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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흉노와 중원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

  • 국가
    흉노(匈奴)
전한(前漢) 말에 흉노에 대란이 일어나 다섯 선우가 서로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 주 001
각주 001)
呼韓邪單于:생몰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58년에서 31년까지 匈奴의 제14대 單于로 재위하였다. 이름은 稽侯狦이다. 제12대 單于 虛閭權渠單于의 아들이다. 흉노는 기원전 2세기 후반에 漢에 의하여 漠北으로 추방되고, 기원전 1세기에는 내란과 天災의 발생으로 그 세력이 쇠퇴하였다. 부친 單于가 사망한 뒤, 閼氏의 모책으로 握衍朐鞮單于가 섰지만 그에 불만을 품은 貴人들의 추대를 받아 呼韓邪單于로 자립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58년이다. 握衍朐鞮單于가 사망한 뒤, 형인 郅支單于와 함께 흉노를 동서로 양분하였다. 기원전 54년의 일이다. 그 후 기원전 51년 장안으로 와서 宣帝를 알현하고 한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얼마 후 서쪽의 질지선우가 한의 원정군에게 멸망당한 뒤, 元帝 竟寧 1년(전33)에 다시 漢朝에 朝謁하였고, 元帝는 後宮 王昭君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匈奴는 前漢이 멸망할 때까지 기본적으로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呼韓邪單于의 漢에 대한 來朝는 漢과 匈奴의 관계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형성과정에도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來朝 이후 匈奴와 漢은 和親의 約을 맺음으로써 상호간에 독립적인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匈奴가 漢에 대하여 入質과 稱臣하게 되었다. 이것은 漢初 복수의 독립적 권력들이 무질서하게 산재된 상황에서 체결된 和親의 約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또한 武帝시기 중국 이외의 外國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고 郡縣 지배를 천하로 확장하는 단계와도 다르다. 그것은 宣帝 이후 중국과 외국이 主客의 관계로서 상대방의 독립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정연한 질서를 갖추고 공존하는 天下질서를 출현시킨 계기로 그 역사적 의의가 주목된다(김한규, 1988: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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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 나라를 잃어 부락을 이끌고 한(漢)에 들어와 신하를 칭하게 되었다. 황실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병주(幷州) 주 002
각주 002)
幷州:옛 九州의 하나로서, 前漢 13刺史部의 하나였다. 후한시대의 치소는 晉陽縣(지금의 山西省 太原市 서남부의 古城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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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경계를 나누어 그들을 안치시켰다. 그리하여 흉노의 오천여 부락은 에 들어와 삭방(朔方)의 여러 군에 인과 함께 섞여 살게 되었다. 호한야선우의 은혜에 감격하여 입조하니 은 그것을 계기로 계속 머물게 하여 그를 위해 저택을 하사하였다. 또 원래의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하여 선우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또 매년 비단과 곡식, 동전 등을 지급하고 열후처럼 대우하였다. 그의 자손들이 그 뒤를 계승하여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흉노의 부락은 살고 있는 군현에 따라 관리를 두어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편호와 거의 같은 대우를 받았으나 공부(貢賦)를 바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호구가 점점 늘어났고 이들이 북쪽 삭방에 가득 차니 상황은 역전되어 통제가 되지 않았다. 후한(後漢) 말에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오랑캐인들이 너무 많아 도적이 될까 두려우니 미리 예방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건안(建安)년간(後漢 獻帝, 196~220)에 위무제(魏武帝)가 처음으로 흉노의 무리를 5부로 나누었다. 부마다 그 무리 중에서 귀인을 수(帥)로 세우고 또 인(漢人)을 사마(司馬)주 003
각주 003)
司馬:春秋戰國시대에 晉과 楚의 군대에 모두 司馬가 있었다. 晉은 中軍司馬와 上軍司馬를 설치했는데, 이들은 군대의 군사행정관이었다. 前漢시대에는 軍司馬는 將軍의 屬官으로 1급의 군사행정관이었다. 後漢시대에는 大將軍은 5部를 운영하였다. 각 部에는 1명의 校尉(部校尉)가 있었는데, 官秩은 比二千石이었다. 또 軍司馬도 1명씩 있었는데, 이들의 官秩은 比千石이었다. 軍司馬 아래에는 曲이 있고, 曲에는 軍候 1명이 있었는데, 모두 官秩은 六百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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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임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위(魏) 말기에는 다시 수(帥)를 도위(都尉)주 004
각주 004)
都尉:武官 이름으로 秦代에는 郡尉라고 했다가 景帝시기에 이름을 都尉로 바꾸었다. 그는 郡守를 군사적인 면에서 보좌하는 임무를 담당해 郡守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다. 모두 銀印剖符를 받았고 秩이 比二千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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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고쳤다. 좌부도위(左部都尉)가 통솔하는 부락은 만여 낙(落) 정도이고 태원(太原)의 옛날 자씨현(茲氏縣)에 거주하였다. 우부도위(右部都尉)는 6천여 낙(落) 정도를 통솔하였으며 기현(祁縣)에 거주하였다. 남부도위(南部都尉)는 3천여 낙(落) 정도를 통솔하였으며 포자현(蒲子縣)에 거주하였다. 북부도위(北部都尉)는 4천여 낙(落) 정도를 통솔하였으며 신흥현(新興縣)에 거주하였다. 중부도위(中部都尉)는 6천여 낙(落) 정도를 통솔하였으며 대릉현(大陵縣)에 거주하였다.

  • 각주 001)
    呼韓邪單于:생몰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58년에서 31년까지 匈奴의 제14대 單于로 재위하였다. 이름은 稽侯狦이다. 제12대 單于 虛閭權渠單于의 아들이다. 흉노는 기원전 2세기 후반에 漢에 의하여 漠北으로 추방되고, 기원전 1세기에는 내란과 天災의 발생으로 그 세력이 쇠퇴하였다. 부친 單于가 사망한 뒤, 閼氏의 모책으로 握衍朐鞮單于가 섰지만 그에 불만을 품은 貴人들의 추대를 받아 呼韓邪單于로 자립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58년이다. 握衍朐鞮單于가 사망한 뒤, 형인 郅支單于와 함께 흉노를 동서로 양분하였다. 기원전 54년의 일이다. 그 후 기원전 51년 장안으로 와서 宣帝를 알현하고 한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얼마 후 서쪽의 질지선우가 한의 원정군에게 멸망당한 뒤, 元帝 竟寧 1년(전33)에 다시 漢朝에 朝謁하였고, 元帝는 後宮 王昭君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匈奴는 前漢이 멸망할 때까지 기본적으로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呼韓邪單于의 漢에 대한 來朝는 漢과 匈奴의 관계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형성과정에도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來朝 이후 匈奴와 漢은 和親의 約을 맺음으로써 상호간에 독립적인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匈奴가 漢에 대하여 入質과 稱臣하게 되었다. 이것은 漢初 복수의 독립적 권력들이 무질서하게 산재된 상황에서 체결된 和親의 約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또한 武帝시기 중국 이외의 外國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고 郡縣 지배를 천하로 확장하는 단계와도 다르다. 그것은 宣帝 이후 중국과 외국이 主客의 관계로서 상대방의 독립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정연한 질서를 갖추고 공존하는 天下질서를 출현시킨 계기로 그 역사적 의의가 주목된다(김한규, 1988: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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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幷州:옛 九州의 하나로서, 前漢 13刺史部의 하나였다. 후한시대의 치소는 晉陽縣(지금의 山西省 太原市 서남부의 古城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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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司馬:春秋戰國시대에 晉과 楚의 군대에 모두 司馬가 있었다. 晉은 中軍司馬와 上軍司馬를 설치했는데, 이들은 군대의 군사행정관이었다. 前漢시대에는 軍司馬는 將軍의 屬官으로 1급의 군사행정관이었다. 後漢시대에는 大將軍은 5部를 운영하였다. 각 部에는 1명의 校尉(部校尉)가 있었는데, 官秩은 比二千石이었다. 또 軍司馬도 1명씩 있었는데, 이들의 官秩은 比千石이었다. 軍司馬 아래에는 曲이 있고, 曲에는 軍候 1명이 있었는데, 모두 官秩은 六百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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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都尉:武官 이름으로 秦代에는 郡尉라고 했다가 景帝시기에 이름을 都尉로 바꾸었다. 그는 郡守를 군사적인 면에서 보좌하는 임무를 담당해 郡守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다. 모두 銀印剖符를 받았고 秩이 比二千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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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 호한야선우, 獻帝, 위무제(魏武帝)
지명
전한(前漢), 한(漢), , 병주(幷州), , 삭방(朔方), , , , 후한(後漢), 後漢, , 위(魏), 태원(太原), 자씨현(茲氏縣), 기현(祁縣), 포자현(蒲子縣), 신흥현(新興縣), 대릉현(大陵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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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와 중원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 자료번호 : jo.k_0005_0097_01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