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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天成) 원년에 아보기(阿保機)가 부여성(扶餘城)에서 죽음

  • 국가
    거란(契丹)
명종(明宗)이 갓 후계가 되어 공봉관(供奉官)주 001
각주 001)
供奉官: 황제의 신변에서 供職하는 관원을 말한다. 당대에는 侍御使內供奉·翰林供奉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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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곤(姚坤) 주 002
각주 002)
邵晉涵(1743~1796)의 『舊五代史考異』에 따르면, 『通鑑考異』에서는 『蔣宗實錄』을 인용해 “苗坤”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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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 서신을 받들어 [장종의] 상사(喪事)를 알리게 했는데주 003
각주 003)
원문은 “奉書告哀”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齎空函告哀”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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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루읍(西樓邑)에 도달하여 아보기(阿保機)발해(渤海)[를 공격하기 위해 그 곳]에 간 것을 알고는 또 [그를 뒤쫓아가] 신주(愼州)에 도착했는데 산길이 험한 것이 만 리였다. 이윽고 [그 곳에] 도달해 아보기(阿保機)를 알현하기 위해 안내를 받아 궁려(穹廬)주 004
각주 004)
穹廬: 유목민이 치고 사는 장막을 말하며 天幕이라고도 한다. 혹자는 2~3개의 궁려가 모여 1落을 이룬다고 하였다(內田, 1975: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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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들어갔는데 아보기는 신장(身長)이 구척(九尺)으로 금포(錦袍)를 입고 커다란 허리띠를 뒤로 드리우고 처(妻)와 평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 있다가 곤(坤)을 불러 접견했다.
이 아직 명령을 전하지 않자 아보기(阿保機)가 먼저 물어 말하기를, “듣자하니 너희 한나라 땅[土]에는 하남(河南)하북(河北)에 각각 한 명[씩]의 천자(天子)가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냐?”라고 하였다. 이 말하기를, “하남[에 있는] 천자[에 관해서]는 금년 4월 1일 낙양(洛陽) 주 005
각주 005)
洛陽: 周 成王 때 周公이 營建한 古都로 雒邑이라고도 불렀다. 戰國時代 때 洛陽으로 고쳤는데 洛水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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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군대의 변란이 있었던 것인데주 006
각주 006)
同光 4년(926) 魏州에서 일어난 兵亂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李嗣源(훗날 後唐의 明宗)이 출격했으나 반란군과 합세해 洛陽으로 回軍한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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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서야] 흉흉한 소문이 [여기까지]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하북의 총관령공(總管令公)주 007
각주 007)
令公은 中書令의 존칭인데 여기서는 李嗣源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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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주(魏州) 주 008
각주 008)
魏州: 北周 大象 2년(580) 相州를 나누어 설치한 州의 이름이다. 치소는 貴鄕縣(지금의 河北省 大名縣 동북)에 있다. 後唐 동광 원년(923) 興唐府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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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군란(軍亂)이 일어나자 선제(先帝)가 조(詔)를 내려 [그들을] 제거하고 토벌하라 하셔서 [그렇게] 한 것이고 근자에 듣자하니 내란이 일어나고 군중(軍衆)이 이반(離叛)하여 경성(京城)에는 군주가 없게 되자주 009
각주 009)
同光 4년(926) 魏州에서 兵亂을 일으킨 반란군이 洛陽으로 回軍해 장종을 시해한 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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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上下)가 영공(令公)에게 책서(冊書)를 [받을 것을] 강력하게 권하고 그에게 사직(社稷)을 맡아줄 것을 청한 것으로 지금은 이미 인망(人望)에 따라 제위에 오르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보기(阿保機)가 울부짖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는 하동(河東)[에 있던 천자]와 선대(先代)에 맹약을 맺어주 010
각주 010)
아보기가 후당의 이극용과 後梁 협공에 합의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맹약 체결 시점에 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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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되었으니 하남(河南)의 천자는 나의 아들주 011
각주 011)
원문은 “河南天子吾兒也”인데 『資治通鑑』에서는 “河南天子吾朝定兒也”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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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된다. 근자에 한나라 땅[地]에 병란(兵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갑마(甲馬) 오만 기(騎)를 가려 내 친히 낙양(洛陽)으로 가서 내 아들을 도와주려 했는데 또 발해 주변이 아직 평정되지 않아 내 아들이 마침내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니 원통하도다!”라고 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칠 줄 몰랐다.
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한나라 땅[土]의 천자가 처음에 낙양(洛陽)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신속하게 구원하지 않아주 012
각주 012)
원문은 “今漢土天子, 初聞洛陽有難, 不急救”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如今漢土天子, 初聞洛陽有難, 何不急救”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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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말하기를, “[상황이] 급하고 절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위주에서 낙양] 땅이 멀리 떨어져 있어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보기가] 또 말하기를, “내 아들이 이미 죽었으니 [후계에 관해] 의당 나의 생각을 모아서 합쳤어야지 어찌 스스로 즉위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 말하기를, “우리의 천자[皇]는 병사들을 통솔한 것이 이십 년으로 [그] 지위는 대총관(大總管)주 013
각주 013)
大總管: 後唐의 李嗣源을 가리키는 말로 후량을 멸하는 데 공을 세워 中書令·蕃漢內外馬步軍總管에 임명되었고 후당의 內外 군사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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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정예 병사들은 삼십 만으로 무리가 한 마음으로 굳건하게 서로 [그를] 추대(推戴)하니 이를 어기면 화(禍)가 일어남을 곧 보게 될 것이라 [즉위한 것이지] 천황왕(天皇王)의 의지를 알지 못한 것은 아니고 인심이 이와 같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돌욕(突欲) 주 014
각주 014)
突欲: 요 태조 아보기의 長子인 耶律倍를 말하며 곧 東丹王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神冊 初(916~922) 太子가 되었고 天懸 연간(926~937), 부친을 따라 발해를 정벌하고 동란국을 세웠다. 태조가 죽고 나서도 즉위하지 않아 의심을 받게 되자 東平으로 옮겼다. 후당의 明宗이 그에게 李贊華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滑州에 주둔하게 했다. 후에 李從珂에게 살해당했다. 廟號는 義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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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옆에서 에게 일러 말하기를, “한(漢)의 사자는 말을 많이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좌씨전[左氏]에 나오는 견우혜전(牽牛蹊田)주 015
각주 015)
牽牛蹊田: 남의 밭을 질러갔다 해서 그 벌로 소를 빼앗는다는 것으로 죄보다 벌이 지나치게 무거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春秋左氏傳』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牽牛以蹊者, 信有罪矣, 而奪之牛, 罪以重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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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한] 설을 인용해 [의 말]을 끊자 이 말하기를, “하늘에 순응하고 인성에 따르는 것은 필부(匹夫)의 의(義)와 같지 않으니 다만 천황왕(天皇王)이 처음에 국사(國事)를 다스린 것을 어찌 강제로 취한 것과 같다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보기(阿保機)가 이어서 말하기를, “이치는 마땅히 이와 같으나 나는 한나라[漢國]의 아들에게 이러한 어려움이 있고서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듣자하니 이 아이에게는 궁비(宮婢)가 이천 [명], 악관(樂官)이 천 명[이나] 있었고 종일토록 매와 개를 풀어 사냥하고 술 마시기를 즐기고 여색(女色)을 좋아하고 백성들을 아끼지 않고 어리석은 자에게 벼슬을 맡겨 천하를 모두 노하게 만들었다. 내가 직접 이와 같음을 듣고 평소에도 [나라가] 기울어져 뒤집어질 것[傾覆]을 염려했는데 한 달 전에 이미 어떤 자가 와서 [이러한 정황을] 알려주어 나의 아들에게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면 내가 곧 온 나라에 술을 끊고 매와 개를 풀어 주고 악관(樂官)들을 쉬게 해 주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여러 부락[部][출신]의 가악(家樂) 천 명이 있지만 공식적인 연회가 아니면 일찍이 [그들을] 망령되이 기용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행한 바가 나의 아들과 같았다면 또한 응당 오래도록 [황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니 [나의] 이러한 바램을 따라 경계로 삼을 지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한나라[漢國]의 아들은 나와 비록 부자 [관계]이나 또한 일찍이 피차(彼此)가 원수였으니주 016
각주 016)
아보기가 이극용과 후량 협공에 관해 맺은 맹약을 져버리고 후량에 稱臣하여 마침내 이극용이 사망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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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나 그대의 지금 천자에게는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니 [그의 즉위를] 충분히 기뻐하고 좋아해줄 수 있다.주 017
각주 017)
원문은 “亦曾彼此讎敵, 俱有惡心, 與爾今天子無惡, 足得歡好”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亦曾彼此讎敵, 俱有惡心, 與爾今天子無惡, 足得歡好”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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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먼저 돌아가 아뢰면 내가 이어서 말과 만 명의 기병[萬騎]을 [거느리고] 유[주](幽州)진[주] 이남에 도달해 그대 나라의 천자와 얼굴을 맞대고 맹약을 맺을 것인데 나는 유주 [땅]이 필요한 것이니 한(漢)의 아들이 [이 땅을] 갖게 해준다면 다시는 한(漢)의 접경에 침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한(漢)서천(西川) 주 018
각주 018)
西川: 당에서 설치한 方鎭의 이름이다. 당은 전국을 10道로 나누고 至德 2년(757) 劍南道를 東川과 西川으로 나누어 節度使를 설치했는데 劍南西川을 줄여 西川이라 부른다. 치소는 지금의 成都府로 26개 州, 112개의 縣을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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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거두어 얻었다는데주 019
각주 019)
원문은 “漢收得西川”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漢家收得西川”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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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냐?”라고 하였다. 이 말하기를, “작년 9월 출병하여 11월 16일에 ·서천(·西川)을 거두어 항복시켜주 020
각주 020)
원문은 “十一月十六日收下東·西川”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十一月十六日收下東西兩川”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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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 이십 만 [두]를 얻었고 [이 때 획득한] 금백(金帛)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황제가 갓 즉위하여 아직 [거란에] 물품을 갖추어 보내지 않은 것일 뿐 곧 이어서 사자를 보내 도달하게 할 것입니다.”주 021
각주 021)
원문은 “更不復侵入漢界”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更不復侵汝漢界”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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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아보기(阿保機)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듣자니 서천[西]에는 검각(劍閣) 주 022
각주 022)
劍閣: 四川省 劍閣縣의 大劍山과 小劍山 사이의 길로 고대 四川과 陝西間의 주요 通路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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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던데주 023
각주 023)
원문은 “聞西有劍閣”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聞西川有劍閣”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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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兵馬)가 무엇을 좇아 [그 곳을] 지나갈 수 있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이 말하기를, “서천[川]으로 가는 길이 비록 험준하나 선조가 하남(河南)을 수복(收復)하고 정예 병사 사십 만과 양마 십만 기(騎)에게 [수비하게] 하여 다만 사람들이 그 곳을 지나가고자 하면 편하게 갈 수 있으니 검각은 평지처럼 보일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보기는 한어(漢語)를 잘했는데 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한어(漢語)를 이해할 수 있으나 입을 통해 감히 말하지 않는 것은 부락민[部人]들이 나를 본받[아 한어를 말하]고 병사들이 겁이 많아질 것을 두려워 한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도달하여 머무른 지 삼일째에 아보기(阿保機)는 병마의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어느 날 저녁, 큰 별이 그[의] 장막 앞에 떨어졌고 이어 [그가] 부여주 024
각주 024)
夫餘: 渤海國이 설치한 府·縣의 이름으로 치소는 지금의 吉林省 四平西一面城이다. 아보기는 夫餘府를 고쳐 龍州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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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扶餘城)
에서 죽었는데 이 때가 [후당 명종] 천성(天成) 원년(926) 7월 27일이었다. 그의 처 술률씨(述律氏) 주 025
각주 025)
述律氏(?~947): 야율아보기의 황후로 이름은 平이고 술률은 遼姓이다. 천현 2년(927) 耶律德光을 帝로 세우고 자신은 皇太后로 존숭되었는데 大同 원년(947) 손자인 耶律兀欲에 의해 祖州에 유폐되었다가 木葉山에서 죽었다. 『新五代史』에서는 “述律”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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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친히 무리를 이끌고 그의 상례(喪禮)를 주관하기 위해 서루(西樓)로 돌아가자 또한 따라 가서 소식을 얻고 돌아왔다. 이미 술률씨가 그의 둘째 아들 덕광(德光) 주 026
각주 026)
耶律德光(902~947; 재위 927~947): 요 태조 耶律阿保機의 둘째 아들이다. 본명은 輝屈之이고 字는 德謹이다. 天贊 원년(922) 天下兵馬大元帥가 되어 후량을 공격했다. 아보기를 따라 渤海, 党項, 回紇 등을 정벌하고 戰功을 세웠다. 천현 원년(926) 즉위한 이래 遼의 통치제도를 확립하고 농업 생산을 발전시켰다. 천현 11년(936) 石敬瑭이 太原에서 起兵해 後晉에 반기를 들고 거란에 구원을 요청하자 후당군을 격파하고 석경당을 大晉皇帝에 봉했다. 會同 7년(944) 후진을 공격해 出帝를 부획하고 후진을 멸했다. 대동 원년(947) 국호를 遼로 고쳤다. 廟號는 太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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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세워 거수(渠帥)로 삼아 국사를 총괄하게 하고 이어 사자를 보내 [아보기의] 상사(喪事)를 알리니 명종(明宗)이 그를 위해 조회를 폐했다[輟朝].주 027
각주 027)
輟朝: 천자가 병환이나 대신 등의 죽음을 슬퍼하여 朝會를 폐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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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 해 정월, 아보기목엽산(木葉山) 주 028
각주 028)
木葉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奈曼旗 동북 老哈河와 시라무렌강이 합쳐지는 곳에 있던 산의 이름이다. 본래는 거란의 先代가 살던 곳으로 산 위에는 요의 始祖墓가 있다. 거란인들은 행군 때나 봄·가을에 제사지낼 때 白馬와 靑牛를 희생으로 바쳐 이 곳에서 제사를 올렸다. 阿保機를 장사지낸 곳도 바로 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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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장사지내고 참람하게[僞] 시호를 내려 ‘대성황제(大聖皇帝)’라 하였다.

  • 각주 001)
    供奉官: 황제의 신변에서 供職하는 관원을 말한다. 당대에는 侍御使內供奉·翰林供奉 등이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邵晉涵(1743~1796)의 『舊五代史考異』에 따르면, 『通鑑考異』에서는 『蔣宗實錄』을 인용해 “苗坤”이라고 썼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원문은 “奉書告哀”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齎空函告哀”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04)
    穹廬: 유목민이 치고 사는 장막을 말하며 天幕이라고도 한다. 혹자는 2~3개의 궁려가 모여 1落을 이룬다고 하였다(內田, 1975: 34). 바로가기
  • 각주 005)
    洛陽: 周 成王 때 周公이 營建한 古都로 雒邑이라고도 불렀다. 戰國時代 때 洛陽으로 고쳤는데 洛水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同光 4년(926) 魏州에서 일어난 兵亂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李嗣源(훗날 後唐의 明宗)이 출격했으나 반란군과 합세해 洛陽으로 回軍한 일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7)
    令公은 中書令의 존칭인데 여기서는 李嗣源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8)
    魏州: 北周 大象 2년(580) 相州를 나누어 설치한 州의 이름이다. 치소는 貴鄕縣(지금의 河北省 大名縣 동북)에 있다. 後唐 동광 원년(923) 興唐府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09)
    同光 4년(926) 魏州에서 兵亂을 일으킨 반란군이 洛陽으로 回軍해 장종을 시해한 일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10)
    아보기가 후당의 이극용과 後梁 협공에 합의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맹약 체결 시점에 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없다. 바로가기
  • 각주 011)
    원문은 “河南天子吾兒也”인데 『資治通鑑』에서는 “河南天子吾朝定兒也”로 적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2)
    원문은 “今漢土天子, 初聞洛陽有難, 不急救”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如今漢土天子, 初聞洛陽有難, 何不急救”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13)
    大總管: 後唐의 李嗣源을 가리키는 말로 후량을 멸하는 데 공을 세워 中書令·蕃漢內外馬步軍總管에 임명되었고 후당의 內外 군사를 지배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4)
    突欲: 요 태조 아보기의 長子인 耶律倍를 말하며 곧 東丹王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神冊 初(916~922) 太子가 되었고 天懸 연간(926~937), 부친을 따라 발해를 정벌하고 동란국을 세웠다. 태조가 죽고 나서도 즉위하지 않아 의심을 받게 되자 東平으로 옮겼다. 후당의 明宗이 그에게 李贊華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滑州에 주둔하게 했다. 후에 李從珂에게 살해당했다. 廟號는 義宗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5)
    牽牛蹊田: 남의 밭을 질러갔다 해서 그 벌로 소를 빼앗는다는 것으로 죄보다 벌이 지나치게 무거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春秋左氏傳』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牽牛以蹊者, 信有罪矣, 而奪之牛, 罪以重矣.”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6)
    아보기가 이극용과 후량 협공에 관해 맺은 맹약을 져버리고 후량에 稱臣하여 마침내 이극용이 사망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7)
    원문은 “亦曾彼此讎敵, 俱有惡心, 與爾今天子無惡, 足得歡好”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亦曾彼此讎敵, 俱有惡心, 與爾今天子無惡, 足得歡好”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18)
    西川: 당에서 설치한 方鎭의 이름이다. 당은 전국을 10道로 나누고 至德 2년(757) 劍南道를 東川과 西川으로 나누어 節度使를 설치했는데 劍南西川을 줄여 西川이라 부른다. 치소는 지금의 成都府로 26개 州, 112개의 縣을 관할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9)
    원문은 “漢收得西川”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漢家收得西川”으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20)
    원문은 “十一月十六日收下東·西川”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十一月十六日收下東西兩川”으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21)
    원문은 “更不復侵入漢界”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更不復侵汝漢界”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22)
    劍閣: 四川省 劍閣縣의 大劍山과 小劍山 사이의 길로 고대 四川과 陝西間의 주요 通路였다. 바로가기
  • 각주 023)
    원문은 “聞西有劍閣”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聞西川有劍閣”으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24)
    夫餘: 渤海國이 설치한 府·縣의 이름으로 치소는 지금의 吉林省 四平西一面城이다. 아보기는 夫餘府를 고쳐 龍州라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25)
    述律氏(?~947): 야율아보기의 황후로 이름은 平이고 술률은 遼姓이다. 천현 2년(927) 耶律德光을 帝로 세우고 자신은 皇太后로 존숭되었는데 大同 원년(947) 손자인 耶律兀欲에 의해 祖州에 유폐되었다가 木葉山에서 죽었다. 『新五代史』에서는 “述律”로 적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6)
    耶律德光(902~947; 재위 927~947): 요 태조 耶律阿保機의 둘째 아들이다. 본명은 輝屈之이고 字는 德謹이다. 天贊 원년(922) 天下兵馬大元帥가 되어 후량을 공격했다. 아보기를 따라 渤海, 党項, 回紇 등을 정벌하고 戰功을 세웠다. 천현 원년(926) 즉위한 이래 遼의 통치제도를 확립하고 농업 생산을 발전시켰다. 천현 11년(936) 石敬瑭이 太原에서 起兵해 後晉에 반기를 들고 거란에 구원을 요청하자 후당군을 격파하고 석경당을 大晉皇帝에 봉했다. 會同 7년(944) 후진을 공격해 出帝를 부획하고 후진을 멸했다. 대동 원년(947) 국호를 遼로 고쳤다. 廟號는 太宗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7)
    輟朝: 천자가 병환이나 대신 등의 죽음을 슬퍼하여 朝會를 폐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8)
    木葉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奈曼旗 동북 老哈河와 시라무렌강이 합쳐지는 곳에 있던 산의 이름이다. 본래는 거란의 先代가 살던 곳으로 산 위에는 요의 始祖墓가 있다. 거란인들은 행군 때나 봄·가을에 제사지낼 때 白馬와 靑牛를 희생으로 바쳐 이 곳에서 제사를 올렸다. 阿保機를 장사지낸 곳도 바로 여기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명종(明宗), 요곤(姚坤), 장종, 아보기(阿保機), 아보기(阿保機), 아보기, 곤(坤), , 아보기(阿保機), , 아보기(阿保機), , , 아보기, , 돌욕(突欲), , , , 아보기(阿保機), , 아보기(阿保機), , 아보기, , , 아보기(阿保機), 명종, 술률씨(述律氏), , 술률씨, 덕광(德光), 아보기, 명종(明宗), 아보기, 대성황제(大聖皇帝)
지명
서루읍(西樓邑), 발해(渤海), 신주(愼州), 한나라, , 하남(河南), 하북(河北), 하남, 낙양(洛陽), 하북, 위주(魏州), 경성(京城), 하동(河東), 하남(河南), 한나라, , 낙양(洛陽), 발해, 한나라, , 낙양(洛陽), 위주, 낙양, 한(漢), 한나라[漢國], 한나라[漢國], 유[주](幽州), 진[주], 유주, 한(漢), 한(漢), 한(漢), 서천(西川), , 서천, , 西川, 거란, 서천[西], 검각(劍閣), 서천[川], 하남(河南), 검각, 부여성(扶餘城), 후당, 서루(西樓), 목엽산(木葉山)
서명
좌씨전[左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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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天成) 원년에 아보기(阿保機)가 부여성(扶餘城)에서 죽음 자료번호 : jo.k_0018_0137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