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흉노, 선비, 오환의 관계를 설명함
『서[경](書經)』에는 “만이(蠻夷)가 중국(夏)을 어지럽혔다.”주 001라고 기재되어 있고, 『시[경](詩經)』에서는 “험윤(玁狁)이 대단히 번성하였다.”주 002라고 말하였다. 오래되었구나! 그들이 중국의 근심거리가 된 지가.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후에 흉노(匈奴)주 003
그러나 오환(烏丸)주 018
[태조는] 마침내 오환(烏丸)의 부중(部衆)을 이끌고 [그들을] 중국의 정벌과 토벌에 종군하도록 하니 [중국]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쉴 수 있었다. 후에 선비(鮮卑)의 대인(大人)주 028인 가비능(軻比能)이 다시 여러 북방의 이민족들[羣狄]을 제압하고 다스렸는데, [그는] 흉노(匈奴)의 고지(故地)를 모두 거두어 들였으니, [서쪽으로는] 운중[군](雲中郡) 주 029과 오원[군](五原郡) 주 030
오환과 선비는 옛날의 소위 동호(東胡)주 039였다. 그들(오환과 선비)의 습속과 이전의 사건은 한대(漢代)의 기사(記事)를 편찬한 사람이 이미 기록해 두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단지 후한 말기와 삼국 위 초기 이래의 사건만을 열거하여 사이(四夷)의 변화에 대비하고자 한다.[배송지주]주 040
각주 003)
가 오랫동안 [중국 북쪽] 변경의 해악(害惡)이 되었다. 효무제(孝武帝)
주 004匈奴:秦漢時代 몽골고원을 지배하던 유목국가이다. 기원전 3세기 말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북아시아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하여 漢나라와 병립하며 발전하다가 내분으로 인해 기원후 1세기경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그 이후 내부적인 갈등의 증폭과 漢나라의 匈奴 대책 결과 일부 세력은 몽골 초원에서 주변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때 또 다른 세력은 中國 북방으로 내려왔는데 南匈奴라 불리는 이 집단은 형성하여 三國時代까지 中國의 藩屛 역할을 하였다. 西晉이 八王의 亂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독립하여 漢(前趙)를 세우고 懷帝와 愍帝를 사로잡아 西晉을 멸망시켰다. 匈奴와 훈이 同族이라는 설이 유럽과 일본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유행하였으나, 이와는 달리 흉노를 민족이나 종족이 아니라 유목민들의 인위적 연합조직으로 보는 주장도 제기되었다(사와다 이사오, 2007:25~26;213~221).
각주 004)
가 비록 밖으로 사이(四夷)[의 경영]에 힘을 쏟아서, 동쪽으로는 양월(兩越)주 005孝武帝:前漢 武帝(전156~전87;재위 전141~전87)를 지칭한다. 武帝의 이름은 徹이며, 景帝의 아들이다. 膠東王에 봉해졌다가 7세에 皇太子가 되었다. 景帝 後元 3년(전141)에 즉위하였다. 중앙집권정책을 실시하여 主父偃의 건의대로 推恩令을 실시하여 諸候王의 자제를 列候로 봉하고 諸侯王國의 일부를 떼어내어 侯國으로 삼아 諸候王國을 약화시켰다. 左官律을 제정하고 附益之法을 만들어 諸侯王이 租稅만을 수취하고 政事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元鼎 5년(전112)에 酎金令을 실시하여 列侯가 바친 金의 성분이 열악하면 列侯의 작위를 박탈하였다. 또 13部刺史를 통해 郡國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元朔 2년(전127)부터 元狩 4년(전119)까지 衛靑·霍去病을 파견하여 匈奴를 공격하였고, 張鶱을 西域으로 보내 西域과 通交하였다. 閩越·西南夷·朝鮮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정식 察擧제도를 만들어 지방에서 孝廉·秀才·賢良方正을 천거하게 하였고, 五經博士와 博士弟子員을 두었으며 長安에 太學을 설치하였다. 말년에 匈奴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농민봉기가 자주 발생했다. 이에 征和 4년(전89) 輪臺의 屯田을 罷하라는 조서를 내려 租稅징수를 경감하고 農桑에 힘쓸 것임을 천명하였다. 임종 전에 8세인 劉弗陵을 太子로 삼아 霍光 등에게 輔政하도록 遺詔를 내렸다. 廟號는 世宗이다.
각주 005)
과 조선(朝鮮)
주 006兩越:東越과 南越을 가리킨다. 東越은 閩越이라고도 하며, 秦漢時代 현재의 福建省 북부와 浙江省 남부에 거주하였다. 『史記』 卷114 「東越列傳」에 따르면, 閩越王은 春秋時代 越王 句踐의 후예라고 한다. 秦始皇이 閩越을 정복하고 閩中郡으로 만들었는데, 漢初 無諸가 王이 되어 東冶(현재 福建省 福州市)에 도읍을 정하였다. 惠帝시기 東海王에 봉해지고 東甌(현재 浙江省 동남쪽 甌江의 永嘉縣 일대)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 때문에 東甌王으로도 불렸다. 前漢 武帝는 元鼎 6년(전111)에 樓船將軍 楊僕 등을 보내 閩越을 정복하였고, 백성들을 江淮 지역에 옮겨 살게 하였다. 南越은 秦末 趙佗가 세운 나라이며, 南海郡·桂林郡·象郡 등을 지배하였다. 현재의 湖南省 남부와 廣東省·廣西省 전부, 베트남 북부를 지배하였다. 趙佗는 南越의 武帝를 자칭하였다. 베트남의 최초의 王朝로 간주되는 南越은 漢武帝가 보낸 군대에 패하여 멸망하였다.
각주 006)
을 평정하였고, 서쪽으로는 이사(貳師)
주 007와 대완(大宛)
주 008을 토벌하였으며, [서남쪽으로는] 공(邛), 주 009
작(苲), 주 010
야랑(夜郞)
주 011朝鮮:遼河 유역과 韓半島 서북지방을 지배했던 나라이며 李氏朝鮮과 구별하기 위해 古朝鮮이라고 부른다. 檀君神話의 기록에 따르면 전2, 333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나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전 7세기 초이다. 戰國時代에 들어와 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諸侯들이 王이라 칭할 때, 朝鮮은 인접국인 燕나라와 동시에 王을 칭하면서 발전하였다. 朝鮮은 기원전 4세기 무렵 燕나라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朝鮮은 전 3세기 후반부터 燕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였다. 燕나라의 장수 秦開가 遼河 상류에 근거를 둔 東胡를 원정한 다음 朝鮮 영역내로 쳐들어와 遼東에 遼東郡을 설치하고 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朝鮮은 서방 2, 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였다. 그 뒤 秦나라가 燕나라를 멸망시키고(전222) 遼東郡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자 朝鮮의 否王은 秦나라의 공격이 두려워 복속할 것을 청하나 직접 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否王이 죽고 아들 準王이 즉위할 무렵 전202년 漢나라가 中國을 통일하였다. 漢나라는 秦나라와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았다. 다만 과거 燕나라가 쌓은 牆塞만을 수축하고 朝鮮과의 경계를 浿水로 재조정하였다. 전195년 燕王 盧綰이 漢나라에 반기를 들고 匈奴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朝鮮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衛滿이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朝鮮으로 들어왔다. 準王은 그를 신임하여 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 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衛滿은 전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王儉城에 입성하여 準王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일반적으로 衛滿朝鮮이라고 부른다.
각주 011)
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지만, [그들은] 모두 황복(荒服)주 012의 밖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하여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흉노는 제하(諸夏)주 013를 가장 핍박하였으며, 흉노의 기병대[胡騎]가 남침하면 세 방향의 변경[三邊]에서 적을 맞이해야 하였다. 이 때문에 [효무제는] 여러 차례 위[청](衛靑)
주 014과 곽[거병](霍去病)
주 015夜郞:현재의 貴州省 일대에 있던 이민족, 혹은 이들의 세운 나라이다. 先秦시대부터 존재하였으며, 戰國時代에는 西南夷의 大國이 되었다. 정치의 중심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貴州의 서쪽, 북쪽, 남쪽의 세 가지 설이 존재한다. 영토는 현재의 貴州省 대부분과 雲南省 동북부, 四川省 남부, 廣西省 서북부에 해당하였다. 漢初 南越·巴蜀과 무역관계를 맺었다. 武帝 建元 6년(전135)에 唐蒙이 夜郞의 땅에 이르러 利를 미끼로 郡縣을 설치하기로 약속하여 드디어 漢 犍爲郡의 屬縣이 되었다. 元鼎 6년(전111)에 夜郞의 땅에 牂柯郡이 설치되어 200여 년간 존속하였다.
각주 015)
이란 장군을 파견하여, 북쪽으로 깊이 쳐들어가서 [흉노를] 정벌하였으며, 선우(單于)주 016를 끝까지 추격하여 그들의 부유한 땅을 빼앗았다. 후에 마침내 [중국] 변경의 요새를 지키면서 [중국왕조에] 번(藩)이라 칭한 이후, 대대로 쇠약하게 되었다. [헌제(獻帝)]건안(建安)년간(196~220)에 호주천(呼廚泉)이라는 남흉노의 선우[南單于]주 017가 입조(入朝)한 후, 마침내 [중국에] 머무르면서 [궁궐 안에서 황제를] 모시게 되자, [후한 조정은] 우현왕(右賢王)에게 그 나라를 진무(鎭撫)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흉노는 그 절조(節操)를 꺾[어 한나라를 섬긴] 것이 [흉노가 전한(前漢)시대에 했던 것보다] 심하게 되었다.霍去病(?~전117):전한시대 河東郡 平陽縣(현재 山西省 臨汾縣 서남) 사람이며, 武帝 衛皇后의 조카이다. 처음에 侍中이 되었고 驃姚校尉가 되어 大將軍 衛靑을 따라 匈奴를 공격하여 공을 세워 冠軍侯에 봉해졌다. 그 후 수차례 匈奴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元狩 2년(전121)에 驃騎將軍이 되어 隴西에서 焉支山을 지나 匈奴 休屠王의 祭天金人을 노획하였다. 같은 해 다시 北地郡에서 출발하여 居延을 지나 공격하니 渾邪王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元狩 4년(전119)에 代郡을 출발하여 漠北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공이 높아 大司馬에 加해졌으며, 秩祿은 大將軍 衛靑보다 많았다. 武帝의 총애를 얻었다. 諡號는 景桓侯이다.
그러나 오환(烏丸)주 018
각주 018)
과 선비(鮮卑)주 019烏丸:‘烏桓’으로도 쓴다. 이들은 기원전 4~3세기경에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동부 老哈河의 상류 지대에서 동남으로는 遼寧省 大陵河와 小陵河 유역까지, 즉 內蒙古自治區 赤峰市, 遼寧省 朝陽市·錦州市와 그 주변 지대를 포함한 일대에서 번성하였던 東胡의 한 지파이다. 동호는 전206년에 흉노 冒頓單于의 기습을 받고 괴멸 상태에 이른다. 이때 살아남은 동호의 일부 部衆이 烏丸山(대체로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阿魯科爾沁旗 북부의 大興安嶺山脈 남단)으로 달아나서 그곳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는데, 그곳의 이름을 따서 烏丸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유목과 사냥으로 살아가는데, 手工業과 粗放農業도 함께 영위하고 있었다. 흉노의 통치를 받으면서 정기적으로 소, 말, 양 그리고 동물의 가죽을 貢物로 匈奴에게 바쳤다. 만약 공납 기일을 넘기거나 공물을 바치지 않을 때에는 오환인의 처와 자식들이 몰수되어 흉노의 노비로 되었다. 전한 武帝는 전119년에 霍去病에게 흉노의 동부 지구를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원래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昭烏達盟 일대에 거주하던 烏桓의 일단이 이 때 降附하였다. 이들은 동쪽으로 전한의 上谷郡과 漁陽郡, 右北平郡, 遼西郡, 遼東郡의 塞外로 徙民되었다. 이들은 후한 초(49)에는 그 塞內로 들어가서 上谷郡, 漁陽郡, 右北平郡, 遼西郡, 遼東屬國, 廣陽郡, 代郡, 雁門郡, 太原郡, 朔方郡 등에 분포하였다. 전한 武帝의 치세에 처음으로 이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護烏桓校尉를 설치하였으나 그 후 폐지되었다. 그러나 후한 光武帝 建武 25년(49)에 다시 上谷郡 寧城에 護烏桓校尉를 설치하여 이들에 대한 賞賜, 質子 그리고 互市 등의 업무를 보았다.
각주 019)
가 점차 더욱 강성해지고, 또한 한나라 말기의 내란 때문에 중국에는 사건이 많아져서, 밖으로 [이민족을] 토벌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오환과 선비가] 막남(漠南) 지역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성읍(城邑)에 쳐들어와서 난폭하게 굴고 인민을 죽이고 약탈하였으니, [중국의] 북방 변경은 여전히 그들 때문에 곤경에 처해졌다. 원소(袁紹)
주 020鮮卑:烏丸과 함께 東胡의 한 支派이다. 전 3세기 초에 東胡가 匈奴 冒頓單于에게 격파되어 해체됨에 따라 鮮卑와 烏桓은 匈奴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前漢 武帝가 군대를 파견하여 匈奴의 東部를 격파함에 따라 鮮卑의 일부는 遼河의 서쪽 지류의 하나인 西剌木倫(Siramuren) 강 유역의 烏桓의 옛 遊地로 南下하였다. 89년에 北匈奴가 세력이 쇠약해지면서 後漢을 비롯하여 사방의 여러 세력의 攻勢를 견디지 못하여 서방으로 이동한 후에 鮮卑는 점차 北匈奴의 故地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鮮卑는 그곳에 남아 있던 北匈奴 10餘萬 落(戶)을 흡수하였다.
각주 020)
가 하북(河北)을 점령한 후에주 021삼군오환(三郡烏丸)주 022을 구슬려 지배하였으며, 오환의 명성이 높은 우두머리들[名王]을 총애하면서 그들의 정예 기병[精騎]을 확보하였다. 그 후에 [원]상(袁尙)
주 023袁紹(?~202):後漢시대 汝南郡 汝陽縣 사람이며, 字는 本初이다. 司空 袁逢의 아들이다. 大將軍 何進의 辟召로 벼슬을 시작한 후 中軍校尉·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中平 6년(189)에 何進과 함께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누설되어 何進이 피살되자 아우 袁術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환관 2천여 인을 살해하였다. 董卓이 정권을 장악하자 冀州로 도망갔다가 初平 元年(190)에 關東州郡에서 董卓을 토벌하기 위해 起兵하자 맹주로 추대되었다. 初平 2년(191)에 韓馥을 몰아내고 冀州牧이 되었으며 公孫瓚을 제거하고 河北 전역을 지배하였다. 曹操가 獻帝를 맞아들여 許로 옮긴 후 太尉·大將軍으로 삼았다. 初平 5년(188)에 曹操와 官渡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2년 후 병사하였다.
각주 023)
과 [원]희(袁熙)
주 024가 또 답돈(蹋頓)에게 도망쳤다. 답돈은 날래기도 하고 용맹하였기 때문에 변경 지대의 장로(長老)들은 모두 그를 [흉노의] 묵특 [선우](冒頓單于)
주 025袁尙(?~207):後漢末 汝南郡 汝陽縣(현재 河南省 商水縣 서북) 사람이며, 字는 顯甫이다. 袁紹의 셋째 아들로 가장 총애를 받았다. 建安 7년(202)에 袁紹가 죽자 무리들은 장자인 元譚을 세우려 하였으나, 袁紹의 측근 審配 등이 袁尙에 아부하여 袁紹의 유언을 위조하여 袁尙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冀州를 거느리게 하였다. 建安 8년(203)에 曹操에게 패한 袁譚에게 구원병의 파병을 거절하여 형제의 틈이 벌어졌고, 袁譚은 도리어 曹操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建安 9년(204)에 曹操는 이 기회를 틈타 본거지인 鄴(현재 河北省 臨漳縣 서남)을 포위하였고, 袁尙은 군대를 내보내 싸웠으나 패하여 冀州를 빼앗기고 달아나 둘째 형 幽州刺史 袁熙에게 달아났다. 建安 10년(205) 袁熙의 部將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熙와 함께 遼西烏丸 蹋頓에게 투항하였다. 建安 12년(207)에 曹操가 三郡烏丸을 격파하자 袁熙와 함께 遼東太守 公孫康에게 의탁하였으나, 公孫康은 袁尙 형제를 죽여 조조에게 수급을 바쳤다.
각주 025)
에 견주었다. [답돈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믿고 감히 망명자주 026들도 받아들였으며, 모든 이민족[百蠻]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태조(太祖)
주 027가 몰래 군대를 거느리고 북벌(北伐)하였는데,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나아가[기습하여], 한 차례의 전투로 그들을 평정하였다. 이에 이적(夷狄)이 두려워서 복종하므로, [태조의] 위세가 삭토(朔土)에 떨쳤다.冒顿(?~전174년;재위 전209~전174):흉노의 두번 째 單于이다. 冒頓의 의미는 투르크어 또는 몽골어로 영웅을 지칭하는 바가투르(baghatur) 혹은 몽골어의 神聖을 지칭하는 보구드(boghud) 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는 전209년에 아버지인 匈奴의 초대 頭曼單于를 살해하고 스스로 單于가 되었다. 이후 내정을 정비한 다음 東胡와 月氏 등 주변 부족을 격파하고 오르도스의 樓煩과 白羊 등을 병합하였다. 그리고 秦나라가 확보했던 河南 지역을 다시 차지하는 등 세력을 크게 발전시켰다. 나아가 북방의 예니세이강 상류의 丁零과 서북방의 堅昆 등도 복속시켰다. 이를 통해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거대한 유목제국을 건설했다. 漢나라와 싸워 이긴 이후에 화친을 통해 더욱 세력을 확대하는 등 匈奴帝國의 성립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조는] 마침내 오환(烏丸)의 부중(部衆)을 이끌고 [그들을] 중국의 정벌과 토벌에 종군하도록 하니 [중국]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쉴 수 있었다. 후에 선비(鮮卑)의 대인(大人)주 028인 가비능(軻比能)이 다시 여러 북방의 이민족들[羣狄]을 제압하고 다스렸는데, [그는] 흉노(匈奴)의 고지(故地)를 모두 거두어 들였으니, [서쪽으로는] 운중[군](雲中郡) 주 029과 오원[군](五原郡) 주 030
각주 030)
에서 동쪽으로는 요수(遼水)
주 031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비 대인의 정(庭)이 되었다. [선비는] 자주 변경의 요새를 침범하여 그 백성들을 노략질하였는데, 유[주](幽州)
주 032와 병[주](幷州)
주 033五原郡:朔方郡과 함께 전한 武帝 元朔 2년(전127)에 車騎將軍 衛靑이 匈奴를 격파하고 오르도스(Ordos, 河套)지방을 전한이 차지하면서 그곳에 郡縣으로 설치되었다. 五原郡은 본래 秦의 九原郡 지역이었는데, 전210년에 秦始皇이 죽은 후, 진이 멸망하면서 匈奴가 점령했던 곳이다. 치소는 九原縣(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包頭市 서북쪽)이었다. 王莽이 獲降郡으로 고쳤으나, 후한시대에 다시 五原郡으로 복원하였다. 후한 초기에 南匈奴의 䤈落尸逐鞮單于(呼韓邪單于, 재위 48~56) 比가 그 부중을 거느리고 이곳에 주둔하였다. 후한 말에 폐지되었다.
각주 033)
에서 고통을 당하였다. 전예(田豫)
주 034幷州:前漢 武帝 시기에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였다. 太原·上黨·雲中·定襄·雁門·代郡 등 6郡을 관할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山西省 대부분과 河北省 및 內蒙古의 일부에 해당하였다. 後漢時代 治所를 晉陽縣(隋代 太原縣으로 개칭, 현재 山西省 太原市 서남 古城營)에 두었다. 관할구역은 확대되어 西河·五原·朔方·上郡을 더 거느리게 되었고, 代郡은 거의 관계하지 않았다. 이 당시 관할구역은 山西省 대부분과 陝西省 북부, 內蒙古 自治區 狼山·陰山 이남 지역에 해당하였다. 後漢末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建安 18년(213)에 冀州에 합병되었다. 三國 魏 黃初元年(220)에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관할구역은 점차 축소되었다.
각주 034)
는 마성[현](馬城縣)
주 035에서 [선비에게] 포위당한 적이 있었고주 036, 필궤(畢軌)
주 037田豫:三國時代 漁陽郡 雍奴縣(현재 天津市 武淸縣 동북) 사람이며, 字는 國讓이다. 後漢末 公孫瓚의 부하가 되었다. 公孫瓚이 패한 후 曹操에 항복하여 丞相軍謀掾에 임명되었다. 후에 弋陽太守로 전임하였다. 曹彰을 도와 代郡을 공격하여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고 南陽太守로 임명되었다. 曹魏 文帝시기 使持節 護烏丸校尉가 되어 鮮卑 軻比能部를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太和 6년(232)에 汝南太守가 되었다가 후에 靑州의 군대를 이끌고 해로로 遼東郡의 公孫淵을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成山(현재 山東省 榮成市)에서 吳나라가 遼東에 파견한 사자를 죽였다. 正始初에 使持節 護匈奴中郞將 幷州刺史가 되어 州의 경계를 편안하게 하였다. 후에 衛尉로 임명되었으나 고령의 나이와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82세에 죽었다.
각주 037)
는 형북(陘北)
주 038에서 [선비에게] 패한 적이 있었다. [명제(明帝)] 청룡(靑龍)년간(233~237)에 황제는 마침내 왕웅(王雄)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검객을 파견하여 [가비능을] 척살(刺殺)하였다. 그 후 [선비] 종족들과 부락들은 떨어져 나가고 흩어졌으며, 서로 습격하고 공격하니, 강자(强者)는 [중국에서] 멀리 달아나서 숨었고, 약자(弱者)는 [중국에] 항복을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의] 변경지대는 점차 평안하게 되었고, 막남(漠南)에서는 사변(事變)이 적게 되었다. 비록 때로는 자못 노략질과 도둑질을 하기도 했지만, 다시는 [선비 부락] 서로가 선동할 수는 없었다.畢軌(?~249):三國時代 東平縣(현재 山東省 東平縣 동쪽) 사람이며, 字는 昭先이다. 젊어서 명성이 있었으며, 三國 魏 黃初末에 출사하여 長吏가 되었다. 明帝시기에는 黃門侍郞이 되었고, 아들은 公主와 결혼하였다. 후에 幷州刺史로 승진하였다. 靑龍元年(233)에 군대를 이끌고 鮮卑의 軻比能을 습격하여 樓煩(현재 山西省 寧武縣)에서 패하였다. 또 浮華를 이유로 免官되었다. 正始년간에 中護軍, 侍中尙書, 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丁謐 등과 함께 曹爽에게 司馬懿를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正始 10년(249)에 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켜 曹爽을 살해할 때 피살되었다.
오환과 선비는 옛날의 소위 동호(東胡)주 039였다. 그들(오환과 선비)의 습속과 이전의 사건은 한대(漢代)의 기사(記事)를 편찬한 사람이 이미 기록해 두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단지 후한 말기와 삼국 위 초기 이래의 사건만을 열거하여 사이(四夷)의 변화에 대비하고자 한다.[배송지주]주 040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匈奴:秦漢時代 몽골고원을 지배하던 유목국가이다. 기원전 3세기 말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북아시아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하여 漢나라와 병립하며 발전하다가 내분으로 인해 기원후 1세기경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그 이후 내부적인 갈등의 증폭과 漢나라의 匈奴 대책 결과 일부 세력은 몽골 초원에서 주변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때 또 다른 세력은 中國 북방으로 내려왔는데 南匈奴라 불리는 이 집단은 형성하여 三國時代까지 中國의 藩屛 역할을 하였다. 西晉이 八王의 亂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독립하여 漢(前趙)를 세우고 懷帝와 愍帝를 사로잡아 西晉을 멸망시켰다. 匈奴와 훈이 同族이라는 설이 유럽과 일본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유행하였으나, 이와는 달리 흉노를 민족이나 종족이 아니라 유목민들의 인위적 연합조직으로 보는 주장도 제기되었다(사와다 이사오, 2007:25~26;213~221).
-
각주 004)
孝武帝:前漢 武帝(전156~전87;재위 전141~전87)를 지칭한다. 武帝의 이름은 徹이며, 景帝의 아들이다. 膠東王에 봉해졌다가 7세에 皇太子가 되었다. 景帝 後元 3년(전141)에 즉위하였다. 중앙집권정책을 실시하여 主父偃의 건의대로 推恩令을 실시하여 諸候王의 자제를 列候로 봉하고 諸侯王國의 일부를 떼어내어 侯國으로 삼아 諸候王國을 약화시켰다. 左官律을 제정하고 附益之法을 만들어 諸侯王이 租稅만을 수취하고 政事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元鼎 5년(전112)에 酎金令을 실시하여 列侯가 바친 金의 성분이 열악하면 列侯의 작위를 박탈하였다. 또 13部刺史를 통해 郡國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元朔 2년(전127)부터 元狩 4년(전119)까지 衛靑·霍去病을 파견하여 匈奴를 공격하였고, 張鶱을 西域으로 보내 西域과 通交하였다. 閩越·西南夷·朝鮮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정식 察擧제도를 만들어 지방에서 孝廉·秀才·賢良方正을 천거하게 하였고, 五經博士와 博士弟子員을 두었으며 長安에 太學을 설치하였다. 말년에 匈奴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농민봉기가 자주 발생했다. 이에 征和 4년(전89) 輪臺의 屯田을 罷하라는 조서를 내려 租稅징수를 경감하고 農桑에 힘쓸 것임을 천명하였다. 임종 전에 8세인 劉弗陵을 太子로 삼아 霍光 등에게 輔政하도록 遺詔를 내렸다. 廟號는 世宗이다.
-
각주 005)
兩越:東越과 南越을 가리킨다. 東越은 閩越이라고도 하며, 秦漢時代 현재의 福建省 북부와 浙江省 남부에 거주하였다. 『史記』 卷114 「東越列傳」에 따르면, 閩越王은 春秋時代 越王 句踐의 후예라고 한다. 秦始皇이 閩越을 정복하고 閩中郡으로 만들었는데, 漢初 無諸가 王이 되어 東冶(현재 福建省 福州市)에 도읍을 정하였다. 惠帝시기 東海王에 봉해지고 東甌(현재 浙江省 동남쪽 甌江의 永嘉縣 일대)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 때문에 東甌王으로도 불렸다. 前漢 武帝는 元鼎 6년(전111)에 樓船將軍 楊僕 등을 보내 閩越을 정복하였고, 백성들을 江淮 지역에 옮겨 살게 하였다. 南越은 秦末 趙佗가 세운 나라이며, 南海郡·桂林郡·象郡 등을 지배하였다. 현재의 湖南省 남부와 廣東省·廣西省 전부, 베트남 북부를 지배하였다. 趙佗는 南越의 武帝를 자칭하였다. 베트남의 최초의 王朝로 간주되는 南越은 漢武帝가 보낸 군대에 패하여 멸망하였다.
-
각주 006)
朝鮮:遼河 유역과 韓半島 서북지방을 지배했던 나라이며 李氏朝鮮과 구별하기 위해 古朝鮮이라고 부른다. 檀君神話의 기록에 따르면 전2, 333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나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전 7세기 초이다. 戰國時代에 들어와 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諸侯들이 王이라 칭할 때, 朝鮮은 인접국인 燕나라와 동시에 王을 칭하면서 발전하였다. 朝鮮은 기원전 4세기 무렵 燕나라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朝鮮은 전 3세기 후반부터 燕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였다. 燕나라의 장수 秦開가 遼河 상류에 근거를 둔 東胡를 원정한 다음 朝鮮 영역내로 쳐들어와 遼東에 遼東郡을 설치하고 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朝鮮은 서방 2, 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였다. 그 뒤 秦나라가 燕나라를 멸망시키고(전222) 遼東郡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자 朝鮮의 否王은 秦나라의 공격이 두려워 복속할 것을 청하나 직접 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否王이 죽고 아들 準王이 즉위할 무렵 전202년 漢나라가 中國을 통일하였다. 漢나라는 秦나라와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았다. 다만 과거 燕나라가 쌓은 牆塞만을 수축하고 朝鮮과의 경계를 浿水로 재조정하였다. 전195년 燕王 盧綰이 漢나라에 반기를 들고 匈奴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朝鮮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衛滿이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朝鮮으로 들어왔다. 準王은 그를 신임하여 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 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衛滿은 전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王儉城에 입성하여 準王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일반적으로 衛滿朝鮮이라고 부른다.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夜郞:현재의 貴州省 일대에 있던 이민족, 혹은 이들의 세운 나라이다. 先秦시대부터 존재하였으며, 戰國時代에는 西南夷의 大國이 되었다. 정치의 중심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貴州의 서쪽, 북쪽, 남쪽의 세 가지 설이 존재한다. 영토는 현재의 貴州省 대부분과 雲南省 동북부, 四川省 남부, 廣西省 서북부에 해당하였다. 漢初 南越·巴蜀과 무역관계를 맺었다. 武帝 建元 6년(전135)에 唐蒙이 夜郞의 땅에 이르러 利를 미끼로 郡縣을 설치하기로 약속하여 드디어 漢 犍爲郡의 屬縣이 되었다. 元鼎 6년(전111)에 夜郞의 땅에 牂柯郡이 설치되어 200여 년간 존속하였다.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霍去病(?~전117):전한시대 河東郡 平陽縣(현재 山西省 臨汾縣 서남) 사람이며, 武帝 衛皇后의 조카이다. 처음에 侍中이 되었고 驃姚校尉가 되어 大將軍 衛靑을 따라 匈奴를 공격하여 공을 세워 冠軍侯에 봉해졌다. 그 후 수차례 匈奴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元狩 2년(전121)에 驃騎將軍이 되어 隴西에서 焉支山을 지나 匈奴 休屠王의 祭天金人을 노획하였다. 같은 해 다시 北地郡에서 출발하여 居延을 지나 공격하니 渾邪王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元狩 4년(전119)에 代郡을 출발하여 漠北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공이 높아 大司馬에 加해졌으며, 秩祿은 大將軍 衛靑보다 많았다. 武帝의 총애를 얻었다. 諡號는 景桓侯이다.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烏丸:‘烏桓’으로도 쓴다. 이들은 기원전 4~3세기경에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동부 老哈河의 상류 지대에서 동남으로는 遼寧省 大陵河와 小陵河 유역까지, 즉 內蒙古自治區 赤峰市, 遼寧省 朝陽市·錦州市와 그 주변 지대를 포함한 일대에서 번성하였던 東胡의 한 지파이다. 동호는 전206년에 흉노 冒頓單于의 기습을 받고 괴멸 상태에 이른다. 이때 살아남은 동호의 일부 部衆이 烏丸山(대체로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阿魯科爾沁旗 북부의 大興安嶺山脈 남단)으로 달아나서 그곳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는데, 그곳의 이름을 따서 烏丸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유목과 사냥으로 살아가는데, 手工業과 粗放農業도 함께 영위하고 있었다. 흉노의 통치를 받으면서 정기적으로 소, 말, 양 그리고 동물의 가죽을 貢物로 匈奴에게 바쳤다. 만약 공납 기일을 넘기거나 공물을 바치지 않을 때에는 오환인의 처와 자식들이 몰수되어 흉노의 노비로 되었다. 전한 武帝는 전119년에 霍去病에게 흉노의 동부 지구를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원래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昭烏達盟 일대에 거주하던 烏桓의 일단이 이 때 降附하였다. 이들은 동쪽으로 전한의 上谷郡과 漁陽郡, 右北平郡, 遼西郡, 遼東郡의 塞外로 徙民되었다. 이들은 후한 초(49)에는 그 塞內로 들어가서 上谷郡, 漁陽郡, 右北平郡, 遼西郡, 遼東屬國, 廣陽郡, 代郡, 雁門郡, 太原郡, 朔方郡 등에 분포하였다. 전한 武帝의 치세에 처음으로 이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護烏桓校尉를 설치하였으나 그 후 폐지되었다. 그러나 후한 光武帝 建武 25년(49)에 다시 上谷郡 寧城에 護烏桓校尉를 설치하여 이들에 대한 賞賜, 質子 그리고 互市 등의 업무를 보았다.
-
각주 019)
鮮卑:烏丸과 함께 東胡의 한 支派이다. 전 3세기 초에 東胡가 匈奴 冒頓單于에게 격파되어 해체됨에 따라 鮮卑와 烏桓은 匈奴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前漢 武帝가 군대를 파견하여 匈奴의 東部를 격파함에 따라 鮮卑의 일부는 遼河의 서쪽 지류의 하나인 西剌木倫(Siramuren) 강 유역의 烏桓의 옛 遊地로 南下하였다. 89년에 北匈奴가 세력이 쇠약해지면서 後漢을 비롯하여 사방의 여러 세력의 攻勢를 견디지 못하여 서방으로 이동한 후에 鮮卑는 점차 北匈奴의 故地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鮮卑는 그곳에 남아 있던 北匈奴 10餘萬 落(戶)을 흡수하였다.
-
각주 020)
袁紹(?~202):後漢시대 汝南郡 汝陽縣 사람이며, 字는 本初이다. 司空 袁逢의 아들이다. 大將軍 何進의 辟召로 벼슬을 시작한 후 中軍校尉·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中平 6년(189)에 何進과 함께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누설되어 何進이 피살되자 아우 袁術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환관 2천여 인을 살해하였다. 董卓이 정권을 장악하자 冀州로 도망갔다가 初平 元年(190)에 關東州郡에서 董卓을 토벌하기 위해 起兵하자 맹주로 추대되었다. 初平 2년(191)에 韓馥을 몰아내고 冀州牧이 되었으며 公孫瓚을 제거하고 河北 전역을 지배하였다. 曹操가 獻帝를 맞아들여 許로 옮긴 후 太尉·大將軍으로 삼았다. 初平 5년(188)에 曹操와 官渡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2년 후 병사하였다.
- 각주 021)
- 각주 022)
-
각주 023)
袁尙(?~207):後漢末 汝南郡 汝陽縣(현재 河南省 商水縣 서북) 사람이며, 字는 顯甫이다. 袁紹의 셋째 아들로 가장 총애를 받았다. 建安 7년(202)에 袁紹가 죽자 무리들은 장자인 元譚을 세우려 하였으나, 袁紹의 측근 審配 등이 袁尙에 아부하여 袁紹의 유언을 위조하여 袁尙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冀州를 거느리게 하였다. 建安 8년(203)에 曹操에게 패한 袁譚에게 구원병의 파병을 거절하여 형제의 틈이 벌어졌고, 袁譚은 도리어 曹操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建安 9년(204)에 曹操는 이 기회를 틈타 본거지인 鄴(현재 河北省 臨漳縣 서남)을 포위하였고, 袁尙은 군대를 내보내 싸웠으나 패하여 冀州를 빼앗기고 달아나 둘째 형 幽州刺史 袁熙에게 달아났다. 建安 10년(205) 袁熙의 部將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熙와 함께 遼西烏丸 蹋頓에게 투항하였다. 建安 12년(207)에 曹操가 三郡烏丸을 격파하자 袁熙와 함께 遼東太守 公孫康에게 의탁하였으나, 公孫康은 袁尙 형제를 죽여 조조에게 수급을 바쳤다.
- 각주 024)
-
각주 025)
冒顿(?~전174년;재위 전209~전174):흉노의 두번 째 單于이다. 冒頓의 의미는 투르크어 또는 몽골어로 영웅을 지칭하는 바가투르(baghatur) 혹은 몽골어의 神聖을 지칭하는 보구드(boghud) 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는 전209년에 아버지인 匈奴의 초대 頭曼單于를 살해하고 스스로 單于가 되었다. 이후 내정을 정비한 다음 東胡와 月氏 등 주변 부족을 격파하고 오르도스의 樓煩과 白羊 등을 병합하였다. 그리고 秦나라가 확보했던 河南 지역을 다시 차지하는 등 세력을 크게 발전시켰다. 나아가 북방의 예니세이강 상류의 丁零과 서북방의 堅昆 등도 복속시켰다. 이를 통해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거대한 유목제국을 건설했다. 漢나라와 싸워 이긴 이후에 화친을 통해 더욱 세력을 확대하는 등 匈奴帝國의 성립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각주 026)
- 각주 027)
- 각주 028)
- 각주 029)
-
각주 030)
五原郡:朔方郡과 함께 전한 武帝 元朔 2년(전127)에 車騎將軍 衛靑이 匈奴를 격파하고 오르도스(Ordos, 河套)지방을 전한이 차지하면서 그곳에 郡縣으로 설치되었다. 五原郡은 본래 秦의 九原郡 지역이었는데, 전210년에 秦始皇이 죽은 후, 진이 멸망하면서 匈奴가 점령했던 곳이다. 치소는 九原縣(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包頭市 서북쪽)이었다. 王莽이 獲降郡으로 고쳤으나, 후한시대에 다시 五原郡으로 복원하였다. 후한 초기에 南匈奴의 䤈落尸逐鞮單于(呼韓邪單于, 재위 48~56) 比가 그 부중을 거느리고 이곳에 주둔하였다. 후한 말에 폐지되었다.
- 각주 031)
- 각주 032)
-
각주 033)
幷州:前漢 武帝 시기에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였다. 太原·上黨·雲中·定襄·雁門·代郡 등 6郡을 관할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山西省 대부분과 河北省 및 內蒙古의 일부에 해당하였다. 後漢時代 治所를 晉陽縣(隋代 太原縣으로 개칭, 현재 山西省 太原市 서남 古城營)에 두었다. 관할구역은 확대되어 西河·五原·朔方·上郡을 더 거느리게 되었고, 代郡은 거의 관계하지 않았다. 이 당시 관할구역은 山西省 대부분과 陝西省 북부, 內蒙古 自治區 狼山·陰山 이남 지역에 해당하였다. 後漢末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建安 18년(213)에 冀州에 합병되었다. 三國 魏 黃初元年(220)에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관할구역은 점차 축소되었다.
-
각주 034)
田豫:三國時代 漁陽郡 雍奴縣(현재 天津市 武淸縣 동북) 사람이며, 字는 國讓이다. 後漢末 公孫瓚의 부하가 되었다. 公孫瓚이 패한 후 曹操에 항복하여 丞相軍謀掾에 임명되었다. 후에 弋陽太守로 전임하였다. 曹彰을 도와 代郡을 공격하여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고 南陽太守로 임명되었다. 曹魏 文帝시기 使持節 護烏丸校尉가 되어 鮮卑 軻比能部를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太和 6년(232)에 汝南太守가 되었다가 후에 靑州의 군대를 이끌고 해로로 遼東郡의 公孫淵을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成山(현재 山東省 榮成市)에서 吳나라가 遼東에 파견한 사자를 죽였다. 正始初에 使持節 護匈奴中郞將 幷州刺史가 되어 州의 경계를 편안하게 하였다. 후에 衛尉로 임명되었으나 고령의 나이와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82세에 죽었다.
- 각주 035)
- 각주 036)
-
각주 037)
畢軌(?~249):三國時代 東平縣(현재 山東省 東平縣 동쪽) 사람이며, 字는 昭先이다. 젊어서 명성이 있었으며, 三國 魏 黃初末에 출사하여 長吏가 되었다. 明帝시기에는 黃門侍郞이 되었고, 아들은 公主와 결혼하였다. 후에 幷州刺史로 승진하였다. 靑龍元年(233)에 군대를 이끌고 鮮卑의 軻比能을 습격하여 樓煩(현재 山西省 寧武縣)에서 패하였다. 또 浮華를 이유로 免官되었다. 正始년간에 中護軍, 侍中尙書, 司隷校尉를 역임하였다. 丁謐 등과 함께 曹爽에게 司馬懿를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正始 10년(249)에 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켜 曹爽을 살해할 때 피살되었다.
- 각주 038)
- 각주 039)
- 각주 040)
색인어
- 이름
- 효무제(孝武帝), 효무제,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헌제(獻帝), 호주천(呼廚泉), 원소(袁紹), [원]상(袁尙), [원]희(袁熙), 답돈(蹋頓), 답돈, 묵특 [선우](冒頓單于), 답돈, 태조(太祖), 태조, 태조, 가비능(軻比能), 전예(田豫), 필궤(畢軌), 명제(明帝), 왕웅(王雄), 가비능, 배송지
- 지명
- 진(秦)나라, 한(漢)나라, 조선(朝鮮), 이사(貳師), 대완(大宛), 공(邛), 작(苲), 야랑(夜郞), 후한, 한나라, 전한(前漢), 한나라, 하북(河北), 운중[군](雲中郡), 오원[군](五原郡), 요수(遼水), 유[주](幽州), 병[주](幷州), 마성[현](馬城縣), 형북(陘北), 한, 후한, 위
- 서명
- 서[경](書經), 시[경](詩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