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조강본궁을 짓고 길야궁도 만듦 /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사신을 보냄
이 해에 비조의 강본(岡本;오카모토)에 새로 궁전 지을 터주 001를 정하였다. 이때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조를 바쳤다. 그래서 감색 장막주 002을 궁전 터에 치고 향응을 베풀었다. 마침내 궁전을 세우고 천황이 옮겨갔다주 003. 이를 후비조강본궁(後飛鳥岡本宮;노치노아스카노오카모토노미야)이라 불렀다주 004. 전신령(田身嶺;타무노미네)주 005의 정상에 담주 006을 둘러쳤다[田身은 산 이름이다. 타무(大務)라고 읽는다.]. 또 산의 정상에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槻樹] 근처에 높은 망루주 007를 세우고, 양규궁(兩槻宮;후타츠키노미야)주 008이라 불렀다. 또한 천궁(天宮;아마츠미야)주 009이라고도 불렀다. 당시 (천황은) 토목 공사를 좋아하여 수공(水工)에게 수로를 파게 하였다. 수로는 향산(香山;카구야마)의 서쪽에서 석상산(石上山;이소노카미노야마)주 010에 이르렀다. 석상산의 돌을 2백 척의 배에 싣고 강을 따라 내려가 궁전의 동쪽 산으로 운반하여 돌을 쌓아 담을 만들었다주 011. 그때 사람들이 “미친 수로다. 이것을 만드는 데 인부주 012 3만여 명이 고생하였으며, 담장을 쌓느라고 인부 7만여 명이 고생하였다. 궁전 짓는 데 쓸 목재가 썩고 산의 정상이 훼손되었다.”라고 비난하였다. 또 “돌로 담을 쌓더라도 쌓자마자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라고 저주하였다[계획한대로 완성하기 전에 이러한 비방을 한 것이 아닐까.]. 또 길야궁(吉野宮;요시노노미야)주 013을 만들었다. 서해사(西海使)주 014
좌백련고승(佐伯連栲繩;사헤키노무라지타쿠나와)주 015[위계가 빠졌다.], 소산하(小山下)주 016
난파길사국승(難波吉士國勝;나니하노키시쿠니카츠)주 017 등이 백제주 018에서 돌아와 앵무새한 쌍을 바쳤다주 019. 강본궁(岡本宮;오카모토노미야)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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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 이름
- 난파길사국승
- 지명
- 비조, 강본, 전신령, 향산, 석상산, 석상산, 좌백련고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