를 감독하여, 창평[현](昌平縣) 주 006
각주 006)
昌平縣:前漢時代에 설치되었다. 治所는 현재 北京城 昌平縣 동남에 해당한다. 上谷郡의 屬縣이었다. 後漢時代에는 廣陽郡에 속하였고, 후에 燕國에 속하였다. 北魏初 廢置되었다가 東魏 天平년간 다시 설치되었다. 治所를 현재의 昌平縣 서남 古城으로 옮겼고, 平昌郡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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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하게 하였다. 보도근이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니 문제보도근을 왕으로 삼았다. 후에 [보도근은] 자주 가비능과 서로 공격하였는데, 보도근의 부중이 점차 숫자가 적어지고 약해지게 되자 [이에 보도근은] 무리 만여 락을 이끌고 태원[군](太原郡)안문군(鴈門郡)을 지키고자 하였다.
보도근은 이에 사람을 보내 설귀니를 불러들이기 위해 설귀니에게 “너의 아버지는 가비능에게 죽었는데, 너는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원수의 집안에 빌붙였다. [가비능이] 지금 비록 너를 후히 대우하긴 하지만, 이는 너를 살해하려는 계책이다. [차라리] 나에게 돌아오는 것만 못하다. 나와 너는 골육(骨肉)이며 가장 가까운 친척인데, 어찌 원수와 같겠느냐?”라고 말하였다. 이를 듣고 설귀니는 부락(部落)을 이끌고 도망가 보도근에게 돌아갔다. 가비능은 이를 추격했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황초(黃初) 5년(224)에 보도근은 궁궐을 방문하여 공물을 바쳤으니, 조정에서는 후히 상사(賞賜)를 내렸다. 이후 보도근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 변방을 지켰으며 노략질로 해를 입히지 않았다. 반면 가비능의 무리는 드디어 강성해졌다.
명제(明帝) 주 007
각주 007)
明帝(205~239;재위 226~239):三國時代 曹魏의 3대 皇帝이다. 이름은 曹叡, 字는 元仲이다. 文帝의 맏아들이다. 武德侯·齊公·平原王에 봉해졌다가 黃初 7년(226)에 太子로 책봉되었고 이후 즉위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지식이 많았으며 法理에 뜻을 두고 간언을 능히 받아들였다. 늘 재판에 친히 임하였고, 大獄의 판결을 시찰하였다. 재위 초 浮華를 억제하여 太和 4년(230)에 尙書 諸葛誕과 鄧颺, 何晏 등을 면직시켰다. 靑龍년간 이후 점차 호화로운 사치에 탐닉하여 자주 요역을 일으키고 宮室을 크게 지었다. 景初 2년(238)에 司馬懿에게 군대를 이끌고 遼東郡을 정벌할 것을 명하니 司馬懿는 公孫淵을 격파하고 海東 諸郡을 평정하였다. 曹爽과 司馬懿에게 遺詔를 내려 輔政하도록 하였다. 諡號는 明帝이며, 廟號는 烈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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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즉위한 후 융적(戎狄)을 유화정책으로 안무하는데 힘쓰니 정벌(征伐)을 그치고 보도근가비능 두 집단을 기미(羈縻)할 뿐이었다. 청룡(靑龍) 원년(233)에 이르러 가비능보도근에게 화친을 맺자고 유혹하니, 이때 보도근설귀니와 휘하의 무리들을 이끌고 모두 가비능에게 보호를 구하였으며, [이에 가비능은] 병주를 침입하여 약탈하고 관리와 백성들을 살해하고 붙잡아갔다. 명제는 효기장군(驍騎將軍)주 008
각주 008)
驍騎將軍:魏晉南北朝時代 雜號將軍의 하나이다. 三國 魏시기 中軍에 驍騎將軍을 두었다. 晉代에는 營兵을 거느렸고, 秩은 4品이었으며 宮城과 掖庭, 京城의 宿衛를 관장하였다. 驍騎將軍 휘하의 부대와 領軍將軍·護軍將軍·左衛將軍·右衛將軍·游擊將軍의 군대를 합해 六軍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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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랑(秦朗)을 보내 그들을 정벌하게 하니 설귀니가비능에 등을 돌리고 그의 무리들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조정에서는 설귀니를] 귀의왕(歸義王)에 봉하고 당휘(幢麾)주 009
각주 009)
幢麾:깃발 등의 儀仗用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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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곡개(曲蓋), 주 100
각주 100)
曲蓋:수레 위에 받쳐 햇빛을 가리는 덮개이다. 자루가 굽은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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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취(鼓吹)주 011
각주 011)
鼓吹:북과 피리 등 전쟁이나 행렬 때에 사용한 악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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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사하고 전처럼 병주에서 머물러 살도록 하였다. 보도근가비능에게 살해되었다.

  • 각주 001)
    步度根:檀石槐의 손자이다. 檀石槐 사후 아들인 和連이 大人이 되었으나 후에 北地郡을 공격하다 죽었고, 이에 和連의 조카 魁頭가 大人이 되었으나, 후에 和連의 아들 騫曼과 자리를 다투게 되었다. 步度根은 魁頭가 죽은 후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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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원문은 “中兄”인데, ‘仲兄’과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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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桑乾縣:前漢時代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현재의 河北省 蔚縣 동북쪽이다. 代郡에 속하였다. 三國 曹魏시기 廢置되었다. 후에 北魏時代 다시 설치되었고, 治所는 현재 山西省 山陰縣 동쪽이다. 孝昌년간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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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文帝(187~226;재위 220~226):이름은 曹丕, 字는 子桓이며, 曹操의 둘째 아들이다. 建安 16년(211) 五官中郞將이 되어 副丞相의 역할을 맡았다. 曹植과 후계자 자리를 다투다 승리하였다. 曹操가 죽은 후 魏王과 丞相의 지위를 계승하였고 陳羣을 吏部尙書로 삼아 九品官人法을 제정하였다. 延康元年(220) 10월 帝位에 올라 국호를 魏로 정하고 黃初로 改元하였다. 세 차례 吳를 정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廟號는 世祖이다. 曹操·曹植과 함께 ‘三曹’라 칭해진다. 『典論』을 저술하였고, 詩賦 백여 편을 지었으며, 『魏文帝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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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원문은 “持節”인데, 魏晉南北朝時代 都督 혹은 이민족을 관장하는 校尉의 職權을 표시하는 명칭의 하나이다. 持節은 使持節보다 낮고 假節보다 높았다. 持節은 官位가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軍事上으로는 使持節과 권한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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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昌平縣:前漢時代에 설치되었다. 治所는 현재 北京城 昌平縣 동남에 해당한다. 上谷郡의 屬縣이었다. 後漢時代에는 廣陽郡에 속하였고, 후에 燕國에 속하였다. 北魏初 廢置되었다가 東魏 天平년간 다시 설치되었다. 治所를 현재의 昌平縣 서남 古城으로 옮겼고, 平昌郡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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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明帝(205~239;재위 226~239):三國時代 曹魏의 3대 皇帝이다. 이름은 曹叡, 字는 元仲이다. 文帝의 맏아들이다. 武德侯·齊公·平原王에 봉해졌다가 黃初 7년(226)에 太子로 책봉되었고 이후 즉위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지식이 많았으며 法理에 뜻을 두고 간언을 능히 받아들였다. 늘 재판에 친히 임하였고, 大獄의 판결을 시찰하였다. 재위 초 浮華를 억제하여 太和 4년(230)에 尙書 諸葛誕과 鄧颺, 何晏 등을 면직시켰다. 靑龍년간 이후 점차 호화로운 사치에 탐닉하여 자주 요역을 일으키고 宮室을 크게 지었다. 景初 2년(238)에 司馬懿에게 군대를 이끌고 遼東郡을 정벌할 것을 명하니 司馬懿는 公孫淵을 격파하고 海東 諸郡을 평정하였다. 曹爽과 司馬懿에게 遺詔를 내려 輔政하도록 하였다. 諡號는 明帝이며, 廟號는 烈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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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驍騎將軍:魏晉南北朝時代 雜號將軍의 하나이다. 三國 魏시기 中軍에 驍騎將軍을 두었다. 晉代에는 營兵을 거느렸고, 秩은 4品이었으며 宮城과 掖庭, 京城의 宿衛를 관장하였다. 驍騎將軍 휘하의 부대와 領軍將軍·護軍將軍·左衛將軍·右衛將軍·游擊將軍의 군대를 합해 六軍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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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幢麾:깃발 등의 儀仗用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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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0)
    曲蓋:수레 위에 받쳐 햇빛을 가리는 덮개이다. 자루가 굽은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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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鼓吹:북과 피리 등 전쟁이나 행렬 때에 사용한 악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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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배송지, 보도근(步度根), 부라한(扶羅韓), 태조, 조조, 보도근, 가비능(軻比能), 염유, 능신저(能臣氐), 부라한, 부라한, 부라한, 능신저, 부라한, 가비능, 가비능, 가비능, 부라한, 부라한, 설귀니(泄歸泥), 가비능, 가비능, 설귀니, 설귀니, 보도근, 가비능, 문제(文帝), 전예(田豫), 보도근, 문제, 보도근, 보도근, 가비능, 보도근, 보도근, 보도근, 설귀니, 설귀니, 가비능, 가비능, 설귀니, 보도근, 가비능, 보도근, 보도근, 가비능, 명제(明帝), 보도근, 가비능, 가비능, 보도근, 보도근, 설귀니, 가비능, 가비능, 명제, 진랑(秦朗), 설귀니, 가비능, 설귀니, 보도근, 가비능
지명
유주, 대군, 상건[현](桑乾縣), 창평[현](昌平縣), 태원[군](太原郡), 안문군(鴈門郡), 병주, 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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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과 보도근(步度根), 가비능(軻比能) 집단에 대한 관계 자료번호 : jo.k_0004_003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