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동이전

백제와 여비(餘毘)가 표(表)를 올려 〈역림(易林)〉 등을 요구함

[원가] 7년에 백제왕 여비[비유왕, 재위: 427~455]가 다시 조공하므로 영(映)의 작호를 주었다.주 001
번역주 001)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비유왕 4년조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닫기
[원가] 27년(450)에 [여]비가 글을 올리고 특산물을 바치며 사사로이 대사(臺使)주 002
번역주 002)
臺使 : 사신단의 우두머리를 가리킨 호칭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중국 왕조가 책봉을 통해 府官制를 실시하기 이전 단계에 주변국에서 보낸 사신단의 장관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보는 견해(坂元義種, 1978)가 있다.
닫기
풍야부주 003
번역주 003)
馮野夫 : 407년에 지금의 요령성 朝陽을 중심으로 건국했다가 436년에 멸망한 북연 왕실과 성씨가 같으므로 망명객이거나 망명객의 후예인 듯하다. 436년, 북위가 북연을 침공하자 昭成帝 馮弘은 일족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하였다가 438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472년에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상표문에서 “풍씨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무리들이 바삐 달아나 숨으면서부터 추악한 무리들이 점차 번성하여 마침내 [백제가] 능멸과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원한을 맺고 재난이 30여 년이나 이어지자 재물도 다하고 힘도 다하여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북연 멸망이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을 더욱 격화시켰다면, 송나라가 풍홍의 망명을 적극 수용하려 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백제는 풍씨 일족을 대송 외교에 활용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닫기
를 서하태수주 004
번역주 004)
西河太守 : 중국 고대의 서하는 강명·지명·행정구역명 등으로 널리 쓰였는데, 그중 지명으로는 하남성 湯陰縣의 동쪽 姜水 남쪽을 흔히 가리켰으며, 행정구역명 중 郡名으로는 한나라 때 지금의 산서성 서북부에 위치한 서하군, 삼국시대 위나라가 지금의 산서성 汾陽縣에 두었던 서하군, 남북조시대 송나라가 운남성 옛 大理府 경계에 두었던 서하군 등이 있다. 서하태수는 서하군의 장관을 가리킨다.
닫기
로 가칭하고, 또한 표를 올려 『역림』주 005
번역주 005)
易林 : 중국 한나라 때 焦延壽가 쓴 책으로 모두 16권이다. 64괘를 또 다른 64괘와 배합해서 4,096변괘를 만들고 변괘 하나하나에 점사를 붙여 길흉화복을 표시하였는데(장인성, 2001), 고염무(1613~1682)는 『日知錄』에서 후한 이후의 사람이 초연수를 빙자해 쓴 책이라고 하였다.
닫기
·식점주 006
번역주 006)
式占 : 六壬·太乙·雷公 3종류의 점복을 총칭한 것으로, 式盤을 이용해 점을 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육임식의 식반은 위에 둥근 모양의 天盤이 있고 아래에 네모진 地盤이 있는데, 천반에는 12神將과 28宿, 지반에는 8干4緯, 12支, 28수를 새겼다. 『대당육전(大唐六典)』 太卜署에서는 식점의 쓰임새에 대해 일을 처리할 때 주저함을 결단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적용 분야로 嫁娶·生産·曆注·屋宅·祿命·拜官·祠祭·發病·殯葬 등을 나열하였다(장인성, 2001).
닫기
·요노주 007
번역주 007)
腰弩 : 허리에 차는 휴대용 쇠뇌로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무기이다. 백제에서 송나라에 요노를 달라고 요청한 것은 전쟁에 대비해 신식 무기를 도입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닫기
를 요구하니 태조가 모두 들어주었다. [여]비가 죽자 아들 [여]경[개로왕, 재위: 455~475]이 왕위를 이었다. 세조 대명 원년(457)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 허가하였다.

  • 번역주 001)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비유왕 4년조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臺使 : 사신단의 우두머리를 가리킨 호칭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중국 왕조가 책봉을 통해 府官制를 실시하기 이전 단계에 주변국에서 보낸 사신단의 장관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보는 견해(坂元義種, 1978)가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3)
    馮野夫 : 407년에 지금의 요령성 朝陽을 중심으로 건국했다가 436년에 멸망한 북연 왕실과 성씨가 같으므로 망명객이거나 망명객의 후예인 듯하다. 436년, 북위가 북연을 침공하자 昭成帝 馮弘은 일족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하였다가 438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472년에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상표문에서 “풍씨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무리들이 바삐 달아나 숨으면서부터 추악한 무리들이 점차 번성하여 마침내 [백제가] 능멸과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원한을 맺고 재난이 30여 년이나 이어지자 재물도 다하고 힘도 다하여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북연 멸망이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을 더욱 격화시켰다면, 송나라가 풍홍의 망명을 적극 수용하려 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백제는 풍씨 일족을 대송 외교에 활용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西河太守 : 중국 고대의 서하는 강명·지명·행정구역명 등으로 널리 쓰였는데, 그중 지명으로는 하남성 湯陰縣의 동쪽 姜水 남쪽을 흔히 가리켰으며, 행정구역명 중 郡名으로는 한나라 때 지금의 산서성 서북부에 위치한 서하군, 삼국시대 위나라가 지금의 산서성 汾陽縣에 두었던 서하군, 남북조시대 송나라가 운남성 옛 大理府 경계에 두었던 서하군 등이 있다. 서하태수는 서하군의 장관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5)
    易林 : 중국 한나라 때 焦延壽가 쓴 책으로 모두 16권이다. 64괘를 또 다른 64괘와 배합해서 4,096변괘를 만들고 변괘 하나하나에 점사를 붙여 길흉화복을 표시하였는데(장인성, 2001), 고염무(1613~1682)는 『日知錄』에서 후한 이후의 사람이 초연수를 빙자해 쓴 책이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式占 : 六壬·太乙·雷公 3종류의 점복을 총칭한 것으로, 式盤을 이용해 점을 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육임식의 식반은 위에 둥근 모양의 天盤이 있고 아래에 네모진 地盤이 있는데, 천반에는 12神將과 28宿, 지반에는 8干4緯, 12支, 28수를 새겼다. 『대당육전(大唐六典)』 太卜署에서는 식점의 쓰임새에 대해 일을 처리할 때 주저함을 결단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적용 분야로 嫁娶·生産·曆注·屋宅·祿命·拜官·祠祭·發病·殯葬 등을 나열하였다(장인성, 2001).바로가기
  • 번역주 007)
    腰弩 : 허리에 차는 휴대용 쇠뇌로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무기이다. 백제에서 송나라에 요노를 달라고 요청한 것은 전쟁에 대비해 신식 무기를 도입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백제와 여비(餘毘)가 표(表)를 올려 〈역림(易林)〉 등을 요구함 자료번호 : jd.k_0006_0097_002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