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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한나라의 위청과 곽거병이 출전하여 흉노를 치자 선우가 서북쪽으로 도망침

  • 국가
    흉노(匈奴)
그 이듬해주 001
각주 001)
漢 武帝 元狩 4년(전121)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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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한나라에서 [조신들이] 모의하여 생각하였다.주 002
각주 002)
『史記』에는 “以爲”가 “曰”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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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후 [조]신이 선우를 위해 계략을 세워 [선우가] 고비 북쪽에 있으면 한나라의 군대가 [그곳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한나라에서는] 말에게 [곡식을] 배불리 먹인 뒤 10만의 기병을 일으켰는데, 개인의 물건을 지고 따라가는 말이 14만 필로 식량을 운반하는 [말은] 그에 포함되지 않았다.주 003
각주 003)
개인이 지는 의장과 끌고 가는 말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公家가 아니면 나가는 것을 제한하였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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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으로 하여금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게 했는데, 대장군은 정양[군]에서 나가고, 표기장군은 대[군]에서 나가 모두 고비를 건너 흉노를 치기로 약속했다. 선우가 [이 소식을] 듣고 보급품[輜重]을 멀리 [대피시켜] 보낸 다음 정병을 거느리고 고비 북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라 대장군과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는데, 해질 무렵에 큰 바람이 일어나자 한나라 군대가 좌우익 [군대]를 풀어 선우를 포위하였다. 선우는 스스로가 한나라 군대와 당할 수 없다고주 004
각주 004)
“與”는 “如”와 같은데 『史記』에서는 如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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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하고 마침내 [선우]주 005
각주 005)
『史記』에는 ‘單于’가 있는데, 저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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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겨우 친위기병[壯騎]주 006
각주 006)
壯騎 : 親衛軍 또는 親兵集團을 말한다. 匈奴 單于를 비롯한 후대에 등장한 遊牧帝國의 군주들은 모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물리력으로 親兵集團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런 親兵集團의 존재는 部族聯合體的인 국가 성격을 극복하고 군주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자신의 카리스마를 확보하기 위해 조직해내는 것이다(Pritsak, 1981 : 80). 匈奴帝國의 건설자인 冒頓의 경우 鳴鏑을 만들어 군대를 훈련시켜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주197) 참조). 이것은 이런 親衛軍의 존재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예의 하나이다. 이런 親兵集團의 존재는 이후에 건설된 유목국가인 柔然, 突厥, 回鶻, 契丹, 蒙古 등의 경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김호동, 1993 : 15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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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기만 거느린 채 한나라의 포위를 돌파한 다음 서북쪽으로 도망쳤다.주 007
각주 007)
『漢書』 권55 「衛靑霍去病列傳」에서는 이 전투 상황을 보다 자세하게 묘사하였는데, 기록상에 약간 차이가 있다.
趙信이 單于를 위해 계책을 말했다. “漢나라 군대가 이미 고비를 넘어 사람과 말이 지쳤으니 匈奴가 앉아서도 포로를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이에 모든 군수 물자를 멀리 북에 놓고 모두 정예 병사를 이끌고 고비 북방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衛]靑의 군대는 장성을 천여 리 나와서 單于의 군대가 늘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고, 이에 [衛]靑이 武剛車로 고리 모양의 군영을 만들고 5천기를 보내 匈奴에 가서 부닥치게 했다. 匈奴 또한 1만 기를 풀었다. 마침 해가 질 무렵인데, 큰 바람이 일어나 모래와 자갈이 얼굴을 때려 양군이 서로 볼 수 없었고, 漢나라는 더욱 左右翼의 군대를 풀어 單于를 조였다. 單于가 한나라 군대가 많은 것을 보았지만 그래도 병사와 말이 여전히 강해 싸웠으나 匈奴가 불리하자 어스름한 저녁 單于가 마침내 六頭馬車를 타고, 壯騎 수백 명과 함께 한나라의 포위 서북을 뚫고 도망갔다. 때가 이미 어두워졌어도 한나라와 匈奴가 서로 엉겨 죽이고 다친 것이 상당하였다. 한나라 좌익 校尉를 포로로 잡았는데 [그가] 單于가 어두워지기 전에 도망갔다고 하니 한나라 군대가 경장기병을 보내 밤에 추격하였고 [衛]靑의 군대도 그 뒤를 따랐다. 匈奴의 군대가 또한 흩어져 도망하였다. 동이 틀 무렵 2백여 리를 갔으나 單于를 잡지 못하고 사로잡거나 죽인 것을 1만여 급이나 하고 마침내 窴顔山의 趙信城에 이르러 匈奴가 쌓아놓은 곡식을 병사들에게 먹였다. 군대가 하루 머물렀다가 모두 그 성과 나머지 곡식을 태운 다음에 돌아왔다(『漢書』 권55 「衛靑霍去病列傳」 : 2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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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군대가 밤이라 [그를] 추격해 잡지 못하였다. 이 원정에서 베거나 사로잡은 [흉노의]주 008
각주 008)
『史記』에는 “匈奴”가 있는데, 저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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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급과 포로는 만 9천여 명이나 되었고, 북으로 전안산(窴顔山) 주 009
각주 009)
窴顔山 : 산의 명칭으로 ‘寘顔山’이라고도 했다. 지금의 몽골공화국 항가이산맥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한 갈래의 산을 지칭한다. 『史記』에는 “闐顔山”으로 되어 있고, 본전 下卷에서도 “寘顔山”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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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성(趙信城) 주 010
각주 010)
趙信城 : 趙信이 匈奴에 투항한 이후에 쌓은 성을 匈奴가 이렇게 불렀다(康曰, “趙信所作, 因以名城.”). 闐顔山 서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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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 각주 001)
    漢 武帝 元狩 4년(전121)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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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史記』에는 “以爲”가 “曰”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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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개인이 지는 의장과 끌고 가는 말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公家가 아니면 나가는 것을 제한하였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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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與”는 “如”와 같은데 『史記』에서는 如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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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史記』에는 ‘單于’가 있는데, 저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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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壯騎 : 親衛軍 또는 親兵集團을 말한다. 匈奴 單于를 비롯한 후대에 등장한 遊牧帝國의 군주들은 모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물리력으로 親兵集團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런 親兵集團의 존재는 部族聯合體的인 국가 성격을 극복하고 군주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자신의 카리스마를 확보하기 위해 조직해내는 것이다(Pritsak, 1981 : 80). 匈奴帝國의 건설자인 冒頓의 경우 鳴鏑을 만들어 군대를 훈련시켜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주197) 참조). 이것은 이런 親衛軍의 존재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예의 하나이다. 이런 親兵集團의 존재는 이후에 건설된 유목국가인 柔然, 突厥, 回鶻, 契丹, 蒙古 등의 경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김호동, 1993 : 15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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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漢書』 권55 「衛靑霍去病列傳」에서는 이 전투 상황을 보다 자세하게 묘사하였는데, 기록상에 약간 차이가 있다.
    趙信이 單于를 위해 계책을 말했다. “漢나라 군대가 이미 고비를 넘어 사람과 말이 지쳤으니 匈奴가 앉아서도 포로를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이에 모든 군수 물자를 멀리 북에 놓고 모두 정예 병사를 이끌고 고비 북방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衛]靑의 군대는 장성을 천여 리 나와서 單于의 군대가 늘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고, 이에 [衛]靑이 武剛車로 고리 모양의 군영을 만들고 5천기를 보내 匈奴에 가서 부닥치게 했다. 匈奴 또한 1만 기를 풀었다. 마침 해가 질 무렵인데, 큰 바람이 일어나 모래와 자갈이 얼굴을 때려 양군이 서로 볼 수 없었고, 漢나라는 더욱 左右翼의 군대를 풀어 單于를 조였다. 單于가 한나라 군대가 많은 것을 보았지만 그래도 병사와 말이 여전히 강해 싸웠으나 匈奴가 불리하자 어스름한 저녁 單于가 마침내 六頭馬車를 타고, 壯騎 수백 명과 함께 한나라의 포위 서북을 뚫고 도망갔다. 때가 이미 어두워졌어도 한나라와 匈奴가 서로 엉겨 죽이고 다친 것이 상당하였다. 한나라 좌익 校尉를 포로로 잡았는데 [그가] 單于가 어두워지기 전에 도망갔다고 하니 한나라 군대가 경장기병을 보내 밤에 추격하였고 [衛]靑의 군대도 그 뒤를 따랐다. 匈奴의 군대가 또한 흩어져 도망하였다. 동이 틀 무렵 2백여 리를 갔으나 單于를 잡지 못하고 사로잡거나 죽인 것을 1만여 급이나 하고 마침내 窴顔山의 趙信城에 이르러 匈奴가 쌓아놓은 곡식을 병사들에게 먹였다. 군대가 하루 머물렀다가 모두 그 성과 나머지 곡식을 태운 다음에 돌아왔다(『漢書』 권55 「衛靑霍去病列傳」 : 2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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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史記』에는 “匈奴”가 있는데, 저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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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窴顔山 : 산의 명칭으로 ‘寘顔山’이라고도 했다. 지금의 몽골공화국 항가이산맥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한 갈래의 산을 지칭한다. 『史記』에는 “闐顔山”으로 되어 있고, 본전 下卷에서도 “寘顔山”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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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趙信城 : 趙信이 匈奴에 투항한 이후에 쌓은 성을 匈奴가 이렇게 불렀다(康曰, “趙信所作, 因以名城.”). 闐顔山 서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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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조]신, [위]청, [곽]거병
지명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정양[군], 대[군],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전안산(窴顔山), 조신성(趙信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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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위청과 곽거병이 출전하여 흉노를 치자 선우가 서북쪽으로 도망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