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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발해성

5. 맺음말

2018년도 야외조사 기간에는 3개 발굴구역-성의 북서쪽 부분에 위치하는 제48구역(동쪽섹터)과 제51구역 그리고 성의 북쪽 가운데 부분에 위치하는 제53구역-에서 각각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제48구역 동쪽섹터(77m2)의 성 안 주거구역에서는 28호 주거지와 경제 구덩이(5호 수혈구덩이)를 포함하는 제5건축면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였다. 28호 주거지는 깊이 40~50cm, 크기 5.5×2.40~2.50m의 수혈에 축조하였다. 이 주거지의 면적은 14m2 정도이다. 주거지에서의 난방은 화덕으로 하였다. 화덕자리는 일부만 잔존하였고 크기는 파악이 되지 못하였다. 또한 경제구덩이(5호 수혈구덩이)도 발굴되었다. 이 5호 수혈구덩이는 절반만이 동쪽섹터에 포함되었다. 이 유구의 아랫건축면에서의 최대 직경은 138cm이다. 5호 수혈구덩이는 여러 건축면들의 레벨에서 사용이 되었으며, 크기는 아래에서 위로 가면서 서로 차이가 났다. 수혈구덩이 내의 퇴적층은 층위적으로 4개의 서로 다른 건축면에 속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제48구역 동쪽섹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완전히 종료되었다.
성벽과 사찰 돌담장 가까이에 바로 인접하여 설정된 제51구역(56m2)에서도 발굴조사가 완전히 종료되었다. 이 구간에서는 성벽이 아직 축조되지 전의 이른 단계부터 시작하여 성이 폐기될 때까지 유적 존속의 전 기간 동안 사용이 되었던 도로의 잔재들이 조사되었다. 이곳에서는 돌을 깔아 사용을 한 도로의 5개 건축면이 확인되었다.
가장 아래의 제5건축면에서는 발굴구역의 경계 내에서 도로가 남서-북동 방향으로 나있었다. 성벽을 축조한 다음의 제4건축면에서는 도로의 방향이 북동쪽은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남서쪽은 성의 서벽을 따라 남쪽 서문지 쪽으로 방향을 바뀌었다. 이 방향은 성 내부를 사찰구역과 구분해 주는 담장이 아직 축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사찰구역은 성 존속의 여러 단계에 다양한 크기의 면적을 차지할 수도 있었고 그리고 금당을 포함하여 다양한 수의 건축물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석축 기초를 가진 담장은 제2건축면 이전에는 축조되지 않았다. 담장은 처음에는 다른 형태를 가졌을 수도 있고 그리고 이후에 재축되었을 것이다. 이 추정만이 제3건축면에서 도로의 방향이 북동쪽에서 동쪽으로 바뀐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동쪽으로 바뀐 도로의 방향은 위의 제1건축면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2015년, 2017년, 2018년의 발굴조사에서는 도로 자체에 대한 것 이외에도 성 안에서의 첫 번째의 거주단계에 대한, 그리고 석축 성벽의 축조와 보수 및 토석을 사용한 증축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구체화하고 보완할 수 있었다. 성벽은 가운데를 흙으로 채운 내벽과 외벽이라는 두 개의 석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은 표면이 황갈색인 현지의 황색 응회암을 깨어낸 블록모양 돌들로 축조하였다. 성벽 축조에 사용한 돌들에는 가장자리를 따로 다듬은 흔적이 없다. 성돌들은 다양한 크기의 모래가 섞인 명갈색 사질토로 된 기초 위에 쌓았다. 돌들을 견고하게 쌓기 위해 점토를 사용하였다. 이전의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와 같이 크라스키노 성의 북서쪽 부분 성벽에는 내측의 석벽이 외측(여장이 존재)의 석벽보다 낮고 그리고 3개의 열로 이루어져 있었다. 석축 성벽의 기초 부분에는 납작한 기단석을 놓았다. 이웃하는 구간에는 지형에 따라 내벽에 3~4열의 돌들이 있었다(1998년도 조사). 성의 동벽 구간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를 통해 볼 때에 약간 늦게 하지만 성벽 축조 시기와 가까운 때에 성문 밖으로 옹성이 추가로 축조되었고, 그리고 그 보다 더 늦은 시기에는 치도 추가로 축조되었다. 성벽 운용의 다음 단계는 성벽 보수와 관련된다. 성벽 보수에는 블록 모양으로 깨어낸 돌들 대신이 거칠게 깨어진 강돌과 덩이 돌 모양의 돌들을 사용하였다. 성벽 존속의 마지막 단계에는 성벽에 흙과 강돌 및 자갈돌을 섞어 증축을 하였다. 증축을 한 것이 흘러내리지 않았고 그리고 증축에 사용된 돌들이 유적이 폐기된 동안 도로 구간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은 사실은 증축된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목조 가장자리 시설을 두었을 가능성을 보여 줄 것이다. 하지만 목조 시설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못하였는데 아마도 기후 조건과 토양의 특징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발굴조사 성과는 성내의 층위를 계속해서 조사한 것이다. 성의 북서쪽 부분에서는 주거지와 경제 건축물들에 대한 조사를 토대로 5~6개의 건축면이 구분되었다. 북쪽 가운데 부분(제47구역 섹터 3)에서는 좁은 범위 내에서 4~5개의 도로 건축면이 조사된 바 있다. 그리고 이제는 성벽과 사찰 부근의 도로에서 5개의 건축면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층위 조사는 이 유적의 여러 구간들에 5개 이상의 건축면이 있음을, 다시 발해의 성 존속에서 5개 이상의 단계가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또한 도로 망과 성 존속 모든 기간에 걸친 성 내부 건축물들 사이의 관계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서로 다른 도로 건축면들에서 출토된 다량의 고고학 자료들은 성이 기능을 한 전 기간에 걸친 다양한 종류 유물들의 변화 과정을 추적할 수 있게 한다.
제53구역(291m2)에서는 여러 건축면들에 속하는 유구들이 조사되었다. 유구의 대부분은 주거지 혹은 경제 건축물에 해당된다. 윗건축면에는 ‘ㄷ’자 모양의 2줄 고래와 현관-베란다를 가진 26호 주거지가 해당된다. 이 주거지는 모서리들이 거의 방위 방향으로 배치되었다. 2개의 경제 구덩이와 한쪽 가장자리를 돌로 마감을 한 성토기단 건축물도 이 건축면에 속한다. 성토기단 건축물은 크기가 6.6×7m이고, 면적은 46.2m2이다. 이 건축물이 공공의 건물이었는지 아니면 개인 소유의 건물이었는지 분명하지 못하다. 경제 마당의 경계와 크기는 발굴조사가 더 이루어지만 파악이 될 것이다.
제2건축면에는 25호 주거지가 포함된다. 이 주거지는 일부가 26호 주거지의 아래에 위치한다. 주거지의 방향은 26호 주거지와 동일하다. 이 두 주거지의 방향과 주거지가 축조된 곳의 위치는 성 내부에 단일한 평면배치 구획이 있었음을 말하며, 이 사실은 유적 내의 다른 곳들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도 뒷받침 되었다.
제3건축면에는 27호 주거지와 경제 구덩이가 해당된다. 27호 주거지에서는 불에 달구어진 고래의 흔적이 일부 확인되었다.
제4건축면에서는 후대의 한인 농부들이 만든 시설물들에 의해 훼손이 된 건축 건축물이 일부 잔존한 형태로 확인되었다. 이 레벨에서는 경제 구덩이들과 발굴구역에 일부만 포함이 된 경제 건축물들이 발견되었다.
향후의 발굴조사에서는 유적 내 서로 다른 지점들에 대한 층위조사가 하나의 방향이 되어야할 것이다. 주거 및 경제 건축물들이 대개 일부만 남아 있는 성안 구역들에 대한 발굴조사도 반드시 필요하다. 주거 및 경제 건축물들은 발해인들의 건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성내 각각 구역의 규모가 아직 파악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훨씬 더 넓은 면적으로 도로도 조사할 필요가 있다. 관청건물도 아직 발굴되지 못하였다. 성벽도 충분히 조사되지는 못하였다. 유적의 시기구분과 관련된 (건축면 구분) 위의 논의들도 검증과 확인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단지 향후의 수년 내에 해결을 해야 하는 긴 과제 목록 중의 일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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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음말 자료번호 : kr.d_0015_003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