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신씨(肅愼氏)의 문화와 역사
숙신씨주 001
번역주 001)
는 읍루라는 이름도 있다.주 002 肅愼氏 : 숙신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竹書紀年』의 “帝舜二十五年 息愼來朝 貢弓矢”이다. 『史記』 卷1, 五帝本紀 帝舜條에도 “南撫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羌 北山戎·發·息愼 東長·鳥夷”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後漢 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고 하여 여기서의 息愼이 곧 肅愼의 이칭임을 알 수 있다. 또 『逸周書』 王會解에는 “西面正北方稷愼大塵”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晉의 孔晁의 주석에 따르면 “稷愼肅愼也 貢塵似鹿”이라고 하여 稷愼 또한 肅愼의 이칭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 『春秋左傳』 昭公 9년조에도 “肅愼·燕·毫 吾北土也”라는 기록이 있고, 『國語』 卷5,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 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 遠矣 此肅愼之矢也”라는 기록이 있다. 『書序』에도 숙신과 관련하여 “盛王 旣伐東夷 肅愼來賀 王俾榮伯 作賄肅愼之命”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가운데 帝舜代의 息愼은 북방에 위치하였다고 나오는 반면, 성왕대의 息愼은 동이 특히 중국 대륙의 동쪽 방면과 관계된 것으로 나온다. 이처럼 先秦 시기의 숙신은 그 위치가 동방인지, 북방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에 대해 肅愼·息愼 혹은 稷愼 등은 고대 중국인들이 중국의 북방 혹은 동북 지방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일컫던 막연한 호칭으로서,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향을 나타내는 ‘東’ 또는 ‘東北’과 관계가 있었던 명칭이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保井克己, 1982). 더욱이 주 성왕 이후 후한대까지 숙신의 공헌기록이 보이지 않아, 후한대까지는 숙신을 특정 주민집단과 연결시키는 인식이 확립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沈一民, 2009). 한편,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숙신과 관련된 挹婁의 열전이 등장하여, 3세기에는 숙신이라는 이름이 이미 읍루로 대체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즉 周代에는 막연한 개념으로 肅愼이라고 통칭하였으나 曹魏와 고구려의 전쟁 이후 이 지방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이때 만주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肅愼 대신 挹婁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池內宏은 중국 古典상에 유명한 古肅愼氏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고증할 방법은 없으며, 三國時代에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에 새로이 들어온 挹婁가 마침 楛矢·石砮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古肅愼氏와 挹婁를 동일하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池內宏, 1951). 이후 『宋書』와 『晉書』, 『北齊書』 등의 중국 정사와 『三國史記』, 〈광개토왕릉비〉 등의 국내 사료에서도 숙신의 명칭이 확인된다.
번역주 002)
불함산주 003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60일 정도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잇닿아 있고, 서쪽으로 구만한국주 004에 접하며, 북쪽으로 약수에주 005 이른다. 그 땅의 경계는 동서남북 수천 리이다. 숙신과 읍루의 관계에 대해서는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의 “古之肅愼氏之國也”와 『後漢書』 卷85, 挹婁의 “古肅愼之國也”이 전한다. 또 『翰苑』 所引 『魏略』에 “夫餘國在玄苑長城北 去玄菟千餘里 南接句驪 東接挹婁 卽肅愼國者也”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는 先秦 문헌에 보이는 肅愼과 『三國志』 東夷傳의 읍루를 기록에서 전하는 것처럼 같은 종족집단으로 보고 있지 않다(한규철, 1988 ; 김락기, 2013). 다만, 『三國志』 東夷傳의 읍루와 『晉書』 四夷列傳의 肅愼氏는 양자의 서술 내용으로 보아 동일한 종족집단을 대상으로 한 서술로 인정되는데, 차이도 고려된다(이정빈, 2019).
깊은 산 외진 골짜기에 사는데, 그 길이 험하고 가로막혀서, 수레와 말이 오가지 못한다. 여름이면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고, 겨울이면 굴에서 산다. 부자가 대를 이어 군장이 된다. 문자가 없어서, 말로 약속한다. 말이 있지만 타지 않고, 다만 재산으로 여길 뿐이다. 소와 양은 없고, 대개 돼지를 키워,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은 입으며, 털을 길쌈하여 직물을 만든다.
[숙신에는] 낙상이라는 이름의 나무가 있는데, 만약 중국에서 성군이 즉위하면 곧 그 나무에서 옷을 지을 수 있는 껍질이 난다.주 006 우물과 부뚜막이 없고, 질그릇 솥을 만들어 네댓 되 정도의 [음식을] 담아 먹는다. 앉을 때면 두 다리를 뻗고 앉는데, 다리에 고기를 끼고 그것을 먹는다. 언 고기를 얻으면, 그 위에 앉아서 녹인다.
[그] 땅에서는 소금과 철이 나지 않아,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고, 물에 적셔 즙을 내어서 그것을 먹는다.주 007 [그] 습속에는 모두 머리를 뒤로 묶어서 길게 땋으며,주 008 베로 홑옷을 만드는데, 지름이 한 자쯤 되어 이것으로 앞뒤를 가린다. 장차 혼인하려고 할 때, 남자는 깃털을 여자 머리에 꽂아 주고, 여자가 승낙하면 [그 깃털을] 지니고 돌아간다. 그러한 이후에 [남자는] 예를 갖추어 장가든다. 부인은 정숙하나 처녀는 음탕하고, 젊은이를 귀하게 여기나 늙은이는 경시한다. 죽으면 그날 바로 들에서 장사를 지내는데, 나무를 맞대어 작은 곽을 만들고, 돼지를 죽여서 그 위에 쌓는데, 이를 죽은 자의 양식으로 여긴다.
성질은 흉악하고 사나우며, 걱정하고 슬퍼하지 않는 것을 서로 과시한다.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소리 내어 울지 않으며, 소리 내어 우는 것을 씩씩하지 못하다고 여긴다. 훔치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두 죽이므로, 비록 들에 [물건을] 두어도 건드리지 않는다. [숙신의 산물에는] 돌로 만든 화살촉주 009·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세 자 다섯 치의 단궁주 010·길이 한 자 여덟 치의 호시주 011
번역주 011)
가 있다. 그 나라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는 돌이 나는데, 그 날카로움이 쇠를 뚫을 정도였다. 그것을 취하려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빈다.주 012
楛矢 : 楛木은 곧으며 습기나 건조함에 따라 휘어지지 않아 화살대로 적합하다. 『國語』 卷5,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 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 遠矣 此肅愼之矢也”라는 기록이 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17에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또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에도 “矢用楛 長尺八寸” 이라고 전한다. 楛矢는 중국에서 石砮와 함께 숙신의 상징인데, 이는 단순한 조공품이 아니라 천자의 성덕에 九夷가 복종하는 의미, 곧 천자의 통치가 四海에 미치는 구체적 상징으로 이해되었다(여호규, 2017).
주 무왕(재위: 기원전 1046~기원전 1043)주 013 때에 [숙신이] 호시·돌로 만든 화살촉을 바쳤다.주 014 주공(?~기원전 11세기)주 015이 성왕(?~기원전 11세기)주 016을 보좌하던 때가 되어서는 사신을 보내 하례하였다.주 017 이후 천여 년 동안, 비록 진한이 강성하였지만, 그들을 오게 하지는 못하였다. 문제(司馬昭, 211~265)주 018가 상국이 되었던 위 경원(260~264) 말에 이르러, 호시·돌로 만든 화살촉·활과 갑옷·담비 가죽주 019
번역주 019)
등의 공물을 와서 바쳤다. 위의 황제(元帝, 재위: 260~265)주 020가 조를 내려 상국의 부에 [그 물건들을] 맡기고, 그 왕에게 욕계주 021·금계·면백을 하사하였다.주 022
貂皮 : 기록의 담비가죽은 검은담비(Sable, Martes zibellina)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검은담비는 유라시아대륙 아한대 지역에 널리 분포하며 추운 겨울에 적응하여 촘촘하고 부드러우며 광택 있는 가죽을 가지고 있어 주요한 모피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담비가죽은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여러 모피 가운데서도 가장 최고급 사치품으로서 취급되었다. 기록을 통해 볼 때, 고대 동북 지역에서 貂皮는 주로 烏桓·鮮卑 등 동북방 유목세력과 挹婁로 대변되는 동북방 삼림수렵세력 및 부여와 고구려 등지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진의] 무제(재위: 275~290)주 023 태강(280~290) 초에 이르러, 다시 와서 공헌하였다. [동진의] 원제(재위: 317~322)주 024가 [나라를] 중흥시키자, 또 장강 이남까지 와서 돌로 만든 화살촉을 바쳤다. 성제(재위: 326~342)주 025 때에 이르러 석계룡(?~349)주 026
번역주 026)
과 통하여 공헌하였는데, [사신이] 4년 만에 비로소 도달하였다. [석]계룡이 그에게 물으니, 답하여 말하기를, “매번 소와 말이 서남쪽을 향하여 자는 것을 본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국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오게 되었습니다.”주 027라고 하였다. 石季龍 : 5호16국시대 後趙의 3대 황제 石虎(재위 : 334~349)이다. 季龍은 그의 字이다. 후조를 건국한 石勒의 조카였으나 석륵의 아버지 周曷硃가 그를 양자로 삼으면서 석륵의 아우가 되었다.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하여 석륵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으나 품성이 잔혹하였다. 333년 석륵이 죽고 태자 석홍이 조제로 즉위하니 이듬해 그를 죽이고 스스로를 거섭조천왕이라 칭하였다. 재위 말년에는 후계 문제로 조정이 크게 어지러워졌고, 혼란한 가운데 병을 얻어 349년에 죽었다. 그가 죽고 2년 뒤인 351년 석씨 일족의 부하 장수였던 한족 출신 冉閔의 반란으로 후조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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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愼氏 : 숙신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竹書紀年』의 “帝舜二十五年 息愼來朝 貢弓矢”이다. 『史記』 卷1, 五帝本紀 帝舜條에도 “南撫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羌 北山戎·發·息愼 東長·鳥夷”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後漢 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고 하여 여기서의 息愼이 곧 肅愼의 이칭임을 알 수 있다. 또 『逸周書』 王會解에는 “西面正北方稷愼大塵”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晉의 孔晁의 주석에 따르면 “稷愼肅愼也 貢塵似鹿”이라고 하여 稷愼 또한 肅愼의 이칭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 『春秋左傳』 昭公 9년조에도 “肅愼·燕·毫 吾北土也”라는 기록이 있고, 『國語』 卷5,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 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 遠矣 此肅愼之矢也”라는 기록이 있다. 『書序』에도 숙신과 관련하여 “盛王 旣伐東夷 肅愼來賀 王俾榮伯 作賄肅愼之命”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가운데 帝舜代의 息愼은 북방에 위치하였다고 나오는 반면, 성왕대의 息愼은 동이 특히 중국 대륙의 동쪽 방면과 관계된 것으로 나온다. 이처럼 先秦 시기의 숙신은 그 위치가 동방인지, 북방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에 대해 肅愼·息愼 혹은 稷愼 등은 고대 중국인들이 중국의 북방 혹은 동북 지방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일컫던 막연한 호칭으로서,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향을 나타내는 ‘東’ 또는 ‘東北’과 관계가 있었던 명칭이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保井克己, 1982). 더욱이 주 성왕 이후 후한대까지 숙신의 공헌기록이 보이지 않아, 후한대까지는 숙신을 특정 주민집단과 연결시키는 인식이 확립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沈一民, 2009). 한편,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숙신과 관련된 挹婁의 열전이 등장하여, 3세기에는 숙신이라는 이름이 이미 읍루로 대체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즉 周代에는 막연한 개념으로 肅愼이라고 통칭하였으나 曹魏와 고구려의 전쟁 이후 이 지방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이때 만주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肅愼 대신 挹婁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池內宏은 중국 古典상에 유명한 古肅愼氏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고증할 방법은 없으며, 三國時代에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에 새로이 들어온 挹婁가 마침 楛矢·石砮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古肅愼氏와 挹婁를 동일하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池內宏, 1951). 이후 『宋書』와 『晉書』, 『北齊書』 등의 중국 정사와 『三國史記』, 〈광개토왕릉비〉 등의 국내 사료에서도 숙신의 명칭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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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과 읍루의 관계에 대해서는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의 “古之肅愼氏之國也”와 『後漢書』 卷85, 挹婁의 “古肅愼之國也”이 전한다. 또 『翰苑』 所引 『魏略』에 “夫餘國在玄苑長城北 去玄菟千餘里 南接句驪 東接挹婁 卽肅愼國者也”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는 先秦 문헌에 보이는 肅愼과 『三國志』 東夷傳의 읍루를 기록에서 전하는 것처럼 같은 종족집단으로 보고 있지 않다(한규철, 1988 ; 김락기, 2013). 다만, 『三國志』 東夷傳의 읍루와 『晉書』 四夷列傳의 肅愼氏는 양자의 서술 내용으로 보아 동일한 종족집단을 대상으로 한 서술로 인정되는데, 차이도 고려된다(이정빈,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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楛矢 : 楛木은 곧으며 습기나 건조함에 따라 휘어지지 않아 화살대로 적합하다. 『國語』 卷5,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 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 遠矣 此肅愼之矢也”라는 기록이 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17에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또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에도 “矢用楛 長尺八寸” 이라고 전한다. 楛矢는 중국에서 石砮와 함께 숙신의 상징인데, 이는 단순한 조공품이 아니라 천자의 성덕에 九夷가 복종하는 의미, 곧 천자의 통치가 四海에 미치는 구체적 상징으로 이해되었다(여호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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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季龍 : 5호16국시대 後趙의 3대 황제 石虎(재위 : 334~349)이다. 季龍은 그의 字이다. 후조를 건국한 石勒의 조카였으나 석륵의 아버지 周曷硃가 그를 양자로 삼으면서 석륵의 아우가 되었다.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하여 석륵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으나 품성이 잔혹하였다. 333년 석륵이 죽고 태자 석홍이 조제로 즉위하니 이듬해 그를 죽이고 스스로를 거섭조천왕이라 칭하였다. 재위 말년에는 후계 문제로 조정이 크게 어지러워졌고, 혼란한 가운데 병을 얻어 349년에 죽었다. 그가 죽고 2년 뒤인 351년 석씨 일족의 부하 장수였던 한족 출신 冉閔의 반란으로 후조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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