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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승직을 내리는 것, 삼봉도를 찾는 것, 금자경을 쓰는 것 등에 관해 논하다

  • 저필자
    장순순(전북대학교 교수)
  • 날짜
    1477년 3월 4일(음)
  • 출전
사료해설
동해에 울릉도와는 별개로 존재한다고 믿는 삼봉도를 찾으려는 성종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이다.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창신(李昌臣)이 섬을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손해될 것이 없고, 얻는다 하더라도 별 이익이 안된다는 이유로 삼봉도 수색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자 국왕 성종은 삼봉도를 찾지 않고 그냥 둔다면 죄를 짓고 도망간 사람들이 숨어 사는 소굴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정부가 동해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토관리에 적극적이었음을 시사해준다.
원문
○吏曹正郞柳文通等五人輪對。 佐郞安良生啓曰: “吏曹用人, 本欲辨賢愚以輔治道, 而僧職如大禪、中德、禪師、住持, 亦令吏曹下批, 臺諫署經, 此甚不可。” 上曰: “果非矣。 肇自何時?” 右承旨任士洪啓曰: “太宗朝猶有此弊。 如大選之試, 亦可罷也。” 佐郞李昌臣啓曰: “臣伏聞遣使求三峰島, 爲逃賦入海之民也。 然驅士衆, 擠之大海之中, 臣恐所得不能償其所失。 得其地, 不可耕也, 得其人, 不可使也, 棄之不爲損, 得之不爲益。 昔漢武滅南越, 置珠崖郡, 一轉輸之間, 死者數萬, 至元帝時, 賈捐之極言不可, 詔罷之。 臣意以爲永安道自丁亥後, 人心洶洶, 今尙不靖, 願專以存撫此道爲憂, 三峰島棄之無妨。” 上曰: “此島, 今有明言其處者, 今若不求, 必爲逋逃淵藪, 不可棄也。” 又啓曰: “卽位以來, 慮僧徒日繁軍額日耗, 累下私剃之禁。 然違上所命, 從厥攸好, 人之常情, 禁(綱)〔網〕之密, 不若謹好尙之爲愈。 臣聞近日寫金字經於奉先寺, 是自上導之, 臣之惑滋甚。 況金銀之貢, 請免上國, 我祖宗爲後世慮至矣, 以此而寫經可乎?” 上曰: “仁粹王大妃爲先王爲之, 予豈止之?” 昌臣曰: “寫經之擧, 雖非殿下本意, 然事父母, 當幾諫。 有爭子, 則親不陷於不義, 後世謂殿下何如? 伏惟三思焉。” 上曰: “然。” 昌臣等出, 上謂左右曰: “此李昌臣乎? 言事固當如是, 此人不易得也。”
번역문
이조 정랑(吏曹正郞) 유문통(柳文通) 등 5인(人)이 윤대(輪對)하였다. 좌랑(佐郞) 안양생(安良生)이 아뢰기를,
“이조(吏曹)에서 사람을 가려 쓰는 것은 원래 어질고 어리석음을 분별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를 돕는 것인데, 승직(僧職)에 대선(大禪)·중덕(中德)·선사(禪師)·주지(住持) 같은 것도 이조(吏曹)로 하여금 하비(下批)하여 대간(臺諫)에서 서경(署經)하게 하니, 이것은 몹시 옳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옳지 않다. 비롯된 것이 어느 때 부터인가?”
하니, 우승지(右承旨) 임사홍(任士洪)이 아뢰기를,
“태종조(太宗朝)에도 오히려 이러한 폐단이 있었습니다. 대선(大選)의 시험 같은 것도 파해야 합니다.”
하였다. 좌랑(佐郞) 이창신(李昌臣)이 아뢰기를,
“신이 엎드려 들으니, 사신을 보내서 삼봉도(三峯島)를 찾는 것은 부역을 피하여 바다로 도망간 백성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군사를 몰아다가 큰 바다 가운데에 밀어 넣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얻은 것이 그 잃는 것을 보상하지 못할 것이고, 그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경작하지 못할 것이며, 그 사람을 얻는다 하더라도 부리지 못할 것이니, 버려두어도 손해될 것이 없으며, 얻는다 하더라도 이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무제(武帝)무제(武帝)가 남월(南越)을 쳐서 멸망시키고 주애군(珠崖郡)을 설치하였는데, 한번 전수(轉輸)하는 사이에 죽은 자가 수만 명이 되니, 원제(元帝) 때에 이르러 가연지(賈捐之)가 옳지 못한 일이라고 극언(極言)하여 조칙(詔勅)을 내려 파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은 영안도(永安道)가 정해년 이후로부터 인심이 흉흉하여 지금까지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오로지 이 도를 위안하고 무마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하고, 삼봉도(三峯島)는 버려두는 것이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섬이 지금 어느 곳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말하는 자가 있는데, 지금 만일 찾지 않는다면 반드시 죄를 짓고 도망간 사람들이 숨어 사는 소굴이 될 것이니 버릴 수는 없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즉위(卽位)하신 뒤로 승도(僧徒)는 날로 늘어나고 군액(軍額)이 날로 줄어들까 염려하여 사사로이 머리를 깎지 못하도록 여러 번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인데, 엄금하는 것보다 숭상하기를 삼가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신은 들으니, 요즈음 봉선사(奉先寺)에서 금자경(金字經)을 쓴다 하는데, 이것은 위에서 시켜서 한 것이니 신의 의혹이 더욱 심합니다. 더구나 금(金)과 은(銀)의 공납(貢納)을 중국에게 면해 주기를 청한 것은 우리 조종(祖宗)께서 후세를 위하여 염려한 것이 지극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경(經)을 쓰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께서 선왕(先王)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내 어찌 저지하겠는가?”
하니, 이창신(李昌臣)이 말하기를,
“경(經)을 쓰는 일은 비록 전하(殿下)의 본의(本意)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모를 섬기는데 마땅히 여러 번 간(諫)해야 합니다. 간하는 자식이 있으면 어버이가 불의(不義)에 빠지지 않는 것인데, 뒷세상에서는 전하를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세번 생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창신의 무리가 밖으로 나가니,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이창신인가? 말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히 이같아야 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쉽게 얻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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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직을 내리는 것, 삼봉도를 찾는 것, 금자경을 쓰는 것 등에 관해 논하다 자료번호 : sd.d_0149_0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