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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씨(肅愼氏)의 문화와 역사

숙신씨주 001
번역주 001)
肅愼氏 : 숙신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竹書紀年』의 “帝舜二十五年 息愼來朝 貢弓矢”이다. 『史記』 卷1, 五帝本紀 帝舜條에도 “南撫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羌 北山戎·發·息愼 東長·鳥夷”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後漢 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고 하여 여기서의 息愼이 곧 肅愼의 이칭임을 알 수 있다. 또 『逸周書』 王會解에는 “西面正北方稷愼大塵”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晉의 孔晁의 주석에 따르면 “稷愼肅愼也 貢塵似鹿”이라고 하여 稷愼 또한 肅愼의 이칭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 『春秋左傳』 昭公 9년조에도 “肅愼·燕·毫 吾北土也”라는 기록이 있고, 『國語』 卷5,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 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 遠矣 此肅愼之矢也”라는 기록이 있다. 『書序』에도 숙신과 관련하여 “盛王 旣伐東夷 肅愼來賀 王俾榮伯 作賄肅愼之命”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가운데 帝舜代의 息愼은 북방에 위치하였다고 나오는 반면, 성왕대의 息愼은 동이 특히 중국 대륙의 동쪽 방면과 관계된 것으로 나온다. 이처럼 先秦 시기의 숙신은 그 위치가 동방인지, 북방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에 대해 肅愼·息愼 혹은 稷愼 등은 고대 중국인들이 중국의 북방 혹은 동북 지방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일컫던 막연한 호칭으로서,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향을 나타내는 ‘東’ 또는 ‘東北’과 관계가 있었던 명칭이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保井克己, 1982). 더욱이 주 성왕 이후 후한대까지 숙신의 공헌기록이 보이지 않아, 후한대까지는 숙신을 특정 주민집단과 연결시키는 인식이 확립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沈一民, 2009). 한편,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숙신과 관련된 挹婁의 열전이 등장하여, 3세기에는 숙신이라는 이름이 이미 읍루로 대체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즉 周代에는 막연한 개념으로 肅愼이라고 통칭하였으나 曹魏와 고구려의 전쟁 이후 이 지방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이때 만주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肅愼 대신 挹婁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池內宏은 중국 古典상에 유명한 古肅愼氏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고증할 방법은 없으며, 三國時代에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에 새로이 들어온 挹婁가 마침 楛矢·石砮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古肅愼氏와 挹婁를 동일하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池內宏, 1951). 이후 『宋書』와 『晉書』, 『北齊書』 등의 중국 정사와 『三國史記』, 〈광개토왕릉비〉 등의 국내 사료에서도 숙신의 명칭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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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읍루라는 이름도 있다.주 002
번역주 002)
숙신과 읍루의 관계에 대해서는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의 “古之肅愼氏之國也”와 『後漢書』 卷85, 挹婁의 “古肅愼之國也”이 전한다. 또 『翰苑』 所引 『魏略』에 “夫餘國在玄苑長城北 去玄菟千餘里 南接句驪 東接挹婁 卽肅愼國者也”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는 先秦 문헌에 보이는 肅愼과 『三國志』 東夷傳의 읍루를 기록에서 전하는 것처럼 같은 종족집단으로 보고 있지 않다(한규철, 1988 ; 김락기, 2013). 다만, 『三國志』 東夷傳의 읍루와 『晉書』 四夷列傳의 肅愼氏는 양자의 서술 내용으로 보아 동일한 종족집단을 대상으로 한 서술로 인정되는데, 차이도 고려된다(이정빈,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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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함산주 003
번역주 003)
不咸山 : 白頭山을 가리킨다. 『山海經』 卷17, 大荒北經에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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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60일 정도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잇닿아 있고, 서쪽으로 구만한국주 004
번역주 004)
寇漫汗國 : 『晉書』 卷97, 裨離等十國의 “裨離國在肅愼西北 馬行可二百日 … 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 … 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行”라는 기록에서 ‘寇莫汗國’이 보이고, 『翰苑』 所引 『魏略』의 “肅愼氏 … 西接冠漫行國”라는 기록에서 ‘冠漫行國’이 보인다. 이때 ‘寇漫’, ‘寇莫’, ‘冠漫’ 등을 곰을 뜻하는 kuma로 해석하기도 한다(국사편찬위원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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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접하며, 북쪽으로 약수에주 005
번역주 005)
弱水 : 『翰苑』 所引 『魏略』에는 “北極弱水”라고 전한다. 『後漢書』 卷85, 『三國志』 卷30, 『晉書』 卷97의 扶餘 기록에 “北有弱水”와 같이 弱水는 숙신뿐만 아니라 부여의 경계와 관련해서도 언급된다. 弱水에 대해서는 주로 동류 松花江으로 비정하지만(池內宏, 1951), 黑龍江으로 비정하거나(井上秀雄, 1974), 嫩江으로 비정하기도 한다(白鳥庫吉,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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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다. 그 땅의 경계는 동서남북 수천 리이다.
깊은 산 외진 골짜기에 사는데, 그 길이 험하고 가로막혀서, 수레와 말이 오가지 못한다. 여름이면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고, 겨울이면 굴에서 산다. 부자가 대를 이어 군장이 된다. 문자가 없어서, 말로 약속한다. 말이 있지만 타지 않고, 다만 재산으로 여길 뿐이다. 소와 양은 없고, 대개 돼지를 키워,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은 입으며, 털을 길쌈하여 직물을 만든다.
[숙신에는] 낙상이라는 이름의 나무가 있는데, 만약 중국에서 성군이 즉위하면 곧 그 나무에서 옷을 지을 수 있는 껍질이 난다.주 006
번역주 006)
『山海經』 卷7, 海外西經에 “肅愼之國 在白民北 有樹名曰雄〈或作雒〉常 先入伐帝 于此取之”라고 전한다. 이에 대해 晉의 郭璞은 “其俗無衣服 中國有聖帝代立者 則此木生皮可衣也”라는 주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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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과 부뚜막이 없고, 질그릇 솥을 만들어 네댓 되 정도의 [음식을] 담아 먹는다. 앉을 때면 두 다리를 뻗고 앉는데, 다리에 고기를 끼고 그것을 먹는다. 언 고기를 얻으면, 그 위에 앉아서 녹인다.
[그] 땅에서는 소금과 철이 나지 않아,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고, 물에 적셔 즙을 내어서 그것을 먹는다.주 007
번역주 007)
소금의 대용물로서 잿물을 만드는 방법이다. 한편, 『魏書』 卷100, 列傳88, 勿吉國에는 “水氣醎凝 鹽生樹上 亦有鹽池”라는 기록이 있고, 『北史』 卷95, 列傳82, 勿吉에는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 亦有鹽池”, 『隋書』 卷81, 列傳46, 東夷, 靺鞨에는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이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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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습속에는 모두 머리를 뒤로 묶어서 길게 땋으며,주 008
번역주 008)
編髮 : 『史記』 卷116, 西南夷列傳56의 “自滇以北君長以什數 邛都最大 此皆魋結 耕田 有邑聚 其外西自同師以東 … 皆編髮 隨畜遷徙 毋常處 毋君長”이라는 기록이 있다. 『史記』에서 編髮은 농경사회의 ‘魋結’에 대응하는 유목사회의 특징처럼 기재되었는데, 농경사회는 魋結·耕田·邑聚·君長으로 대표되고, 유목사회는 編髮·隨畜遷徙·毋常處·毋君長으로 상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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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 홑옷을 만드는데, 지름이 한 자쯤 되어 이것으로 앞뒤를 가린다. 장차 혼인하려고 할 때, 남자는 깃털을 여자 머리에 꽂아 주고, 여자가 승낙하면 [그 깃털을] 지니고 돌아간다. 그러한 이후에 [남자는] 예를 갖추어 장가든다. 부인은 정숙하나 처녀는 음탕하고, 젊은이를 귀하게 여기나 늙은이는 경시한다. 죽으면 그날 바로 들에서 장사를 지내는데, 나무를 맞대어 작은 곽을 만들고, 돼지를 죽여서 그 위에 쌓는데, 이를 죽은 자의 양식으로 여긴다.
성질은 흉악하고 사나우며, 걱정하고 슬퍼하지 않는 것을 서로 과시한다.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소리 내어 울지 않으며, 소리 내어 우는 것을 씩씩하지 못하다고 여긴다. 훔치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두 죽이므로, 비록 들에 [물건을] 두어도 건드리지 않는다. [숙신의 산물에는] 돌로 만든 화살촉주 009
번역주 009)
石砮 : 돌로 만든 화살촉을 말한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당시 숙신 사회에는 鐵이 없었던 까닭에 이러한 돌로 만든 화살촉이 사용되었다. 『說文解字』 卷10, 石部에 “砮 石可以爲矢鏃者”라고 전한다. 『國語』 卷5,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 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 遠矣 此肅愼之矢也”라는 기록이 있다. 한편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挹婁와 『後漢書』 卷85, 東夷, 挹婁에 “靑石爲鏃”이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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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세 자 다섯 치의 단궁주 010
번역주 010)
檀弓 : 숙신이 사용한 활을 말하는데, 그 크기가 대체로 4자 가까이 되는 큰 활이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17에는 “正義 肅愼國記云 肅愼 其地在夫餘國東北河六十日行 其弓四尺强勁弩 射四百步 今之靺鞈國方有此矢”라고 전한다.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挹婁에도 “其弓長四尺 力如弩”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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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한 자 여덟 치의 호시주 011
번역주 011)
楛矢 : 楛木은 곧으며 습기나 건조함에 따라 휘어지지 않아 화살대로 적합하다. 『國語』 卷5,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 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 遠矣 此肅愼之矢也”라는 기록이 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17에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또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에도 “矢用楛 長尺八寸” 이라고 전한다. 楛矢는 중국에서 石砮와 함께 숙신의 상징인데, 이는 단순한 조공품이 아니라 천자의 성덕에 九夷가 복종하는 의미, 곧 천자의 통치가 四海에 미치는 구체적 상징으로 이해되었다(여호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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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 그 나라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는 돌이 나는데, 그 날카로움이 쇠를 뚫을 정도였다. 그것을 취하려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빈다.주 012
번역주 012)
『大明一統志』 卷89에는 “黑龍江口出 名木花石 堅利入鐵 可銼矢鏃 土人將取之 必先祈神”이라는 기록이 있다. 쇠를 뚫을 정도의 날카로움과 신께 기도하는 습속 등의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黑龍江에서 나는 木花石이라는 돌과 『진서』에 등장하는 돌을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국사편찬위원회, 1990). 한편,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에는 “靑石爲鏃”이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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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무왕(재위: 기원전 1046~기원전 1043)주 013
번역주 013)
周 武王 : 姓은 姬이고, 이름은 發이다. 周의 창건자이자 초대 왕으로서, 기원전 1046년 商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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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숙신이] 호시·돌로 만든 화살촉을 바쳤다.주 014
번역주 014)
『國語』 卷5, 魯語에 “昔武王克商 通道于九夷百蠻 使各以其方賄來貢 使無忘職業于是肅愼氏貢楛矢石砮 其長尺有咫 先王欲昭其令德之致遠也 以示後人 使永監焉 故銘其栝曰 肅愼氏之貢矢”라는 기록이 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17에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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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기원전 11세기)주 015
번역주 015)
周公 : 姓은 姬이고, 이름은 旦이다. 周 武王을 도와 商을 멸망시키고 왕조를 창업하는 데 기여하였다. 건국 이후 나라의 예악과 법도를 정비하고, 봉건 제도를 정착시켜 봉건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무왕이 죽은 후에는 어린 成王을 대신하여 약 7년간 섭정하면서 왕실 내외부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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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왕(?~기원전 11세기)주 016
번역주 016)
成王 : 姓은 姬이고, 이름은 誦이다. 주 무왕의 아들로서 주의 제2대 왕으로 올랐지만,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그의 숙부 周公의 7년 섭정이 끝난 뒤 친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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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좌하던 때가 되어서는 사신을 보내 하례하였다.주 017
번역주 017)
『史記』 卷4, 周本紀4에는 “成王旣伐東夷 息愼來賀”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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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천여 년 동안, 비록 진한이 강성하였지만, 그들을 오게 하지는 못하였다. 문제(司馬昭, 211~265)주 018
번역주 018)
文帝(司馬昭) : 河內 溫縣 사람으로 字는 子尙이다. 司馬懿의 차남으로 젊어서부터 부친을 따라 여러 전쟁에 나서 공을 세웠다. 魏 景元 4년(263) 蜀漢에 대한 정벌이 진행되는 중에 晉公에 봉해지고 相國이 되었다. 264년 촉 정벌 공로를 인정받아 晉王에 봉해졌으나 이듬해인 咸熙 2년(265)에 병사하였다. 아들 사마염이 황제가 되어 晉을 건국한 뒤 그를 文帝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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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상국이 되었던 위 경원(260~264) 말에 이르러, 호시·돌로 만든 화살촉·활과 갑옷·담비 가죽주 019
번역주 019)
貂皮 : 기록의 담비가죽은 검은담비(Sable, Martes zibellina)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검은담비는 유라시아대륙 아한대 지역에 널리 분포하며 추운 겨울에 적응하여 촘촘하고 부드러우며 광택 있는 가죽을 가지고 있어 주요한 모피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담비가죽은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여러 모피 가운데서도 가장 최고급 사치품으로서 취급되었다. 기록을 통해 볼 때, 고대 동북 지역에서 貂皮는 주로 烏桓·鮮卑 등 동북방 유목세력과 挹婁로 대변되는 동북방 삼림수렵세력 및 부여와 고구려 등지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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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공물을 와서 바쳤다. 위의 황제(元帝, 재위: 260~265)주 020
번역주 020)
魏帝 : 司馬昭가 相國이었을 때 황제는 曹魏의 제5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曹奐(元帝, 재위 : 260~265)이다. 曹奐은 曹操의 9남인 燕王 曹宇의 아들로서 전 황제인 曹髦가 司馬昭에게 대항하다 살해당하자 司馬昭에 의해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사마소의 맏아들인 司馬炎에게 선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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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조를 내려 상국의 부에 [그 물건들을] 맡기고, 그 왕에게 욕계주 021
번역주 021)
褥雞 : 기왕에는 ‘褥’을 왕 개인의 이름으로 파악하거나(국사편찬위원회, 1990) ‘褥雞’를 씨족명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林樹山, 1986). 다만, 동기사의 다른 조공기록에선 숙신의 수장이나 씨족명을 밝힌 사례가 없어 고유명사로 단정하기 어렵다. 한편, 褥雞를 하사품으로 볼 수도 있다. 단, 이 경우 하사품으로서의 용례를 찾을 수 없어 어떤 물품인지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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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면백을 하사하였다.주 022
번역주 022)
『晉書』 卷2, 帝紀2에는 “(景元) 三年 夏四月 肅愼來獻楛矢石砮弓甲貂皮等 天子命歸於大將軍府”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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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의] 무제(재위: 275~290)주 023
번역주 023)
武帝 : 西晉의 초대 황제로서 그 조부는 司馬懿이며, 伯父는 司馬師, 아버지는 司馬昭이다. 265년, 司馬昭가 죽자 晉王을 승계하였고 曹魏의 마지막 황제 조환을 겁박하여 황제 자리를 선위 받았다. 재위 말년에 많은 실정을 저지르며 이후 西晉이 몰락하되 데에 원인을 제공한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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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강(280~290) 초에 이르러, 다시 와서 공헌하였다. [동진의] 원제(재위: 317~322)주 024
번역주 024)
元帝 : 東晉의 초대 황제인 司馬睿로서 字는 景文이다. 八王의 난과 永嘉의 난을 거치며 西晉 조정이 붕괴하자 낭야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규합하였고, 서진의 마지막 황제 愍帝가 끝내 前趙의 군주 유총에게 죽임을 당하자 317년 건업에서 동진을 세우고 제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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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라를] 중흥시키자, 또 장강 이남까지 와서 돌로 만든 화살촉을 바쳤다. 성제(재위: 326~342)주 025
번역주 025)
成帝 : 동진의 제3대 황제로서 전 황제인 明帝 司馬紹의 아들이며 자는 世根이다. 325년 명제가 죽자 5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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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이르러 석계룡(?~349)주 026
번역주 026)
石季龍 : 5호16국시대 後趙의 3대 황제 石虎(재위 : 334~349)이다. 季龍은 그의 字이다. 후조를 건국한 石勒의 조카였으나 석륵의 아버지 周曷硃가 그를 양자로 삼으면서 석륵의 아우가 되었다.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하여 석륵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으나 품성이 잔혹하였다. 333년 석륵이 죽고 태자 석홍이 조제로 즉위하니 이듬해 그를 죽이고 스스로를 거섭조천왕이라 칭하였다. 재위 말년에는 후계 문제로 조정이 크게 어지러워졌고, 혼란한 가운데 병을 얻어 349년에 죽었다. 그가 죽고 2년 뒤인 351년 석씨 일족의 부하 장수였던 한족 출신 冉閔의 반란으로 후조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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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통하여 공헌하였는데, [사신이] 4년 만에 비로소 도달하였다. [석]계룡이 그에게 물으니, 답하여 말하기를, “매번 소와 말이 서남쪽을 향하여 자는 것을 본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국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오게 되었습니다.”주 027
번역주 027)
『翰苑』 所引 『鄴中記』에는 “肅愼在鄴之東北 去鄴五萬里 遣使四年乃達 獻石砮楛矢 問使者[何]緣來此 答云 牛馬西南向眠三年 則知有大國所在 故來耳 恒以此爲候也”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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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 번역주 001)
    肅愼氏 : 숙신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竹書紀年』의 “帝舜二十五年 息愼來朝 貢弓矢”이다. 『史記』 卷1, 五帝本紀 帝舜條에도 “南撫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羌 北山戎·發·息愼 東長·鳥夷”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後漢 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고 하여 여기서의 息愼이 곧 肅愼의 이칭임을 알 수 있다. 또 『逸周書』 王會解에는 “西面正北方稷愼大塵”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晉의 孔晁의 주석에 따르면 “稷愼肅愼也 貢塵似鹿”이라고 하여 稷愼 또한 肅愼의 이칭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 『春秋左傳』 昭公 9년조에도 “肅愼·燕·毫 吾北土也”라는 기록이 있고, 『國語』 卷5,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 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 遠矣 此肅愼之矢也”라는 기록이 있다. 『書序』에도 숙신과 관련하여 “盛王 旣伐東夷 肅愼來賀 王俾榮伯 作賄肅愼之命”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가운데 帝舜代의 息愼은 북방에 위치하였다고 나오는 반면, 성왕대의 息愼은 동이 특히 중국 대륙의 동쪽 방면과 관계된 것으로 나온다. 이처럼 先秦 시기의 숙신은 그 위치가 동방인지, 북방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에 대해 肅愼·息愼 혹은 稷愼 등은 고대 중국인들이 중국의 북방 혹은 동북 지방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일컫던 막연한 호칭으로서,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향을 나타내는 ‘東’ 또는 ‘東北’과 관계가 있었던 명칭이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保井克己, 1982). 더욱이 주 성왕 이후 후한대까지 숙신의 공헌기록이 보이지 않아, 후한대까지는 숙신을 특정 주민집단과 연결시키는 인식이 확립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沈一民, 2009). 한편,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숙신과 관련된 挹婁의 열전이 등장하여, 3세기에는 숙신이라는 이름이 이미 읍루로 대체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즉 周代에는 막연한 개념으로 肅愼이라고 통칭하였으나 曹魏와 고구려의 전쟁 이후 이 지방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이때 만주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肅愼 대신 挹婁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池內宏은 중국 古典상에 유명한 古肅愼氏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고증할 방법은 없으며, 三國時代에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에 새로이 들어온 挹婁가 마침 楛矢·石砮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古肅愼氏와 挹婁를 동일하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池內宏, 1951). 이후 『宋書』와 『晉書』, 『北齊書』 등의 중국 정사와 『三國史記』, 〈광개토왕릉비〉 등의 국내 사료에서도 숙신의 명칭이 확인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숙신과 읍루의 관계에 대해서는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의 “古之肅愼氏之國也”와 『後漢書』 卷85, 挹婁의 “古肅愼之國也”이 전한다. 또 『翰苑』 所引 『魏略』에 “夫餘國在玄苑長城北 去玄菟千餘里 南接句驪 東接挹婁 卽肅愼國者也”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는 先秦 문헌에 보이는 肅愼과 『三國志』 東夷傳의 읍루를 기록에서 전하는 것처럼 같은 종족집단으로 보고 있지 않다(한규철, 1988 ; 김락기, 2013). 다만, 『三國志』 東夷傳의 읍루와 『晉書』 四夷列傳의 肅愼氏는 양자의 서술 내용으로 보아 동일한 종족집단을 대상으로 한 서술로 인정되는데, 차이도 고려된다(이정빈, 2019).바로가기
  • 번역주 003)
    不咸山 : 白頭山을 가리킨다. 『山海經』 卷17, 大荒北經에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이라고 전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寇漫汗國 : 『晉書』 卷97, 裨離等十國의 “裨離國在肅愼西北 馬行可二百日 … 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 … 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行”라는 기록에서 ‘寇莫汗國’이 보이고, 『翰苑』 所引 『魏略』의 “肅愼氏 … 西接冠漫行國”라는 기록에서 ‘冠漫行國’이 보인다. 이때 ‘寇漫’, ‘寇莫’, ‘冠漫’ 등을 곰을 뜻하는 kuma로 해석하기도 한다(국사편찬위원회, 1990).바로가기
  • 번역주 005)
    弱水 : 『翰苑』 所引 『魏略』에는 “北極弱水”라고 전한다. 『後漢書』 卷85, 『三國志』 卷30, 『晉書』 卷97의 扶餘 기록에 “北有弱水”와 같이 弱水는 숙신뿐만 아니라 부여의 경계와 관련해서도 언급된다. 弱水에 대해서는 주로 동류 松花江으로 비정하지만(池內宏, 1951), 黑龍江으로 비정하거나(井上秀雄, 1974), 嫩江으로 비정하기도 한다(白鳥庫吉, 1970).바로가기
  • 번역주 006)
    『山海經』 卷7, 海外西經에 “肅愼之國 在白民北 有樹名曰雄〈或作雒〉常 先入伐帝 于此取之”라고 전한다. 이에 대해 晉의 郭璞은 “其俗無衣服 中國有聖帝代立者 則此木生皮可衣也”라는 주를 달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소금의 대용물로서 잿물을 만드는 방법이다. 한편, 『魏書』 卷100, 列傳88, 勿吉國에는 “水氣醎凝 鹽生樹上 亦有鹽池”라는 기록이 있고, 『北史』 卷95, 列傳82, 勿吉에는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 亦有鹽池”, 『隋書』 卷81, 列傳46, 東夷, 靺鞨에는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이라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編髮 : 『史記』 卷116, 西南夷列傳56의 “自滇以北君長以什數 邛都最大 此皆魋結 耕田 有邑聚 其外西自同師以東 … 皆編髮 隨畜遷徙 毋常處 毋君長”이라는 기록이 있다. 『史記』에서 編髮은 농경사회의 ‘魋結’에 대응하는 유목사회의 특징처럼 기재되었는데, 농경사회는 魋結·耕田·邑聚·君長으로 대표되고, 유목사회는 編髮·隨畜遷徙·毋常處·毋君長으로 상징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石砮 : 돌로 만든 화살촉을 말한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당시 숙신 사회에는 鐵이 없었던 까닭에 이러한 돌로 만든 화살촉이 사용되었다. 『說文解字』 卷10, 石部에 “砮 石可以爲矢鏃者”라고 전한다. 『國語』 卷5,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 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 遠矣 此肅愼之矢也”라는 기록이 있다. 한편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挹婁와 『後漢書』 卷85, 東夷, 挹婁에 “靑石爲鏃”이라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檀弓 : 숙신이 사용한 활을 말하는데, 그 크기가 대체로 4자 가까이 되는 큰 활이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17에는 “正義 肅愼國記云 肅愼 其地在夫餘國東北河六十日行 其弓四尺强勁弩 射四百步 今之靺鞈國方有此矢”라고 전한다.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挹婁에도 “其弓長四尺 力如弩”라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楛矢 : 楛木은 곧으며 습기나 건조함에 따라 휘어지지 않아 화살대로 적합하다. 『國語』 卷5,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 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 遠矣 此肅愼之矢也”라는 기록이 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17에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또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에도 “矢用楛 長尺八寸” 이라고 전한다. 楛矢는 중국에서 石砮와 함께 숙신의 상징인데, 이는 단순한 조공품이 아니라 천자의 성덕에 九夷가 복종하는 의미, 곧 천자의 통치가 四海에 미치는 구체적 상징으로 이해되었다(여호규, 2017).바로가기
  • 번역주 012)
    『大明一統志』 卷89에는 “黑龍江口出 名木花石 堅利入鐵 可銼矢鏃 土人將取之 必先祈神”이라는 기록이 있다. 쇠를 뚫을 정도의 날카로움과 신께 기도하는 습속 등의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黑龍江에서 나는 木花石이라는 돌과 『진서』에 등장하는 돌을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국사편찬위원회, 1990). 한편,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에는 “靑石爲鏃”이라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周 武王 : 姓은 姬이고, 이름은 發이다. 周의 창건자이자 초대 왕으로서, 기원전 1046년 商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國語』 卷5, 魯語에 “昔武王克商 通道于九夷百蠻 使各以其方賄來貢 使無忘職業于是肅愼氏貢楛矢石砮 其長尺有咫 先王欲昭其令德之致遠也 以示後人 使永監焉 故銘其栝曰 肅愼氏之貢矢”라는 기록이 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17에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周公 : 姓은 姬이고, 이름은 旦이다. 周 武王을 도와 商을 멸망시키고 왕조를 창업하는 데 기여하였다. 건국 이후 나라의 예악과 법도를 정비하고, 봉건 제도를 정착시켜 봉건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무왕이 죽은 후에는 어린 成王을 대신하여 약 7년간 섭정하면서 왕실 내외부의 반란을 진압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成王 : 姓은 姬이고, 이름은 誦이다. 주 무왕의 아들로서 주의 제2대 왕으로 올랐지만,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그의 숙부 周公의 7년 섭정이 끝난 뒤 친정을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史記』 卷4, 周本紀4에는 “成王旣伐東夷 息愼來賀”라고 전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8)
    文帝(司馬昭) : 河內 溫縣 사람으로 字는 子尙이다. 司馬懿의 차남으로 젊어서부터 부친을 따라 여러 전쟁에 나서 공을 세웠다. 魏 景元 4년(263) 蜀漢에 대한 정벌이 진행되는 중에 晉公에 봉해지고 相國이 되었다. 264년 촉 정벌 공로를 인정받아 晉王에 봉해졌으나 이듬해인 咸熙 2년(265)에 병사하였다. 아들 사마염이 황제가 되어 晉을 건국한 뒤 그를 文帝로 추존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貂皮 : 기록의 담비가죽은 검은담비(Sable, Martes zibellina)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검은담비는 유라시아대륙 아한대 지역에 널리 분포하며 추운 겨울에 적응하여 촘촘하고 부드러우며 광택 있는 가죽을 가지고 있어 주요한 모피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담비가죽은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여러 모피 가운데서도 가장 최고급 사치품으로서 취급되었다. 기록을 통해 볼 때, 고대 동북 지역에서 貂皮는 주로 烏桓·鮮卑 등 동북방 유목세력과 挹婁로 대변되는 동북방 삼림수렵세력 및 부여와 고구려 등지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魏帝 : 司馬昭가 相國이었을 때 황제는 曹魏의 제5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曹奐(元帝, 재위 : 260~265)이다. 曹奐은 曹操의 9남인 燕王 曹宇의 아들로서 전 황제인 曹髦가 司馬昭에게 대항하다 살해당하자 司馬昭에 의해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사마소의 맏아들인 司馬炎에게 선양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1)
    褥雞 : 기왕에는 ‘褥’을 왕 개인의 이름으로 파악하거나(국사편찬위원회, 1990) ‘褥雞’를 씨족명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林樹山, 1986). 다만, 동기사의 다른 조공기록에선 숙신의 수장이나 씨족명을 밝힌 사례가 없어 고유명사로 단정하기 어렵다. 한편, 褥雞를 하사품으로 볼 수도 있다. 단, 이 경우 하사품으로서의 용례를 찾을 수 없어 어떤 물품인지 알기 어렵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晉書』 卷2, 帝紀2에는 “(景元) 三年 夏四月 肅愼來獻楛矢石砮弓甲貂皮等 天子命歸於大將軍府”라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武帝 : 西晉의 초대 황제로서 그 조부는 司馬懿이며, 伯父는 司馬師, 아버지는 司馬昭이다. 265년, 司馬昭가 죽자 晉王을 승계하였고 曹魏의 마지막 황제 조환을 겁박하여 황제 자리를 선위 받았다. 재위 말년에 많은 실정을 저지르며 이후 西晉이 몰락하되 데에 원인을 제공한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4)
    元帝 : 東晉의 초대 황제인 司馬睿로서 字는 景文이다. 八王의 난과 永嘉의 난을 거치며 西晉 조정이 붕괴하자 낭야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규합하였고, 서진의 마지막 황제 愍帝가 끝내 前趙의 군주 유총에게 죽임을 당하자 317년 건업에서 동진을 세우고 제위에 올랐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成帝 : 동진의 제3대 황제로서 전 황제인 明帝 司馬紹의 아들이며 자는 世根이다. 325년 명제가 죽자 5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6)
    石季龍 : 5호16국시대 後趙의 3대 황제 石虎(재위 : 334~349)이다. 季龍은 그의 字이다. 후조를 건국한 石勒의 조카였으나 석륵의 아버지 周曷硃가 그를 양자로 삼으면서 석륵의 아우가 되었다.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하여 석륵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으나 품성이 잔혹하였다. 333년 석륵이 죽고 태자 석홍이 조제로 즉위하니 이듬해 그를 죽이고 스스로를 거섭조천왕이라 칭하였다. 재위 말년에는 후계 문제로 조정이 크게 어지러워졌고, 혼란한 가운데 병을 얻어 349년에 죽었다. 그가 죽고 2년 뒤인 351년 석씨 일족의 부하 장수였던 한족 출신 冉閔의 반란으로 후조는 멸망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7)
    『翰苑』 所引 『鄴中記』에는 “肅愼在鄴之東北 去鄴五萬里 遣使四年乃達 獻石砮楛矢 問使者[何]緣來此 答云 牛馬西南向眠三年 則知有大國所在 故來耳 恒以此爲候也”라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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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씨(肅愼氏)의 문화와 역사 자료번호 : jd.k_0005_0097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