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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공손하(公孫賀), 조파노(趙破奴) 등을 2차례 파견하였으나 흉노를 보지 못함

  • 국가
    흉노(匈奴)
오유선우 주 001
각주 001)
『漢書』에는 “單于”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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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선 지 3년주 002
각주 002)
漢 武帝 元鼎 6년(전11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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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 이미 한나라남월(南越) 주 003
각주 003)
『漢書』에는 “兩越”로 되어 있다. 漢나라가 東越을 멸한 것은 元封 元年(전110) 로 元鼎 6年(전111)에는 아직 東越이 멸망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漢書』의 기록은 ‘南’라고 해야 할 것을 ‘兩’이라고 잘못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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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멸망시켰으므로주 004
각주 004)
漢 武帝 元鼎 3年(전114) 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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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복(太僕)주 005
각주 005)
太僕 : 관직의 명칭으로 황제의 수레, 가마와 황제의 巡行을 맡아보는 측근으로서 九卿의 하나이다. 公孫賀는 建元 6년(전135)부터 太僕이 되어 太初 2년(전103) 丞相이 될 때까지 太僕을 거의 33년 동안 맡았다. 따라서 公孫賀가 元鼎 6년(전111)에 九原에서 출정할 때 그의 지위는 太僕이고 그런 점에서 太僕을 지냈었다는 표현은 잘못이다. (주5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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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냈던 [공손]하 주 006
각주 006)
『漢書』에는 “公孫賀”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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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내 만 5천 기를 거느리고 구원(九原)에서 2천여 리를 나아가 부저정(浮苴井) 주 007
각주 007)
浮苴井 : 지명으로 九原에서 이천 리 떨어진 곳이다. 지금의 몽골공화국 경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漢輿地圖』에 따르면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達爾罕茂明安聯合旗 百靈廟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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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흉노를 하나도 보지 못했다. 한나라는 또한 종표후(從驃侯)였던 조파노(趙破奴) 주 008
각주 008)
趙破奴 : 九原사람으로 元狩 2년(전121) 北地에서 匈奴를 격퇴한 공이 있어 從驃侯, 湜野侯에 봉해졌다. 元鼎 5년(전112) 구월에 좌천되어 金失侯가 되었고, 元鼎 6년(전111) 匈奴에 출정했기 때문에 그를 故從驃侯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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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내 만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영거(令居)에서 수천 리를 나아가 흉하수(匈河水) 주 009
각주 009)
匈河水 : 강의 명칭으로 令居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 趙信城 서쪽에 있는 匈奴河를 가리킨다. 지금의 甘肅省에 있는 疏勒河이다. 달리 오르콘 강을 지칭하는 것이라고도 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漢書』에는 “匈奴河水”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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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역시 흉노를 하나도 보지 못하였다.주 010
각주 010)
『漢書』에는 “至匈奴河水, 皆不見匈奴一人而還”로 되어 있어, “흉노하수에 이르렀으나 모두 흉노 한 사람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라고 달리 번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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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漢書』에는 “單于”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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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漢 武帝 元鼎 6년(전11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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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漢書』에는 “兩越”로 되어 있다. 漢나라가 東越을 멸한 것은 元封 元年(전110) 로 元鼎 6年(전111)에는 아직 東越이 멸망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漢書』의 기록은 ‘南’라고 해야 할 것을 ‘兩’이라고 잘못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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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漢 武帝 元鼎 3年(전114) 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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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太僕 : 관직의 명칭으로 황제의 수레, 가마와 황제의 巡行을 맡아보는 측근으로서 九卿의 하나이다. 公孫賀는 建元 6년(전135)부터 太僕이 되어 太初 2년(전103) 丞相이 될 때까지 太僕을 거의 33년 동안 맡았다. 따라서 公孫賀가 元鼎 6년(전111)에 九原에서 출정할 때 그의 지위는 太僕이고 그런 점에서 太僕을 지냈었다는 표현은 잘못이다. (주5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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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漢書』에는 “公孫賀”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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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浮苴井 : 지명으로 九原에서 이천 리 떨어진 곳이다. 지금의 몽골공화국 경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漢輿地圖』에 따르면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達爾罕茂明安聯合旗 百靈廟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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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趙破奴 : 九原사람으로 元狩 2년(전121) 北地에서 匈奴를 격퇴한 공이 있어 從驃侯, 湜野侯에 봉해졌다. 元鼎 5년(전112) 구월에 좌천되어 金失侯가 되었고, 元鼎 6년(전111) 匈奴에 출정했기 때문에 그를 故從驃侯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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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匈河水 : 강의 명칭으로 令居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 趙信城 서쪽에 있는 匈奴河를 가리킨다. 지금의 甘肅省에 있는 疏勒河이다. 달리 오르콘 강을 지칭하는 것이라고도 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漢書』에는 “匈奴河水”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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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漢書』에는 “至匈奴河水, 皆不見匈奴一人而還”로 되어 있어, “흉노하수에 이르렀으나 모두 흉노 한 사람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라고 달리 번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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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오유선우, [공손]하, 조파노(趙破奴)
지명
한나라, 남월(南越), 구원(九原), 부저정(浮苴井), 한나라, 영거(令居), 흉하수(匈河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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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공손하(公孫賀), 조파노(趙破奴) 등을 2차례 파견하였으나 흉노를 보지 못함 자료번호 : jo.k_0001_0110_0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