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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조명사(朝明史; 아사케노후히토)

조명사(朝明史; 아사케노후히토)
 고려(高麗, 고구려)의 대방국주(帶方國主) 씨한법사(氏韓法史; 시칸하후시)의 후손이다.
 
【주석】
1. 조명사(朝明史)
조명(朝明; 아사케)이라는 씨명은 율령제하 이세국(伊勢國) 조명군(朝明郡) 조명(朝明; 아사)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현재 삼중현(三重縣) 조명군(朝明郡) 조일정(朝日町) 부근이다.
우경의 조명사는 여기에만 보인다.
천평 10년(738) 「주방국정세장(周防國正稅帳)」(『대일본고문서』 2-134)에 기재된 조명사로인(朝明史老人)과 「천평 10년 관인력명(天平十年官人歷名)」(『대일본고문서』24-85)에 기재된 조명사인군(朝明史人君)이 있다.
2. 대방(帶方)
대방은 기원전 108~기원전 107년 사이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진번군(眞番郡) 15속현(屬縣)의 대방현으로, 그 위치는 황해도 사리원(沙里院) 및 봉산군(鳳山郡) 문정면(文井面) 지방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방현은 기원전 82년 진번군의 7현과 함께 낙랑군(樂浪郡)의 속현이 되었고, 기원전 75년경 7현이 모두 낙랑남부도위(樂浪南部都尉)의 관할에 들어가 명맥을 유지하다가 25년에 후한(後漢)이 건국되면서 후한의 지배 체제에 편입되었다. 그 뒤 이 지방은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204년 공손탁을 이은 공손강(公孫康)은 강성해진 한(韓) 및 예(濊)를 견제하고자 대방현을 중심으로 한 낙랑남부도위 관할의 7현을 대방군(帶方郡)으로 개편하였다. 그 영역은 대체로 지금의 경기도 북부에서 황해도 황주(黃州) 자비령(慈悲嶺) 이남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당시의 군(郡)은 지금의 도(道)와 같은 규모로서, 대방군을 이루었던 7현은 대방, 소명(昭明), 열구(列口), 장잠(長岑), 함자(含資), 해명(海冥), 제해(提奚)이다. 대방군은 238년에 위(魏)에 예속되고, 얼마 뒤 다시 진(晉)에 속하였다가, 313년에 낙랑군이 고구려에 함락된 직후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진서(晉書)』 는 290년경의 대방군을 7개 통현(統縣), 4,900호(戶)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방군이 4세기 초 이후에 통솔하던 7개 현이 고구려의 세력권하에 들어가면서 일본 열도로 이주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3. 씨한법사(氏韓法史)
씨한법사는 여기에만 보인다.
율전관(栗田寬)은 ‘국주(國主)’ 다음에 씨(氏) 자가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보고 씨 자를 빼고 ‘고려대방국주한법사지후야.(高麗帶方國主韓法史之後也.)’라고 원문을 수정하였고, 좌백유청(佐伯有淸)은 ‘한씨법사(韓氏法史)’를 잘못 적은 것일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씨한법사는 『신찬성씨록』 에만 보이는 인명이다. 씨한법사가 잘못 기록된 것이라 하더라도 한씨법사나 한법사도 여기에만 보인다. 따라서 조명사(朝明史)는 고구려의 대방국주(帶方國主) 씨한법사(氏韓法史)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조명사와 씨한법사의 관계를 입증할 만한 기록이 「고기」 와 「구전」 등에 존재하지 않고 세운 조상도 의심스러워 미정잡성에 기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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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사(朝明史; 아사케노후히토) 자료번호 : ss.k_0003_0010_0080_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