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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여정에 대한 보고

『관영원갑자년조선신사내빙강호왕래일장(寬永元甲子年朝鮮信使來聘江戶往來日帳)』주 001
각주 001)
간에이 원년(1624) 조선통신사가 에도(江戶)에 내빙하여 왕래한 일장(日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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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이(寬永) 원년 갑자년(1624)
조선통신사가 에도(江戶)에 내빙(來聘)하여 왕래한 일장주 002
각주 002)
그날그날의 일을 기록한 장부, 일기장(日記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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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삼사(三使)가 내빙했을 때의 각서(覺書)주 003
각주 003)
① 필요한 사항을 잊지 않도록 기록한 문건. ② 생각나는 대로 적은 기록. 자신의 평론이나 논문 등을 겸손하게 표현해서 붙인 제명(題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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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이 원년(1624)
一. 9월 14일에 통신사가 부산포에 도착했다고 아비루 헤이하치(阿比留平八)가 다음 날 15일에 이 소식을 알려왔다.
一. 이 일을 9월 17일자로 에도(江戶)에 보고하는 서한으로 작성해서 오가와 하치자에몬(小川八左衛門)이 다음 날 18일에 배를 타고 출발했다. 오사카부교(大坂奉行)주 004
각주 004)
오사카마치부교(大坂町奉行): 에도막부가 오사카에 설치한 온고쿠부교(遠国奉行) 중 하나. 온고쿠부교는 에도 이외의 막부 직할령에 두어 그 지역의 정무를 관할하던 직책. 오사카마치부교는 막부의 최고직인 로주(老中)의 지배 하에 오사카 성하(城下), 세쓰(摂津)·가와치(河内) 지배를 목적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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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다 세이자에몬(嶋田淸左衛門)주 005
각주 005)
시마다 나오토키(嶋田直時): 1619년 구가이 마사토시(久貝正俊)와 함께 각각 역고(役高) 3천 석(石)으로 최초로 오사카마치부교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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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구가이 추자에몬(久貝忠左衛門)주 006
각주 006)
구가이 마사토시(久貝正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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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 이 서한을 역참 파발(次飛脚)주 007
각주 007)
쓰기비캬쿠(次飛脚, 繼飛脚): 에도막부가 각 역참에 배치한 파발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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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에도에 전달할 것이다.
〃하치자에몬이 시마다 세이자에몬님과 구가이 추자에몬님 두 사람에게 서한 1통을 전달했다.주 008
각주 008)
원문에는 문장 끝부분에 ‘하치자에몬’이라고 해서 서술어 없이 이름만 기재되어 있다. ‘하치자에몬이 담당하다, 전달하다’라는 의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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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자에몬이 이타쿠라 스오노카미(板倉周防守)주 009
각주 009)
이타쿠라 시게무네(板倉重宗):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 교토쇼시다이는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던 에도막부의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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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도 같은 서한 1통(교토와 오사카의 숙소에 관해 기재된 것)을 전달했다.
〃하치자에몬이 마쓰라 히젠노카미(松浦肥前守)주 010
각주 010)
마쓰라 다카노부(松浦隆信): 히젠(肥前) 히라도번(平戶藩) 3대 번주(藩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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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도 같은 것 1통을 전달했다[간자에몬(勘左衛門)님에게].
    〈간자에몬이란 도노모(主殿)님이라고 한다〉
〃데라자와 시마노카미(寺澤志摩守)주 011
각주 011)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 히젠(肥前) 가라쓰번(唐津藩)의 초대 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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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 같은 것을 1통 보냈다. 단, 루스이(留守居)주 012
각주 012)
번주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부재 중이어서 대신 데라자와의 가신(家臣)인 루스이에게 서한을 전한 것이다. 루스이(留守居)란 에도막부 및 제번(諸藩)에 두었던 직책의 하나이다. 쇼군 또는 번주가 성(城)을 비울 때 성중(城中)에 머물면서 성의 경비 및 제반 업무를 관리하는 직책이다. 이들은 막부 공인의 루스이 조합(留守居組合)을 만들고 정보를 교환하는 등 이른바 각 번의 외교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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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전하고], 또한 쓰시마야 젠베에(善兵衛)에게도 서한을 첨부하여 보냈다. 사자(使者)는 규에몬(久右衛門).
〃구로다 우에몬노스케(黑田右衛門佐)주 013
각주 013)
구로다 다다유키(黑田忠之): 후쿠오카번(福岡藩)의 2대 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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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 같은 것을 1통. 단, 오가와 구라(小川內藏)님에게 [전하고], 구라모토(藏本)주 014
각주 014)
구라모토(藏本, 藏元): 구라야시키(藏屋敷)에서 상품 매매를 대행하고, 장물(藏物) 출납을 하던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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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하카타(博多) 배로 보냈다.
〃모리 나가토노카미(毛利長門守)주 015
각주 015)
모리 히데나리(毛利秀就):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의 뒤를 이어 1623년 조슈번(長州藩) 번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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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가이노카미(甲斐守)주 016
각주 016)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나가토(長門) 조후번(長府藩)의 초대 번주. 모리 히데나리가 1623년 조슈번 번주가 되었지만 히데모토는 히데나리의 후견인이 되어 실질적으로 조슈번을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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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 같은 것을 1통씩, 루스이들에게 [전달했다]. 단, 통신사 건에 관해서는 요코야마 하치자에몬(横山八左衛門)님이라는 사람을 보낼 것이므로 이 서한을 [그 편으로] 발송했다. 또한 그쪽에서 서한의 회신도 하셨다. 하치자에몬 담당.
〃미즈노휴가노카미(水野日向守)주 017
각주 017)
미즈노 가쓰나리(水野勝成): 후쿠야마번(福山藩, 히로시마현 동부) 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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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 서한 1통. 단, 루스이들에게 전했다. 하치자에몬 담당.
〃아사노 단바노카미(淺野但馬守)주 018
각주 018)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 아키(安芸) 히로시마번(廣島藩) 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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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 서한 1통. 단, 루스이들에게 전했다. 하치자에몬 담당.
〃마쓰다이라 구나이쇼유(松平宮內少輔)주 019
각주 019)
이케다 다다카쓰(池田忠雄): 비젠(備前) 오카야마번(岡山藩) 2대 번주. 막부는 도요토미 계열의 다이묘가 많은 서국(西國)에 대한 방어 차원에서 서국과 에도의 중간 지역에 위치하는 오카야마번을 중시하여, 오카야마번을 지배하는 이케다씨에게 마쓰다이라(松平) 성(姓)과 도쿠가와 가문(家紋), 신판(親藩)에 준하는 가격(家格)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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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 서한 1통. 단, 아라오 다쿠미(荒尾內匠)님에게 전했다. 하치자에몬 담당.
  이상은 세토우치(瀨戶內) 지역에서 [통신사를] 접대를 맡은 분들이므로, 향응에 관한 안내는 부젠노카미(豊前守)주 020
각주 020)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1603~1684): 쓰시마번 번주 소씨의 중신(重臣). 야나가와씨는 쇼군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家光)로 이어지는 3대에 걸쳐 쇼군의 측근으로 봉사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집안으로 중앙 권력자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에서 소씨의 다른 가신들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야나가와 가문의 3대 당주인 시게오키(調興)는 에도에서 태어났으며, 조부 시게노부(調信)나 부친 도시나가(智永)와 달리 쓰시마로 귀환하는 것조차 꺼렸다. 이윽고 시게오키가 그의 세력 신장을 발판으로 하여 점차 주군(主君)인 소 요시나리(宗義成)를 경시하자 양자는 대립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시게오키는 1605년 조선의 사절을 후시미(伏見)까지 데려 온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 쇼군 이에야스가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하사한 규슈 히젠(肥前)의 영지 2천8백 석(石) 중 1천 석이 부친 야나가와 도시나가(柳川智永)에게 분급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아, 스스로 소씨의 가신이 아니라 막부의 직신(直臣, 直參旗本)처럼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1631년 양자는 서로를 막부에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1635년 쇼군 이에미츠가 친재(親裁)한 결과 요시나리는 무죄, 시게오키는 쓰가루번(津輕藩)에 유배되는 판결을 받았다. 또한 양자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그간 조선과의 외교에서 쓰시마번이 반복해온 국서개찬(國書改竄) 사실이 폭로되어, 주군과 가신의 불화로 보였던 사태가 국제적인 외교 사건으로 번지기도 했다. 야나가와잇켄(柳川一件)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소씨가 승리한 후, 쓰시마 내에서 야나가와씨는 ‘반역자(逆臣)’로 규정되었다(田代和生, 『書き替えられた国書』, 同『倭館-鎖國時代の日本人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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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한을 보냈다.
一. 마쓰라 다쿠미(松浦內匠)님으로부터 칙사(勅使, 통신사) 소식을 전하기 위해 비찰(飛札)이 왔다. 부산포까지 도착했다고, 부젠노카미(豊前守)가 회신을 보냈다.
一. 도요사키(豊崎)주 021
각주 021)
도요사키(豊崎): 쓰시마의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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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통신사의 배가 분명히 보이면 불을 2개 피울 예정이다. 평상시에는 불을 하나도 피워서는 안 된다고 부젠노카미가 도요사키의 부교(奉行)주 022
각주 022)
부교(奉行): 무가의 직명. 정무를 분장하여 일부 국(局)을 담당하는 자. 그 직무를 실시하는 관공서를 부교쇼(奉行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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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서한으로 알렸다.
一. 9월 19일, 다나카 가쿠타유(田中格太夫)가 부산포에서 출항하여 동 20일 다이후(對府, 후추[府中]주 023
각주 023)
쓰시마 후추(府中)는 현재 쓰시마 이즈하라(厳原)의 옛 이름. 에도시대에 쓰시마번의 정청(政廳)이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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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착했다. 통신사는 9월 28일 부산포에서 승선할 예정이고, 순풍이 불면 그 날 도해할 거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一. 9월 21일, 도요사키에 통신사의 배가 분명히 보이면 마음껏 피우도록 했다. 가령 밤새도록 불을 피우더라도 무방하다.
  보통 때에는 매일 밤 불을 하나씩 피우도록 정했다. 불 피우는 규정이 또다시 바뀌어 이와 같이 하라는 분부가 있었다.
一. 9월 28일, 조선에서 우치야마 사나이스케(內山左內介)가 귀국(歸國)주 024
각주 024)
여기서 국(國)은 일본의 옛 지방 단위인 구니를 말하는 것으로, 우치야마가 쓰시마로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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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쓰시마의] 후추(府中)에는 낮 7시분(時分)주 025
각주 025)
오후 4시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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쯤에 도착했다. 어제 부산포를 출선했다고 한다. 지난 27일에 야로쿠자에몬(彌六左衛門)주 026
각주 026)
이데 야로쿠자에몬(井手彌六左衛門): 통신사 일행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기 위해 왜관에 건너간 쓰시마 번사(藩士). 이데는 1607년, 1617년 통신사행 때에도 ‘통신사 송영(送迎)’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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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를 타고 마루야마(丸山)의 성하(城下)주 027
각주 027)
마루야마란 부산의 왜성(倭城)이다. 임진왜란 때 부산에는 왜성 본성(本城)이 방산(髣山) 근변에, 지성(支城)이 자성대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도 쓰시마 사람들은 자성대의 왜성을 ‘마루야마의 성(丸山の城)’이라 부르곤 했다. 이데 야로쿠자에몬이 탄 배가 27일 자성대 부근의 바다를 돌아본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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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돌았다고 한다. 통신사도 지금 28일 바다를 항해하고 있을 것이 확실하다고 전해왔다.
一. 도요사키에 통신사 도착을 알리는 부교 사자로 산슈(讚州)를 와니우라(鰐浦)주 028
각주 028)
쓰시마의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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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내려 보냈다. 또한 부젠노카미의 도착을 알리러 핫토리 야에몬(服部彌右衛門)을 보냈다.

  • 각주 001)
    간에이 원년(1624) 조선통신사가 에도(江戶)에 내빙하여 왕래한 일장(日帳). 바로가기
  • 각주 002)
    그날그날의 일을 기록한 장부, 일기장(日記帳). 바로가기
  • 각주 003)
    ① 필요한 사항을 잊지 않도록 기록한 문건. ② 생각나는 대로 적은 기록. 자신의 평론이나 논문 등을 겸손하게 표현해서 붙인 제명(題名). 바로가기
  • 각주 004)
    오사카마치부교(大坂町奉行): 에도막부가 오사카에 설치한 온고쿠부교(遠国奉行) 중 하나. 온고쿠부교는 에도 이외의 막부 직할령에 두어 그 지역의 정무를 관할하던 직책. 오사카마치부교는 막부의 최고직인 로주(老中)의 지배 하에 오사카 성하(城下), 세쓰(摂津)·가와치(河内) 지배를 목적으로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시마다 나오토키(嶋田直時): 1619년 구가이 마사토시(久貝正俊)와 함께 각각 역고(役高) 3천 석(石)으로 최초로 오사카마치부교에 임명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구가이 마사토시(久貝正俊). 바로가기
  • 각주 007)
    쓰기비캬쿠(次飛脚, 繼飛脚): 에도막부가 각 역참에 배치한 파발꾼. 바로가기
  • 각주 008)
    원문에는 문장 끝부분에 ‘하치자에몬’이라고 해서 서술어 없이 이름만 기재되어 있다. ‘하치자에몬이 담당하다, 전달하다’라는 의미로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9)
    이타쿠라 시게무네(板倉重宗):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 교토쇼시다이는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던 에도막부의 직책. 바로가기
  • 각주 010)
    마쓰라 다카노부(松浦隆信): 히젠(肥前) 히라도번(平戶藩) 3대 번주(藩主). 바로가기
  • 각주 011)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 히젠(肥前) 가라쓰번(唐津藩)의 초대 번주. 바로가기
  • 각주 012)
    번주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부재 중이어서 대신 데라자와의 가신(家臣)인 루스이에게 서한을 전한 것이다. 루스이(留守居)란 에도막부 및 제번(諸藩)에 두었던 직책의 하나이다. 쇼군 또는 번주가 성(城)을 비울 때 성중(城中)에 머물면서 성의 경비 및 제반 업무를 관리하는 직책이다. 이들은 막부 공인의 루스이 조합(留守居組合)을 만들고 정보를 교환하는 등 이른바 각 번의 외교관 역할을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3)
    구로다 다다유키(黑田忠之): 후쿠오카번(福岡藩)의 2대 번주. 바로가기
  • 각주 014)
    구라모토(藏本, 藏元): 구라야시키(藏屋敷)에서 상품 매매를 대행하고, 장물(藏物) 출납을 하던 상인. 바로가기
  • 각주 015)
    모리 히데나리(毛利秀就):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의 뒤를 이어 1623년 조슈번(長州藩) 번주가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6)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나가토(長門) 조후번(長府藩)의 초대 번주. 모리 히데나리가 1623년 조슈번 번주가 되었지만 히데모토는 히데나리의 후견인이 되어 실질적으로 조슈번을 총괄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7)
    미즈노 가쓰나리(水野勝成): 후쿠야마번(福山藩, 히로시마현 동부) 번주. 바로가기
  • 각주 018)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 아키(安芸) 히로시마번(廣島藩) 번주. 바로가기
  • 각주 019)
    이케다 다다카쓰(池田忠雄): 비젠(備前) 오카야마번(岡山藩) 2대 번주. 막부는 도요토미 계열의 다이묘가 많은 서국(西國)에 대한 방어 차원에서 서국과 에도의 중간 지역에 위치하는 오카야마번을 중시하여, 오카야마번을 지배하는 이케다씨에게 마쓰다이라(松平) 성(姓)과 도쿠가와 가문(家紋), 신판(親藩)에 준하는 가격(家格)을 부여했다. 바로가기
  • 각주 020)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1603~1684): 쓰시마번 번주 소씨의 중신(重臣). 야나가와씨는 쇼군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家光)로 이어지는 3대에 걸쳐 쇼군의 측근으로 봉사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집안으로 중앙 권력자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에서 소씨의 다른 가신들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야나가와 가문의 3대 당주인 시게오키(調興)는 에도에서 태어났으며, 조부 시게노부(調信)나 부친 도시나가(智永)와 달리 쓰시마로 귀환하는 것조차 꺼렸다. 이윽고 시게오키가 그의 세력 신장을 발판으로 하여 점차 주군(主君)인 소 요시나리(宗義成)를 경시하자 양자는 대립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시게오키는 1605년 조선의 사절을 후시미(伏見)까지 데려 온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 쇼군 이에야스가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하사한 규슈 히젠(肥前)의 영지 2천8백 석(石) 중 1천 석이 부친 야나가와 도시나가(柳川智永)에게 분급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아, 스스로 소씨의 가신이 아니라 막부의 직신(直臣, 直參旗本)처럼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1631년 양자는 서로를 막부에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1635년 쇼군 이에미츠가 친재(親裁)한 결과 요시나리는 무죄, 시게오키는 쓰가루번(津輕藩)에 유배되는 판결을 받았다. 또한 양자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그간 조선과의 외교에서 쓰시마번이 반복해온 국서개찬(國書改竄) 사실이 폭로되어, 주군과 가신의 불화로 보였던 사태가 국제적인 외교 사건으로 번지기도 했다. 야나가와잇켄(柳川一件)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소씨가 승리한 후, 쓰시마 내에서 야나가와씨는 ‘반역자(逆臣)’로 규정되었다(田代和生, 『書き替えられた国書』, 同『倭館-鎖國時代の日本人町-』). 바로가기
  • 각주 021)
    도요사키(豊崎): 쓰시마의 항구. 바로가기
  • 각주 022)
    부교(奉行): 무가의 직명. 정무를 분장하여 일부 국(局)을 담당하는 자. 그 직무를 실시하는 관공서를 부교쇼(奉行所)라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3)
    쓰시마 후추(府中)는 현재 쓰시마 이즈하라(厳原)의 옛 이름. 에도시대에 쓰시마번의 정청(政廳)이 있던 곳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4)
    여기서 국(國)은 일본의 옛 지방 단위인 구니를 말하는 것으로, 우치야마가 쓰시마로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5)
    오후 4시 무렵. 바로가기
  • 각주 026)
    이데 야로쿠자에몬(井手彌六左衛門): 통신사 일행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기 위해 왜관에 건너간 쓰시마 번사(藩士). 이데는 1607년, 1617년 통신사행 때에도 ‘통신사 송영(送迎)’ 역할을 수행했다. 바로가기
  • 각주 027)
    마루야마란 부산의 왜성(倭城)이다. 임진왜란 때 부산에는 왜성 본성(本城)이 방산(髣山) 근변에, 지성(支城)이 자성대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도 쓰시마 사람들은 자성대의 왜성을 ‘마루야마의 성(丸山の城)’이라 부르곤 했다. 이데 야로쿠자에몬이 탄 배가 27일 자성대 부근의 바다를 돌아본 것을 의미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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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여정에 대한 보고 자료번호 : kn.k_0005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