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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한일관계 사료집

예조의 서한과 부젠(豊前)이 서약한 글에 대한 보고

一 (九) 동 3일, 오이노카미님 댁으로 부젠을 불러서 예조의 서한 및 부젠이 서약한 글을 꺼내 보이셨다. 그때 부젠이 거짓으로 “이 서한은 위서입니다. 글을 쓴 자와 도장을 판 자 모두 쓰시마에 있습니다. 또 전에 조선통신사가 왔을 때 막부에서 보낸 답서도 쓰시마에서 위서를 만들고 도장을 찍어서 통신사들에게 건넸습니다. 주 001
각주 001)
이것은 시게오키가 지난 1607년, 1617년, 1624년의 통신사행 때에 교환한 양국의 국서가 모두 쓰시마 번에 의해 개찬되었음을 막부의 중신들 앞에서 폭로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런데 문제는 야나가와씨가 3대에 걸쳐 국서개찬에 깊숙이 관련했고, 심지어 1621년에는 시게오키 자신도 쇼군의 국서를 위조하여 가짜 일본국왕사를 조선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시게오키는 ‘자기무덤파기’가 될 수도 있는 폭탄성 발언을 대체 왜 했을까? 흔히 이 의문에 대한 답으로 ‘그에게는 이 소송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
우선 그의 배후에는 당시 막부의 최고 권력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본문에서도 시게오키는 “이에야스를 근시하게 된 계기는 혼다 마사즈미의 알선에 의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데, 혼다는 이에야스 치세기에 막부의 최고실력자였다. 혼다는 1617년 통신사 때 조선 측에 “금후 조선인(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연행된 조선인)의 본국 송환은 시게오키에게 책임을 일임한다.”고 천명했을 만큼 시게오키를 신임했다. 이에미쓰 정권이 되자 막각의 중추는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 사카이 다다요(酒井忠世), 안도 시게노부(安藤重信)로 바뀌는데, 당시 로주 필두였던 도이와, 외교문서를 담당하던 하야시 라잔(林羅山) 등이 시게오키의 지원군이었다. 시게오키는 그들과의 인맥을 동원하여 지원을 받으면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다고 예상했을 것이다. 또한 당시 막부는 유럽세력을 하나씩 배제하고, 일반 다이묘와 외국과의 독자적인 교역을 금지하며, 외국과의 무역을 나가사키로 집중시켜서 막부가 관리하는, 소위 ‘쇄국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어쩌면 시게오키는 “언젠가 국서개찬은 발각될 테니 여기서 스스로 폭로해버리는 것이 내가 소씨 편이 아닌 막부 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조선과의 통교도 언젠가는 나가사키처럼 막부가 직접 관리하는 형태로 재편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막부 내에 조선통교를 담당할 전문가가 필요해질 테니 그 역할을 내가 해내기 위해서라도 소씨와의 인연을 끊어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소씨의 가신이 아니더라도 그에게는 막부에게서 하사받은 영지가 있었다. (『書き替えられた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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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제가 잘못된 것을 여러 가지로 간언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서약을 저버리고 군신(君臣)의 길을 끊었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각주 001)
    이것은 시게오키가 지난 1607년, 1617년, 1624년의 통신사행 때에 교환한 양국의 국서가 모두 쓰시마 번에 의해 개찬되었음을 막부의 중신들 앞에서 폭로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런데 문제는 야나가와씨가 3대에 걸쳐 국서개찬에 깊숙이 관련했고, 심지어 1621년에는 시게오키 자신도 쇼군의 국서를 위조하여 가짜 일본국왕사를 조선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시게오키는 ‘자기무덤파기’가 될 수도 있는 폭탄성 발언을 대체 왜 했을까? 흔히 이 의문에 대한 답으로 ‘그에게는 이 소송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
    우선 그의 배후에는 당시 막부의 최고 권력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본문에서도 시게오키는 “이에야스를 근시하게 된 계기는 혼다 마사즈미의 알선에 의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데, 혼다는 이에야스 치세기에 막부의 최고실력자였다. 혼다는 1617년 통신사 때 조선 측에 “금후 조선인(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연행된 조선인)의 본국 송환은 시게오키에게 책임을 일임한다.”고 천명했을 만큼 시게오키를 신임했다. 이에미쓰 정권이 되자 막각의 중추는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 사카이 다다요(酒井忠世), 안도 시게노부(安藤重信)로 바뀌는데, 당시 로주 필두였던 도이와, 외교문서를 담당하던 하야시 라잔(林羅山) 등이 시게오키의 지원군이었다. 시게오키는 그들과의 인맥을 동원하여 지원을 받으면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다고 예상했을 것이다. 또한 당시 막부는 유럽세력을 하나씩 배제하고, 일반 다이묘와 외국과의 독자적인 교역을 금지하며, 외국과의 무역을 나가사키로 집중시켜서 막부가 관리하는, 소위 ‘쇄국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어쩌면 시게오키는 “언젠가 국서개찬은 발각될 테니 여기서 스스로 폭로해버리는 것이 내가 소씨 편이 아닌 막부 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조선과의 통교도 언젠가는 나가사키처럼 막부가 직접 관리하는 형태로 재편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막부 내에 조선통교를 담당할 전문가가 필요해질 테니 그 역할을 내가 해내기 위해서라도 소씨와의 인연을 끊어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소씨의 가신이 아니더라도 그에게는 막부에게서 하사받은 영지가 있었다. (『書き替えられた國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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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의 서한과 부젠(豊前)이 서약한 글에 대한 보고 자료번호 : kn.k_0001_0010_0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