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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진무(振武)를 함락시키고 운주(雲州)·삭주(朔州)를 침략함

  • 국가
    거란(契丹)
유수광(劉守光)은 말년에 가혹하고 무자비해져서 군사(軍士)들이 도망치거나 배반하여 모두 거란(契丹)에 [항복해] 들어갔다. 주덕위(周德威) 주 001
각주 001)
周德威: 字는 鎭遠이며 朔州 馬邑(지금의 山西省 朔縣) 출신이다. 용맹하고 지략이 있으며 晉王을 섬겨 騎將이 되었고 공을 쌓아 衙內指揮使가 되었고 潞州를 공격해 탈취한 후 代州刺史·內外蕃漢馬步軍都指揮使가 되었다. 莊宗을 따라 後梁軍을 공격하고 振武節度使·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유수광을 물리친 공을 인정받아 盧龍軍節度使가 되었다. 후량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는데 莊宗이 즉위 후 太傅를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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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幽州)를 공격하고 포위했을 때 연(燕) 주 002
각주 002)
燕: 周 武王이 召公 奭을 燕에 봉하고 薊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것이 곧 燕國이다. 後漢이 이 일대에 幽州를 설치하고 幽燕이라 칭했다. 수 大業 연간(605~617) 涿郡으로 고친 이래 당 武德 원년(618) 유주로 고쳤고 天寶 원년(742)에는 范陽郡이라 하여 河北道에 편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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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의 군민(軍民)은 적에게 약탈당한 바가 많았으나 [그가] 연(燕) [일대]의 인사(人士)를 모두 얻어 그들에게 문서와 법령[文法] 등을 가르치니, 이로 말미암아 점점 번성해졌다.
[천우(天祐)] 13년(916)주 003
각주 003)
실제로는 후량 貞明 2년(91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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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아보기(阿保機)가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그들의 수자(數字)를] 백만(百萬)이라 부르며주 004
각주 004)
『資治通鑑』(卷269: 8805)에서는 “三十萬”이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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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주](麟州) 주 005
각주 005)
麟州: 당 開元 12년(724) 설치한 州의 이름이다. 치소는 新秦縣(지금의 陝西省 神木縣 북쪽)에 있다. 이후 廢置를 반복하다 乾元 원년(758) 이름을 신진군에서 麟州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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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勝州) 주 006
각주 006)
勝州: 수 개황 20년(600) 설치한 州의 이름으로 치소는 楡林(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淮格尒旗 동북)에 있다. 대업 3년(607) 楡林郡으로 고친 이래 勝州, 유림군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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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와서] 진무(振武) 주 007
각주 007)
振武: 振武軍을 가리킨다. 당 景龍 2년(708) 설치했고 치소는 東受降城(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托克托西南)에 있다. 天寶 4년(745) 치소를 金河縣(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和林格尒 서북)으로 옮겼고 후당 때는 치소를 朔州(지금의 山西省 朔縣)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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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함락시키고 운[주](雲州) 주 008
각주 008)
雲州: 당 貞觀 14년(640) 설치했는데 치소는 定唐縣(지금의 山西省 大同市)이다. 永淳 원년(682) 이래 폐치를 반복했고 開元 18년(730) 이래 운주, 雲中郡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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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주](朔州) 주 009
각주 009)
朔州: 북제 천보 6년(555) 설치한 州의 이름이다. 치소는 新城縣(지금의 山西省 朔縣 서남)이다. 수 대업 초 代郡으로 고쳐 설치했고 이어 馬邑郡으로 고쳤다. 당 무덕 4년(621) 다시 삭주로 고쳤다. 後晉이 거란에 분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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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적을] 몰아가니 북변이 크게 소란해졌다. 장종(莊宗)대(代) 주 010
각주 010)
『資治通鑑』(卷269: 8805)에서는 “代州”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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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가서 구원하자주 011
각주 011)
원문은 “莊宗赴援於代”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莊宗赴援於代北”이라 하여 北字를 적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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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무리들이주 012
각주 012)
원문은 “敵衆方退”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虜衆方退”이라 하여 敵을 虜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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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물러났다.
[천우]14년(917),주 013
각주 013)
실제로는 후량 말제 貞明 3년(91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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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주(新州) 주 014
각주 014)
新州: 光啓 연간(885~887)에 설치한 州의 이름이다. 後晉은 이 곳에 威塞軍을 설치해 永興縣을 관할했고 치소는 지금의 河北省 涿鹿縣이다. 遼는 이를 고쳐 奉聖州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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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대장(大將)인 노문진(盧文進) 주 015
각주 015)
盧文進: 范陽(지금의 北京市) 출신으로 字는 國用(일명 大用)이다. 처음에는 劉守光의 騎將이었는데 후당에 항복한 후 州刺史와 新州大將 등을 역임했다. 李存矩를 습격해 살해하고 거란으로 달아나 幽州節度使에 제수되었다. 1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병사를 이끌고 당의 변경을 공격했으나 천성 2년(927) 당에 의탁해 滑州節度使·義成軍節度使·檢校太衛가 되었다. 또 다시 남당에 항복해 左衛上將軍 겸 中書令·宣潤節度使가 되었고 范陽郡王에 봉해졌다. 후에 金陵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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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리에게 핍박을 받자 신주 단련사(團練使)주 016
각주 016)
團練使: 당대 지방의 군사장관을 團練守捉使라 불렀다. 道와 州 단위의 단련사가 있는데 州團練使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聖曆 원년(698) 兗州團練使이다. 당 후기 일부 번진이나 屬郡에도 도단련사와 주단련사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방진이나 한 개 주의 군사 업무를 담당했으나 觀察使가 도단련사를 겸하면서 刺史도 주단련사를 겸하게 되었다. 실제로는 한 개 방진이나 한 개 州의 軍政長官의 역할을 한 것이다. 오대 때에도 계속해서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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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구(李存矩) 주 017
각주 017)
李存矩: 後唐의 태조인 李克用의 아들이다. 『資治通鑑』(卷269: 8811)에서는 그가 당시 威塞軍防禦使였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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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관(祁溝關)에서 죽이고, 도리어 신[주](新州)무[주](武州) 주 018
각주 018)
武州: 당 光啓 연간(885~887)에 설치한 州의 이름이다. 치소는 文德縣(지금의 河北省 宣化縣)에 있다. 후에 毅州로 고쳤다. 오대 후당에서 다시 무주로 고쳤고 후진 天福 초(936~943) 요에 편입되어 歸化州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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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공격했다. 주덕위가 [자신의] 무리로써 그를 공격하자 문진은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곧 거란(契丹)으로 달아났다가 그 무리를 이끌고[와서] 신주를 함락시켰다. 주덕위가 병사 삼만을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려하였으나, 적의 기병[敵騎]이 신주를 구원하여 덕위는 적(敵)에게 패했고 [휘하의 병사들은] 죽거나 부상당해 거의 다 없어졌고 거란(契丹)은 유리한 형세를 틈 타 유주를 공격했다. 이 때 혹자는 거란[의 병사]가 삼십만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오십만이라고도 했는데, 유주계(薊)의 북쪽 곳곳이 적[의] 기병들로 모두 가득 찼다. 장종(莊宗)명종(明宗) 주 019
각주 019)
明宗(867~933; 재위 926~933): 후당의 황제로 沙陀族이며 代北(지금의 山西省 代縣) 출신이다. 본명은 邈佶烈인데 후에 이극용의 養子가 되어 이름을 李嗣源으로 고쳤다가 즉위 후 다시 亶으로 고쳤다. 이극용·존욱 부자를 따라 정벌에 참여해 공을 세우고 相州刺史·昭德軍節度使 등을 역임했다. 同光 4년(926) 魏州에서 일어난 兵亂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격했으나 반란군과 합세해 洛陽으로 回軍했다. 장종이 반란군에게 시해되자 군신들에게 추대되었다. 그 또한 말년에는 가혹한 殺戮을 일삼아 秦王 從榮이 일으킨 반란 과정에서 그 憤을 참지 못하고 죽었다. 明宗은 그의 廟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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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심(李存審)·염보(閻寶)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유주를 구원하게 하여 마침내 그 포위를 풀었는데 [이에 관련해서는] 『장종기(莊宗紀)』 중에서 말하고 있다.

  • 각주 001)
    周德威: 字는 鎭遠이며 朔州 馬邑(지금의 山西省 朔縣) 출신이다. 용맹하고 지략이 있으며 晉王을 섬겨 騎將이 되었고 공을 쌓아 衙內指揮使가 되었고 潞州를 공격해 탈취한 후 代州刺史·內外蕃漢馬步軍都指揮使가 되었다. 莊宗을 따라 後梁軍을 공격하고 振武節度使·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유수광을 물리친 공을 인정받아 盧龍軍節度使가 되었다. 후량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는데 莊宗이 즉위 후 太傅를 추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燕: 周 武王이 召公 奭을 燕에 봉하고 薊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것이 곧 燕國이다. 後漢이 이 일대에 幽州를 설치하고 幽燕이라 칭했다. 수 大業 연간(605~617) 涿郡으로 고친 이래 당 武德 원년(618) 유주로 고쳤고 天寶 원년(742)에는 范陽郡이라 하여 河北道에 편입시켰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실제로는 후량 貞明 2년(916)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4)
    『資治通鑑』(卷269: 8805)에서는 “三十萬”이라고 적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麟州: 당 開元 12년(724) 설치한 州의 이름이다. 치소는 新秦縣(지금의 陝西省 神木縣 북쪽)에 있다. 이후 廢置를 반복하다 乾元 원년(758) 이름을 신진군에서 麟州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勝州: 수 개황 20년(600) 설치한 州의 이름으로 치소는 楡林(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淮格尒旗 동북)에 있다. 대업 3년(607) 楡林郡으로 고친 이래 勝州, 유림군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振武: 振武軍을 가리킨다. 당 景龍 2년(708) 설치했고 치소는 東受降城(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托克托西南)에 있다. 天寶 4년(745) 치소를 金河縣(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和林格尒 서북)으로 옮겼고 후당 때는 치소를 朔州(지금의 山西省 朔縣)로 옮겼다.  바로가기
  • 각주 008)
    雲州: 당 貞觀 14년(640) 설치했는데 치소는 定唐縣(지금의 山西省 大同市)이다. 永淳 원년(682) 이래 폐치를 반복했고 開元 18년(730) 이래 운주, 雲中郡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朔州: 북제 천보 6년(555) 설치한 州의 이름이다. 치소는 新城縣(지금의 山西省 朔縣 서남)이다. 수 대업 초 代郡으로 고쳐 설치했고 이어 馬邑郡으로 고쳤다. 당 무덕 4년(621) 다시 삭주로 고쳤다. 後晉이 거란에 분할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0)
    『資治通鑑』(卷269: 8805)에서는 “代州”라고 적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1)
    원문은 “莊宗赴援於代”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莊宗赴援於代北”이라 하여 北字를 적어 넣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2)
    원문은 “敵衆方退”인데 『舊五代史新輯會證』에서는 『冊府元龜』에 의거해 “虜衆方退”이라 하여 敵을 虜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13)
    실제로는 후량 말제 貞明 3년(917)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4)
    新州: 光啓 연간(885~887)에 설치한 州의 이름이다. 後晉은 이 곳에 威塞軍을 설치해 永興縣을 관할했고 치소는 지금의 河北省 涿鹿縣이다. 遼는 이를 고쳐 奉聖州라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5)
    盧文進: 范陽(지금의 北京市) 출신으로 字는 國用(일명 大用)이다. 처음에는 劉守光의 騎將이었는데 후당에 항복한 후 州刺史와 新州大將 등을 역임했다. 李存矩를 습격해 살해하고 거란으로 달아나 幽州節度使에 제수되었다. 1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병사를 이끌고 당의 변경을 공격했으나 천성 2년(927) 당에 의탁해 滑州節度使·義成軍節度使·檢校太衛가 되었다. 또 다시 남당에 항복해 左衛上將軍 겸 中書令·宣潤節度使가 되었고 范陽郡王에 봉해졌다. 후에 金陵에서 죽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6)
    團練使: 당대 지방의 군사장관을 團練守捉使라 불렀다. 道와 州 단위의 단련사가 있는데 州團練使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聖曆 원년(698) 兗州團練使이다. 당 후기 일부 번진이나 屬郡에도 도단련사와 주단련사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방진이나 한 개 주의 군사 업무를 담당했으나 觀察使가 도단련사를 겸하면서 刺史도 주단련사를 겸하게 되었다. 실제로는 한 개 방진이나 한 개 州의 軍政長官의 역할을 한 것이다. 오대 때에도 계속해서 설치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7)
    李存矩: 後唐의 태조인 李克用의 아들이다. 『資治通鑑』(卷269: 8811)에서는 그가 당시 威塞軍防禦使였다고 적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8)
    武州: 당 光啓 연간(885~887)에 설치한 州의 이름이다. 치소는 文德縣(지금의 河北省 宣化縣)에 있다. 후에 毅州로 고쳤다. 오대 후당에서 다시 무주로 고쳤고 후진 天福 초(936~943) 요에 편입되어 歸化州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19)
    明宗(867~933; 재위 926~933): 후당의 황제로 沙陀族이며 代北(지금의 山西省 代縣) 출신이다. 본명은 邈佶烈인데 후에 이극용의 養子가 되어 이름을 李嗣源으로 고쳤다가 즉위 후 다시 亶으로 고쳤다. 이극용·존욱 부자를 따라 정벌에 참여해 공을 세우고 相州刺史·昭德軍節度使 등을 역임했다. 同光 4년(926) 魏州에서 일어난 兵亂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격했으나 반란군과 합세해 洛陽으로 回軍했다. 장종이 반란군에게 시해되자 군신들에게 추대되었다. 그 또한 말년에는 가혹한 殺戮을 일삼아 秦王 從榮이 일으킨 반란 과정에서 그 憤을 참지 못하고 죽었다. 明宗은 그의 廟號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유수광(劉守光), 주덕위(周德威), 아보기(阿保機), 장종(莊宗), 노문진(盧文進), 이존구(李存矩), 주덕위, 문진, 주덕위, 덕위, 장종(莊宗), 명종(明宗), 이존심(李存審), 염보(閻寶)
지명
거란(契丹), 유주(幽州), 연(燕), 연(燕), 인[주](麟州), 승[주](勝州), 진무(振武), 운[주](雲州), 삭[주](朔州), 대(代), 신주(新州), 신주, 기구관(祁溝關), 신[주](新州), 무[주](武州), 거란(契丹), 신주, 신주, 거란(契丹), 유주, 거란, 유주, 계(薊), 유주
서명
『장종기(莊宗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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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진무(振武)를 함락시키고 운주(雲州)·삭주(朔州)를 침략함 자료번호 : jo.k_0018_0137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