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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관마장관애/관마산성

關馬山城/關馬墻關隘
  • 저필자
    권순홍(성균관대학교 박물관)
  • 시대
    고구려
  • 위치
  • 원소장처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열향 상위촌(吉林省 通化市 集安市 熱鄕 上圍村)
  • 시대
    고구려
  • 유형
규모
둘레: 960m
입지
丁자형 협곡으로 세 길을 막아 산성으로 사용
유적개관
세 갈래의 계곡에 토석혼축 성벽을 쌓았다. 남벽은 길이 60m, 높이 1.5-2.1m, 북벽은 길이 78m, 높이 2.5m, 동벽은 길이 70m이며, 성벽의 잔존 높이는 1m 좌우이다. 문이 3개가 설치되어 있으며, 북벽 바깥쪽에는 환호가 설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考古」1964-2
해설
관마장관애라고 불리기도 하는 관마산성은 집안시에서 서북쪽 6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열시향 상서촌의 남쪽 800m에 자리한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었던 국내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주요 교통로 중 하나는 통화(通化)에서 위사하(葦沙河)를 거슬러 노령(老嶺) 산줄기를 넘어야 하는데, 관마산성은 위사하 상류에서 이 교통로를 차단하고 있다. 차단성은 높은 산이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는 깊고 좁은 협곡지대를 막아 축조하였다. 동쪽으로 가파른 낭떠리지와 절벽으로 이루어진 목선두산(木銑頭山)과 약황정자산(撂荒頂子山)이 있는데, 높이는 100m 전후이다. 위사하(葦沙河)가 동쪽의 낭떠러지 아래쪽을 따라 세차게 북류하고 있다. 이곳은 최근까지도 집안과 통화를 오가는 도로로 사용된 곳이었으나, 현재는 산맥에 터널이 개통되어 집안으로 접근할 때 잘 지나가지 않는 곳이 되었다. 인근에는 고구려 당시의 채석장 유적이 있으며, 약 10km 떨어진 곳에는 대천초소라는 작은 요새가 위치해 있다.
이 성에 대해서는 1962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쳐서, 길림성박물관과 길림사범대학, 길림성철학사회과학연구소, 집안현문물보관소 등이 합동으로 조사하였다.
집안-통화도로 상 가장 좁은 요충지로 협곡의 남북 양쪽 제일 좁은 곳과 목선두구(木銑頭溝) 안쪽 115m 지점에 남벽과 북벽·동벽 등을 축조하여 하나의 성보를 구축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을 패성(壩城) 혹은 관애(關隘)라고도 부르는데, 패(壩)는 제방의 의미로 곡부를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의 협곡은 남북 길이 900m, 동서 너비 120~340m이다.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진 상태이며, 대체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강돌을 조금 다듬어서 쌓았는데, 크기는 대체로 30~50cm 전후이다. 비교적 간단하게 축조된 남벽과는 달리 북벽은 국내성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처음 맞닥뜨려야하는 방어선이었던 관계로 성벽을 견고하게 쌓았을 뿐만 아니라 바깥쪽으로 1~4.6m 지점에 참호. 그 바깥으로 잔존 높이 1.45m의 참호벽까지 구축하였다. 북벽은 속칭 ‘두도관마장(頭道關馬墻)’이라고도 불린다. 잔존 길이는 77.6m이고, 허물어진 성벽의 기저부 너비는 10.5m, 높이는 2.3m이다. 단면을 보면 돌로 바깥면을 가지런하게 쌓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약간 물리면서 축조하였다. 남벽도 북벽과 형세는 비슷하나 심하게 파괴되었다. 동벽은 북쪽으로 목선두산, 남쪽으로 약황정자산까지 직선으로 쌓았다. 길이는 125m, 기저부 너비는 6.5~6.9m, 잔존 높이는 0.5~0.7m이다. 성 내부의 지세는 평탄하지만, 아직 건물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고구려 당시 관마장산성은 위사하를 거슬러 통구분지로 나아가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유적은 서북 7km에 위치한 대천초소(大川哨所)과 함께 위사하 일대에서 도성 외곽의 호형방어선을 구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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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마장관애/관마산성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60_0040_1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