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손의 보고서
서울, 1907년 8월 9일
А.П. 이즈볼스키 각하께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각하
일본으로 떠나기 전 이토 후작은 제게 오랜, 그리고 각별히 친근한 대담의 기회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떠나기 전날 밤인 7월 28일의 일로서 제가-그리고 아마 후작도 또한-우리와 일본의 새로운 협정문을 받은 직후였습니다. 후작은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는 저에게 축하를 한 뒤, 그의 염원이자 러시아 정치지도자들의 선견지명과 고도의 국가적 현명함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이 사건주 001을 특히 자축한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에서 같이 일했던 기억, 많은 문제에 대해 견해가 같았다는 등 그가 각하에 대해 말한 수많은 칭찬을 옮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모든 것을 말할 때 유례없이 진지한 어조에 저는 놀랐습니다. 그는 완료된 이 사건이 그의 아주 오랜 생각-각하께서 그렇게 자주 언급하신-과 사실상 일치한다는 것을 어떤 논거들보다 훌륭하게 입증해 주었습니다.
후작은 만일 이 협정이 몇 년 일찍 체결되었다면 사태가 어떻게 되었을지에 관해 장황하게 말하고 그런 다음 이 협정이 미래에 얻게 될 의미를 살짝 언급했습니다. 그가 이 같은 예측을 너무 모호하게 얘기한 탓에 저는 그가 말했던 그대로 그의 말을 정확하게 되뇔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제게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후작이 말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기를 바라지 못할 어느 정도 먼 미래에 아시아의 정세와 그 속에서의 일본의 역할은 현저히 변화할 것인데, 일본에게는 북쪽에 믿을 만한 동맹국을, 러시아는 남쪽에 동맹국을 얻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후작의 말에 따르면 그 때서야 비로소 이번에 서명한 협정의 진정한 의미가 이해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일본의 생각과, 그 때 러시아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제 머리에 문득 떠올랐습니다.
다음 날 후작은 제물포로 떠났으며 거기서 순양함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갔습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축하행진이 시작되어 오이소까지, 그리고 다시 도쿄까지 이어졌습니다. 국민은 한국을 평화적으로 정복한 영웅을 축하해주었습니다.
깊은 존경과 충성을 다하여,
각하의 충복
А. 플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