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天成) 원년에 아보기(阿保機)가 부여성(扶餘城)에서 죽음
명종(明宗)이 갓 후계가 되어 공봉관(供奉官)주 001 요곤(姚坤)
주 002을 보내 서신을 받들어 [장종의] 상사(喪事)를 알리게 했는데주 003 [그는] 서루읍(西樓邑)에 도달하여 아보기(阿保機)가 발해(渤海)[를 공격하기 위해 그 곳]에 간 것을 알고는 또 [그를 뒤쫓아가] 신주(愼州)에 도착했는데 산길이 험한 것이 만 리였다. 이윽고 [그 곳에] 도달해 아보기(阿保機)를 알현하기 위해 안내를 받아 궁려(穹廬)주 004로 들어갔는데 아보기는 신장(身長)이 구척(九尺)으로 금포(錦袍)를 입고 커다란 허리띠를 뒤로 드리우고 처(妻)와 평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 있다가 곤(坤)을 불러 접견했다.
곤이 아직 명령을 전하지 않자 아보기(阿保機)가 먼저 물어 말하기를, “듣자하니 너희 한나라 땅[漢土]에는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에 각각 한 명[씩]의 천자(天子)가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냐?”라고 하였다. 곤이 말하기를, “하남[에 있는] 천자[에 관해서]는 금년 4월 1일 낙양(洛陽)
주 005에서 군대의 변란이 있었던 것인데주 006 지금[에서야] 흉흉한 소문이 [여기까지]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하북의 총관령공(總管令公)주 007은 위주(魏州)
주 008[에서] 군란(軍亂)이 일어나자 선제(先帝)가 조(詔)를 내려 [그들을] 제거하고 토벌하라 하셔서 [그렇게] 한 것이고 근자에 듣자하니 내란이 일어나고 군중(軍衆)이 이반(離叛)하여 경성(京城)에는 군주가 없게 되자주 009 상하(上下)가 영공(令公)에게 책서(冊書)를 [받을 것을] 강력하게 권하고 그에게 사직(社稷)을 맡아줄 것을 청한 것으로 지금은 이미 인망(人望)에 따라 제위에 오르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보기(阿保機)가 울부짖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는 하동(河東)[에 있던 천자]와 선대(先代)에 맹약을 맺어주 010 형제가 되었으니 하남(河南)의 천자는 나의 아들주 011이 된다. 근자에 한나라 땅[漢地]에 병란(兵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갑마(甲馬) 오만 기(騎)를 가려 내 친히 낙양(洛陽)으로 가서 내 아들을 도와주려 했는데 또 발해 주변이 아직 평정되지 않아 내 아들이 마침내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니 원통하도다!”라고 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칠 줄 몰랐다.
또 곤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한나라 땅[漢土]의 천자가 처음에 낙양(洛陽)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신속하게 구원하지 않아주 012 이[와 같은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곤이 말하기를, “[상황이] 급하고 절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위주에서 낙양] 땅이 멀리 떨어져 있어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보기가] 또 말하기를, “내 아들이 이미 죽었으니 [후계에 관해] 의당 나의 생각을 모아서 합쳤어야지 어찌 스스로 즉위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곤이 말하기를, “우리의 천자[皇]는 병사들을 통솔한 것이 이십 년으로 [그] 지위는 대총관(大總管)주 013에 이르렀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정예 병사들은 삼십 만으로 무리가 한 마음으로 굳건하게 서로 [그를] 추대(推戴)하니 이를 어기면 화(禍)가 일어남을 곧 보게 될 것이라 [즉위한 것이지] 천황왕(天皇王)의 의지를 알지 못한 것은 아니고 인심이 이와 같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돌욕(突欲)
주 014이 옆에서 곤에게 일러 말하기를, “한(漢)의 사자는 말을 많이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좌씨전[左氏]에 나오는 견우혜전(牽牛蹊田)주 015[에 관한] 설을 인용해 곤[의 말]을 끊자 곤이 말하기를, “하늘에 순응하고 인성에 따르는 것은 필부(匹夫)의 의(義)와 같지 않으니 다만 천황왕(天皇王)이 처음에 국사(國事)를 다스린 것을 어찌 강제로 취한 것과 같다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보기(阿保機)가 이어서 말하기를, “이치는 마땅히 이와 같으나 나는 한나라[漢國]의 아들에게 이러한 어려움이 있고서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듣자하니 이 아이에게는 궁비(宮婢)가 이천 [명], 악관(樂官)이 천 명[이나] 있었고 종일토록 매와 개를 풀어 사냥하고 술 마시기를 즐기고 여색(女色)을 좋아하고 백성들을 아끼지 않고 어리석은 자에게 벼슬을 맡겨 천하를 모두 노하게 만들었다. 내가 직접 이와 같음을 듣고 평소에도 [나라가] 기울어져 뒤집어질 것[傾覆]을 염려했는데 한 달 전에 이미 어떤 자가 와서 [이러한 정황을] 알려주어 나의 아들에게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면 내가 곧 온 나라에 술을 끊고 매와 개를 풀어 주고 악관(樂官)들을 쉬게 해 주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여러 부락[部][출신]의 가악(家樂) 천 명이 있지만 공식적인 연회가 아니면 일찍이 [그들을] 망령되이 기용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행한 바가 나의 아들과 같았다면 또한 응당 오래도록 [황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니 [나의] 이러한 바램을 따라 경계로 삼을 지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한나라[漢國]의 아들은 나와 비록 부자 [관계]이나 또한 일찍이 피차(彼此)가 원수였으니주 016 모두에게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나 그대의 지금 천자에게는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니 [그의 즉위를] 충분히 기뻐하고 좋아해줄 수 있다.주 017 그대가 먼저 돌아가 아뢰면 내가 이어서 말과 만 명의 기병[萬騎]을 [거느리고] 유[주](幽州)와 진[주] 이남에 도달해 그대 나라의 천자와 얼굴을 맞대고 맹약을 맺을 것인데 나는 유주 [땅]이 필요한 것이니 한(漢)의 아들이 [이 땅을] 갖게 해준다면 다시는 한(漢)의 접경에 침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한(漢)이 서천(西川)
주 018을 거두어 얻었다는데주 019 사실이냐?”라고 하였다. 곤이 말하기를, “작년 9월 출병하여 11월 16일에 동·서천(東·西川)을 거두어 항복시켜주 020 병마 이십 만 [두]를 얻었고 [이 때 획득한] 금백(金帛)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황제가 갓 즉위하여 아직 [거란에] 물품을 갖추어 보내지 않은 것일 뿐 곧 이어서 사자를 보내 도달하게 할 것입니다.”주 021라고 하였다.
아보기(阿保機)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듣자니 서천[西]에는 검각(劍閣)
주 022이 있다던데주 023 병마(兵馬)가 무엇을 좇아 [그 곳을] 지나갈 수 있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곤이 말하기를, “서천[川]으로 가는 길이 비록 험준하나 선조가 하남(河南)을 수복(收復)하고 정예 병사 사십 만과 양마 십만 기(騎)에게 [수비하게] 하여 다만 사람들이 그 곳을 지나가고자 하면 편하게 갈 수 있으니 검각은 평지처럼 보일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보기는 한어(漢語)를 잘했는데 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한어(漢語)를 이해할 수 있으나 입을 통해 감히 말하지 않는 것은 부락민[部人]들이 나를 본받[아 한어를 말하]고 병사들이 겁이 많아질 것을 두려워 한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곤이 도달하여 머무른 지 삼일째에 아보기(阿保機)는 병마의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어느 날 저녁, 큰 별이 그[의] 장막 앞에 떨어졌고 이어 [그가] 부여주 024성(扶餘城)에서 죽었는데 이 때가 [후당 명종] 천성(天成) 원년(926) 7월 27일이었다. 그의 처 술률씨(述律氏)
주 025가 친히 무리를 이끌고 그의 상례(喪禮)를 주관하기 위해 서루(西樓)로 돌아가자 곤 또한 따라 가서 소식을 얻고 돌아왔다. 이미 술률씨가 그의 둘째 아들 덕광(德光)
주 026
각주 026)
를 세워 거수(渠帥)로 삼아 국사를 총괄하게 하고 이어 사자를 보내 [아보기의] 상사(喪事)를 알리니 명종(明宗)이 그를 위해 조회를 폐했다[輟朝].주 027 이듬 해 정월, 아보기를 목엽산(木葉山)
주 028에 장사지내고 참람하게[僞] 시호를 내려 ‘대성황제(大聖皇帝)’라 하였다.耶律德光(902~947; 재위 927~947): 요 태조 耶律阿保機의 둘째 아들이다. 본명은 輝屈之이고 字는 德謹이다. 天贊 원년(922) 天下兵馬大元帥가 되어 후량을 공격했다. 아보기를 따라 渤海, 党項, 回紇 등을 정벌하고 戰功을 세웠다. 천현 원년(926) 즉위한 이래 遼의 통치제도를 확립하고 농업 생산을 발전시켰다. 천현 11년(936) 石敬瑭이 太原에서 起兵해 後晉에 반기를 들고 거란에 구원을 요청하자 후당군을 격파하고 석경당을 大晉皇帝에 봉했다. 會同 7년(944) 후진을 공격해 出帝를 부획하고 후진을 멸했다. 대동 원년(947) 국호를 遼로 고쳤다. 廟號는 太宗이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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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6)
耶律德光(902~947; 재위 927~947): 요 태조 耶律阿保機의 둘째 아들이다. 본명은 輝屈之이고 字는 德謹이다. 天贊 원년(922) 天下兵馬大元帥가 되어 후량을 공격했다. 아보기를 따라 渤海, 党項, 回紇 등을 정벌하고 戰功을 세웠다. 천현 원년(926) 즉위한 이래 遼의 통치제도를 확립하고 농업 생산을 발전시켰다. 천현 11년(936) 石敬瑭이 太原에서 起兵해 後晉에 반기를 들고 거란에 구원을 요청하자 후당군을 격파하고 석경당을 大晉皇帝에 봉했다. 會同 7년(944) 후진을 공격해 出帝를 부획하고 후진을 멸했다. 대동 원년(947) 국호를 遼로 고쳤다. 廟號는 太宗이다.
- 각주 027)
- 각주 028)
색인어
- 이름
- 명종(明宗), 요곤(姚坤), 장종, 아보기(阿保機), 아보기(阿保機), 아보기, 곤(坤), 곤, 아보기(阿保機), 곤, 아보기(阿保機), 곤, 곤, 아보기, 곤, 돌욕(突欲), 곤, 곤, 곤, 아보기(阿保機), 곤, 아보기(阿保機), 곤, 아보기, 곤, 곤, 아보기(阿保機), 명종, 술률씨(述律氏), 곤, 술률씨, 덕광(德光), 아보기, 명종(明宗), 아보기, 대성황제(大聖皇帝)
- 지명
- 서루읍(西樓邑), 발해(渤海), 신주(愼州), 한나라, 漢, 하남(河南), 하북(河北), 하남, 낙양(洛陽), 하북, 위주(魏州), 경성(京城), 하동(河東), 하남(河南), 한나라, 漢, 낙양(洛陽), 발해, 한나라, 漢, 낙양(洛陽), 위주, 낙양, 한(漢), 한나라[漢國], 한나라[漢國], 유[주](幽州), 진[주], 유주, 한(漢), 한(漢), 한(漢), 서천(西川), 동, 서천, 東, 西川, 거란, 서천[西], 검각(劍閣), 서천[川], 하남(河南), 검각, 부여성(扶餘城), 후당, 서루(西樓), 목엽산(木葉山)
- 서명
- 좌씨전[左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