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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토욕혼(吐谷渾)과 그 문화

  • 국가
    토욕혼(吐谷渾)
토욕혼(吐谷渾)은 그의 부락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다 함께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 모용외로부터 증손(曾孫), 현손(玄孫)주 001
각주 001)
玄孫:현손이란 자기로부터 5代 아래의 자손을 일컫는다. 『爾雅』 「釋親」, “孫之子爲曾孫, 曾孫之子爲玄孫”이라 하였고 그 郭璞注에 “玄者, 言親屬微昧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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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는 겨우 백여 년 정도일 뿐이다. 나는 현손 이후에 창대해지길 바란다!” 이렇게 말하고 서쪽 음산(陰山) 주 002
각주 002)
陰山:내몽고 오르도스 북쪽에 있는 산. 흥안령과 인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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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가 의지하여 살게 되었다. 영가(永嘉)의 난 때주 003
각주 003)
永嘉之亂:영가는 西晉 제3대 황제인 懷帝의 年號이다(307~312). 西晉 2대 황제인 惠帝 때 조정의 부패로 八王의 亂이 일어나자 永興 원년(304)에 匈奴 귀족인 劉淵이 離石에서 기병하여 국호를 漢이라 하였다. 懷帝 永嘉 4년(310)에 劉淵이 죽고 그 아들 劉聰이 계승하였는데, 다음 해 劉聰은 石勒을 보내 晉軍 10여만 명을 苦縣 寧平城(현재 河南省 鹿邑)에서 섬멸하고 太尉 王淵 등을 포로로 잡아 죽였다. 또한 劉曜를 洛陽에 보내 懷帝를 포로로 잡고 士兵과 백성 3만여 명을 살해하였다. 역사상 이 사건을 ‘永嘉의 亂’이라 한다. 이 난 이후 西晉은 멸망하고 강남에 東晉이 건국되었고 중원에서 대규모로 인구가 이동하여 대량의 僑州僑郡이 설립되어 결과적으로 양자강 중하류가 개발, 발전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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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농(隴)주 004
각주 004)
隴:현재 甘肅省 일대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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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넘어 서쪽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자손들은 서령(西零)주 005
각주 005)
西零:漢代 羌族의 일파. 또는 일반적으로 羌人을 일컫는 말이다. 『文選』 史岑의 <出師頌>에 “西零不順, 東夷遘逆”, 그 呂延濟注에 “西零 西羌也”이라 하여 西零은 곧 西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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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 감송(甘松) 주 006
각주 006)
甘松:세 군데로 비정되는데, 첫째, 兩晉十六國 이전의 甘松은 현재 甘肅省 臨潭 서남쪽을 둘째, 甘肅지방의 舟曲·迭部의 甘松은 北魏시대 설치한 것 셋째, 四川省 松潘의 甘松은 甘松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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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근거하여 살게 되었고 [그 영역이] 백란(白蘭)주 007
각주 007)
白蘭:현재 陵湖, 顎陵湖를 중심으로 하는 黃河 河源지대에 해당한다. 백란은 魏晉시대 처음 등장하는데, 385년에 吐谷渾王 視連이 西秦으로부터 沙洲牧·白蘭王에 책봉되면서 河源 일대가 北朝 정권으로부터 중시받게 되었다. 그 후 視連의 아들 視羆가 이러한 상황을 개선코자 分封을 거절하여 西秦에게 토벌당하자 白蘭으로 후퇴하였다. 또 視連의 손자인 樹洛干 역시 417년 西秦에게 공격당하자 白蘭으로 후퇴하였다. 이것을 보면 白蘭은 魏晉시대 吐谷渾의 중요한 후방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魏書』 권101 「吐谷渾傳」에는 吐谷渾의 세력범위에 대해 약간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데, “吐谷渾遂徙上隴, 止於枹罕暨甘松, 南界昂城·龍涸, 從洮水西南及白蘭數千里中”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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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리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성곽은 있으되 정착하여 살지 않았고, 수초를 따라 옮겨 다녔다. 천막으로 집을 대신하였으며 동물의 살코기와 젖을 주식으로 하였다. 관직으로 장사(長史), 사마(司馬), 장군(將軍)의 직을 두었고 문자를 자못 잘 깨우쳤다. 남자들은 모두 긴 치마를 입었고 머리에는 일종의 두건인 멱리(冪䍦)주 008
각주 008)
冪䍦:冪䍦는 원래 서북방 민족들이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얼굴과 전신 가리개용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당초에는 宮女나 王公의 女婢들의 일상복이었다가 貞觀 말기에서 永徽 초년에는 귀족 여성들도 착용하게 되었다. 이것을 帷帽(그림 참조)라고 하였는데, 궁중의 여인들과 왕공의 귀부인들에게 유행되면서 외출시 사용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좀 더 과감하게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른바 ‘露髻’가 유행되어 당대 여성들은 가마를 타지 않고 말을 타며, 얼굴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남장을 즐겨 입는, 매우 개방적인 패션이 유행하였다고 전한다(『舊唐書』 「輿服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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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썼다. 여자들은 금으로 만든 꽃장식을 머리에 꽂았고 머리를 땋아 뒤로 감은 뒤 진주나 보석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결혼할 때에는 부유한 집안이 결혼 예물을 후하게 지불한 다음 몰래 여자를 데리고 간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여러 부인들을 아내로 삼는다. 형이 죽으면 형의 부인들을 아내로 삼는다. 상복(喪服)에 대한 규정은 장례가 끝나면 곧바로 상복을 벗도록 되어 있다. 이 나라는 일정한 세금이 없으며 필요한 재용이 없으면 곧바로 부유한 집안과 상인들에게서 거둬들이는데, 필요한 만큼 얻게 되면 그만둔다. 사람을 죽이거나 말을 훔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다른 범죄는 물건으로 속죄한다. 그 땅은 대맥(大麥)주 009
각주 009)
大麥:보리, 일명 牟麥 또는 元麥이라고도 한다. 벼과에 속하는 식물로 1년생과 2년생이 있다. 보리씨눈[맥아]은 맥주나 식혜를, 보리줄기는 풀을 짜서 모자 또는 기타 용품을 만들 수 있다. 『呂氏春秋』 「任地」에 “孟夏之昔, 殺三葉而獲大麥”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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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심기에 적당하며 만청(蔓菁)주 485
각주 485)
蔓菁:일명 蕪菁이라고도 한다. 우리말로는 순무라고 하는 식물이다. 십자화과의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이다. 무의 하나로 뿌리가 퉁퉁하며 물이 많고 흰색, 붉은색, 자주색을 띤다. 봄에 노란 꽃이 총상(總狀) 꽃차례로 피고 뿌리와 잎은 비타민을 많이 함유한 채소이다. 유럽이 원산지로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北魏의 『齊民要術』 「蔓菁」편에, “蒸幹蕪青根法:作湯淨洗蕪請青根, 融著一解甕子中, 以葦獲塞甕裏以蔽口, 合著釜上, 系都帶, 以幹牛糞燃火, 竟夜蒸之, 粗細均熟”이라 소개하고 있다. 李時珍의 『本草綱目』에는, “蔓菁根長而白, 其味立苦而短, 莖粗, 葉大而厚廣闊. 夏初起台, 開黃花, 四出如芥. 結角亦如芥, 其子均園, 亦似芥而紫赤色. 六月種者, 根大而葉蠹, 八月種者, 葉美而根小 .惟七月初種者根葉俱良.……削淨爲菹, 甚佳. 今燕京人以瓶醃藏, 謂之‘閉甕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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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이 나며 콩과 조도 난다. 촉마(蜀馬)주 011
각주 011)
蜀馬:일종의 체형이 작은 말을 일컫는다. 서역과 북방의 늠름하고 씩씩한 말과는 달리 체구는 작지만 힘이 세서 장시간 이동하는 데 유리하며, 특히 험준하고 가파른 산길을 오고가는 데 유리한 말이다. 唐의 李匡乂의 『资暇集』 卷中에 “成都府出小駟, 以其便於難路, 號爲蜀馬”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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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우(氂牛)주 012
각주 012)
氂牛:牦牛를 말한다. 체구가 작지만 단단하며 털이 길고 털빛은 흑색과 짙은 갈색 혹은 흑백이 어우러진 젖소무늬가 많다. 추위에 강하며 또한 아무 사료나 잘 먹는다. 꼬리털이 부숭부숭 숱이 많아 깃발 장식으로 사용된다. 『漢書』 「郊祀志上」에 “泰一所用, 如雍一畤物, 而加醴棗脯之屬, 殺一氂牛以爲俎豆牢具, ” 그 顏師古注에 “西南夷長尾髦之牛也”라고 하였다. 또 당대 杜甫는 「錦樹行」에서 “靑草萋萋盡枯死, 天馬跛足隨氂牛”라고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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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특산물이다. 서북지방의 여러 종족들은 그들을 일컬어 아시로(阿柴虜)주 013
각주 013)
阿柴虜:阿柴(재위 417~426)는 吐谷渾의 제9대 왕의 이름이다. 史書에는 비하하여 阿豺라고도 한다. 418년 阿柴의 형인 樹洛干이 병사한 후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 스스로 驃騎將軍·沙州刺史를 칭하였다. 그 후 세력을 확장하여 점차 강성해졌다. 西秦에 대비하기 위해 阿柴는 南朝의 劉宋과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펼쳤다. 423년에 정식으로 사자를 劉宋에 보내자 劉宋의 少帝가 阿柴를 安西將軍·沙州刺史·澆河公·督塞表諸軍事에 책봉하였다. 阿柴는 비록 직접 봉직을 배수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외교정책과 주변 제국과의 친교정책은 吐谷渾이 강성해지는 계기를 마련하여 劉宋은 이때부터 토욕혼을 ‘阿柴虜’라고 불렀다. 吐藩人들도 토욕혼 사람들을 ‘阿柴’ 혹은 ‘阿柴王國’이라고 불렀으니, 그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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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며 혹은 야로(野虜)주 014
각주 014)
野虜:『山海經』 卷二 「河水」二에는 ‘野虜’라는 명칭에 대해, “洮水東北流, 徑吐谷渾中. 吐谷渾者, 始是東燕慕容之枝庶, 因氏其字, 以爲首類之種號也, 故謂之野虜”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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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도 불렀다. 토욕혼은 나이 72세로 죽었고 슬하에 60명의 자식을 두었다. 장자 토연(吐延)이 그 뒤를 이었다.

  • 각주 001)
    玄孫:현손이란 자기로부터 5代 아래의 자손을 일컫는다. 『爾雅』 「釋親」, “孫之子爲曾孫, 曾孫之子爲玄孫”이라 하였고 그 郭璞注에 “玄者, 言親屬微昧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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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陰山:내몽고 오르도스 북쪽에 있는 산. 흥안령과 인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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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永嘉之亂:영가는 西晉 제3대 황제인 懷帝의 年號이다(307~312). 西晉 2대 황제인 惠帝 때 조정의 부패로 八王의 亂이 일어나자 永興 원년(304)에 匈奴 귀족인 劉淵이 離石에서 기병하여 국호를 漢이라 하였다. 懷帝 永嘉 4년(310)에 劉淵이 죽고 그 아들 劉聰이 계승하였는데, 다음 해 劉聰은 石勒을 보내 晉軍 10여만 명을 苦縣 寧平城(현재 河南省 鹿邑)에서 섬멸하고 太尉 王淵 등을 포로로 잡아 죽였다. 또한 劉曜를 洛陽에 보내 懷帝를 포로로 잡고 士兵과 백성 3만여 명을 살해하였다. 역사상 이 사건을 ‘永嘉의 亂’이라 한다. 이 난 이후 西晉은 멸망하고 강남에 東晉이 건국되었고 중원에서 대규모로 인구가 이동하여 대량의 僑州僑郡이 설립되어 결과적으로 양자강 중하류가 개발, 발전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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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隴:현재 甘肅省 일대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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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西零:漢代 羌族의 일파. 또는 일반적으로 羌人을 일컫는 말이다. 『文選』 史岑의 <出師頌>에 “西零不順, 東夷遘逆”, 그 呂延濟注에 “西零 西羌也”이라 하여 西零은 곧 西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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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甘松:세 군데로 비정되는데, 첫째, 兩晉十六國 이전의 甘松은 현재 甘肅省 臨潭 서남쪽을 둘째, 甘肅지방의 舟曲·迭部의 甘松은 北魏시대 설치한 것 셋째, 四川省 松潘의 甘松은 甘松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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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白蘭:현재 陵湖, 顎陵湖를 중심으로 하는 黃河 河源지대에 해당한다. 백란은 魏晉시대 처음 등장하는데, 385년에 吐谷渾王 視連이 西秦으로부터 沙洲牧·白蘭王에 책봉되면서 河源 일대가 北朝 정권으로부터 중시받게 되었다. 그 후 視連의 아들 視羆가 이러한 상황을 개선코자 分封을 거절하여 西秦에게 토벌당하자 白蘭으로 후퇴하였다. 또 視連의 손자인 樹洛干 역시 417년 西秦에게 공격당하자 白蘭으로 후퇴하였다. 이것을 보면 白蘭은 魏晉시대 吐谷渾의 중요한 후방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魏書』 권101 「吐谷渾傳」에는 吐谷渾의 세력범위에 대해 약간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데, “吐谷渾遂徙上隴, 止於枹罕暨甘松, 南界昂城·龍涸, 從洮水西南及白蘭數千里中”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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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冪䍦:冪䍦는 원래 서북방 민족들이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얼굴과 전신 가리개용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당초에는 宮女나 王公의 女婢들의 일상복이었다가 貞觀 말기에서 永徽 초년에는 귀족 여성들도 착용하게 되었다. 이것을 帷帽(그림 참조)라고 하였는데, 궁중의 여인들과 왕공의 귀부인들에게 유행되면서 외출시 사용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좀 더 과감하게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른바 ‘露髻’가 유행되어 당대 여성들은 가마를 타지 않고 말을 타며, 얼굴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남장을 즐겨 입는, 매우 개방적인 패션이 유행하였다고 전한다(『舊唐書』 「輿服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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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大麥:보리, 일명 牟麥 또는 元麥이라고도 한다. 벼과에 속하는 식물로 1년생과 2년생이 있다. 보리씨눈[맥아]은 맥주나 식혜를, 보리줄기는 풀을 짜서 모자 또는 기타 용품을 만들 수 있다. 『呂氏春秋』 「任地」에 “孟夏之昔, 殺三葉而獲大麥”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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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5)
    蔓菁:일명 蕪菁이라고도 한다. 우리말로는 순무라고 하는 식물이다. 십자화과의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이다. 무의 하나로 뿌리가 퉁퉁하며 물이 많고 흰색, 붉은색, 자주색을 띤다. 봄에 노란 꽃이 총상(總狀) 꽃차례로 피고 뿌리와 잎은 비타민을 많이 함유한 채소이다. 유럽이 원산지로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北魏의 『齊民要術』 「蔓菁」편에, “蒸幹蕪青根法:作湯淨洗蕪請青根, 融著一解甕子中, 以葦獲塞甕裏以蔽口, 合著釜上, 系都帶, 以幹牛糞燃火, 竟夜蒸之, 粗細均熟”이라 소개하고 있다. 李時珍의 『本草綱目』에는, “蔓菁根長而白, 其味立苦而短, 莖粗, 葉大而厚廣闊. 夏初起台, 開黃花, 四出如芥. 結角亦如芥, 其子均園, 亦似芥而紫赤色. 六月種者, 根大而葉蠹, 八月種者, 葉美而根小 .惟七月初種者根葉俱良.……削淨爲菹, 甚佳. 今燕京人以瓶醃藏, 謂之‘閉甕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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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蜀馬:일종의 체형이 작은 말을 일컫는다. 서역과 북방의 늠름하고 씩씩한 말과는 달리 체구는 작지만 힘이 세서 장시간 이동하는 데 유리하며, 특히 험준하고 가파른 산길을 오고가는 데 유리한 말이다. 唐의 李匡乂의 『资暇集』 卷中에 “成都府出小駟, 以其便於難路, 號爲蜀馬”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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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氂牛:牦牛를 말한다. 체구가 작지만 단단하며 털이 길고 털빛은 흑색과 짙은 갈색 혹은 흑백이 어우러진 젖소무늬가 많다. 추위에 강하며 또한 아무 사료나 잘 먹는다. 꼬리털이 부숭부숭 숱이 많아 깃발 장식으로 사용된다. 『漢書』 「郊祀志上」에 “泰一所用, 如雍一畤物, 而加醴棗脯之屬, 殺一氂牛以爲俎豆牢具, ” 그 顏師古注에 “西南夷長尾髦之牛也”라고 하였다. 또 당대 杜甫는 「錦樹行」에서 “靑草萋萋盡枯死, 天馬跛足隨氂牛”라고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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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阿柴虜:阿柴(재위 417~426)는 吐谷渾의 제9대 왕의 이름이다. 史書에는 비하하여 阿豺라고도 한다. 418년 阿柴의 형인 樹洛干이 병사한 후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 스스로 驃騎將軍·沙州刺史를 칭하였다. 그 후 세력을 확장하여 점차 강성해졌다. 西秦에 대비하기 위해 阿柴는 南朝의 劉宋과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펼쳤다. 423년에 정식으로 사자를 劉宋에 보내자 劉宋의 少帝가 阿柴를 安西將軍·沙州刺史·澆河公·督塞表諸軍事에 책봉하였다. 阿柴는 비록 직접 봉직을 배수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외교정책과 주변 제국과의 친교정책은 吐谷渾이 강성해지는 계기를 마련하여 劉宋은 이때부터 토욕혼을 ‘阿柴虜’라고 불렀다. 吐藩人들도 토욕혼 사람들을 ‘阿柴’ 혹은 ‘阿柴王國’이라고 불렀으니, 그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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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野虜:『山海經』 卷二 「河水」二에는 ‘野虜’라는 명칭에 대해, “洮水東北流, 徑吐谷渾中. 吐谷渾者, 始是東燕慕容之枝庶, 因氏其字, 以爲首類之種號也, 故謂之野虜”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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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토욕혼(吐谷渾), 모용외, 토욕혼, 토연(吐延)
지명
음산(陰山), 농(隴), 감송(甘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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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욕혼(吐谷渾)과 그 문화 자료번호 : jo.k_0005_0097_004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