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이 군대를 내어주기를 요청하자 한나라가 다섯장군을 보내고 서역의 군사를 일으킴
흉노는 이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여 군대를 내지 못하였다. 바로 사자를 오손으로 보내 한나라[에서 시집온] 공주를 얻고자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오손을 공격하여 거연(車延)주 001과 악사(惡師)주 002땅을 얻었다. 오손의 공주가 [한 조정에] 편지를 올리니주 003공경들에게 [그의] 구원 여부를 논의하도록 하였는데 결정이 나지 않았다.주 004
소제가 붕어하고 선제(宣帝)
주 005
각주 005)
가 즉위하자 오손의 곤미(昆彌)주 006가 다시 편지를 올려 말하였다. “연이어 흉노의 침범으로 [땅을] 빼앗기니 [저] 곤미가 온 나라의 정병 절반과 말 5만 필을 동원하여 온 힘을 다해 흉노를 공격하려 하니 천자께서도 군대를 내어 공주를 불쌍히 여기시어 후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본시(本始)주 0072년(전72)에 한나라에서는 관동의 경장(輕裝) 정예병사를 동원하고 군국의 관리 중에서 [질] 3백 석의 강건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익숙한 사람들을 뽑아 모두 종군시켰다. 어사대부 전광명(田廣明)
주 008을 기련장군(祈連將軍)으로 삼아 4만여 기병을 [이끌게 하여] 서하에서 나아갔고, 도료장군 범명우는 3만여 기병을 [이끌고] 주천[군]에서 나아갔고, 전장군(前將軍) 한증(韓增)
주 009은 3만 기병을 [이끌고] 운중에서 나아갔고, 후장군(後將軍) 조충국(趙充國)은 포류장군(蒲類將軍)가 되어 3만여 기를 [이끌고] 주천[군]에서 나아갔고, 운중태수(雲中太守) 전순(田順)은 호아장군(虎牙將軍)이 되어 3만여 기를 [이끌고] 운중에서 나아갔다. 대체로 다섯 명의 장군과 군대 모두 십여만의 기병이 장성 밖으로 각각 이천여 리를 나아갔다. 그리고 교위 상혜(常惠)
주 010宣帝(재위 전91~49) : 諱는 詢. 字는 次卿. 武帝의 曾孫이며, 戾太子의 손자이다. 조부 戾太子가 巫蠱의 난에서 죽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민가에서 자랐다. 전74년에 昭帝가 붕어하고 한때 迎立된 昌邑王 賀가 霍光에 의해 폐위되자 18세로 皇位를 이었다. 처음에는 霍光이 攝政하였으나, 전68년 霍光이 병들어 죽은 뒤에는 霍氏 일족을 제거하고 친히 정사를 맡았다. 地方行政制度를 정비하고, 처음으로 常平倉을 설치하여 빈민구제를 도모하였다. 대외적으로는 匈奴의 쇠퇴를 틈타 烏孫과 손잡고 匈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鄭吉을 西域都護로 하여 소위 西域 36국을 服屬시켜 마침내 匈奴가 분열되었다. 전51년에는 南匈奴도 漢나라에 복속하기에 이르렀다. 宣帝시대는 武帝 이후 漢나라의 威勢가 최고도에 달하였으므로, 前漢의 여러 황제 중에서도 賢帝로 꼽혔다.
각주 010)
에게는 오손을 보호하게 하기 위해 서역[의 여러 나라]에서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오손의] 곤미가 몸소 흡후(翕侯)주 011常惠(?~전46) : 太原(지금의 山西省 太原 西南) 사람이다. 젊었을 때 집안이 가난하여 蘇武가 匈奴로 사신가는 것에 응모를 하여 갔다가 그곳에서 십여 년간 억류생활을 했다. 昭帝 때에 귀환하여 光祿大夫로 제수되었다. 宣帝 本始 2년(전72)에 烏孫公主가 구조를 바라는 上書를 보내자, 烏孫에 사신으로 갔다. 뒤이어 漢이 다섯將軍의 大軍을 출동시켰을 때, 校尉로 임명되어 烏孫의 군대를 지휘하였다. 匈奴의 單于 父行과 名王 騎將 이하 3만 9천여 명의 首級을 얻어 귀환하였다. 이때 烏孫 사람에게 印綬節을 도둑맞아 誅殺될 위기에 처했으나, 다른 다섯 장군들이 아무 공로를 세우지 못한 것과 비교되어, 長羅侯로 封해지는 행운을 얻었다. 훗날 蘇武를 대신하여 典屬國, 右將軍 등으로 임명되어 外國관련 일에 공로를 세웠으며 元帝 때 사망하였다(『漢書』 권70 「傅常鄭甘陳段傳」 : 3003∼3005).
각주 011)
이하 오만여 기를 이끌고 서쪽으로부터 [흉노로] 들어와 다섯 명의 장군이 [이끄는 부대와 합치니] 군사의 수가 2십여 만이 되었다. [하지만] 흉노는 한나라가 군대를 대거 출정시켰다는 것을 듣고 노약자를 도망시키고 가축들을 몰아 멀리 도망시켜버렸기 때문에 다섯 장군이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翕侯 : 月氏 내의 수령으로 보인다. 月氏는 大夏, 즉 박트리아 지역으로 이주한 뒤 그 땅을 5명의 수령들 내지는 翕侯(yabghu)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한다(그루세, 1998 : 77). 토하라어에서 ‘땅, 지방’을 뜻하는 yapoy 혹은 ype라는 말과 연관된 것이라고 한다. 대체로 학자들은 葉護(yabghu)를 옮긴 말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은 투르크계 국가의 官名으로, 葉護라고 한자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副王, 君長 등을 지칭하기도 한다. 본래 고대 쿠샨이나 인도-스키타이계 종족들에서 쓰였던 칭호로 그것이 투르크계 종족들에게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그루쎄, 1998 : 142). 이후 葉護는 突厥시대에 可汗 이하에서 西部의 영역을 담당하는 최고위의 관직으로 주로 可汗의 子弟들이 담당하였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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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宣帝(재위 전91~49) : 諱는 詢. 字는 次卿. 武帝의 曾孫이며, 戾太子의 손자이다. 조부 戾太子가 巫蠱의 난에서 죽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민가에서 자랐다. 전74년에 昭帝가 붕어하고 한때 迎立된 昌邑王 賀가 霍光에 의해 폐위되자 18세로 皇位를 이었다. 처음에는 霍光이 攝政하였으나, 전68년 霍光이 병들어 죽은 뒤에는 霍氏 일족을 제거하고 친히 정사를 맡았다. 地方行政制度를 정비하고, 처음으로 常平倉을 설치하여 빈민구제를 도모하였다. 대외적으로는 匈奴의 쇠퇴를 틈타 烏孫과 손잡고 匈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鄭吉을 西域都護로 하여 소위 西域 36국을 服屬시켜 마침내 匈奴가 분열되었다. 전51년에는 南匈奴도 漢나라에 복속하기에 이르렀다. 宣帝시대는 武帝 이후 漢나라의 威勢가 최고도에 달하였으므로, 前漢의 여러 황제 중에서도 賢帝로 꼽혔다.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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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0)
常惠(?~전46) : 太原(지금의 山西省 太原 西南) 사람이다. 젊었을 때 집안이 가난하여 蘇武가 匈奴로 사신가는 것에 응모를 하여 갔다가 그곳에서 십여 년간 억류생활을 했다. 昭帝 때에 귀환하여 光祿大夫로 제수되었다. 宣帝 本始 2년(전72)에 烏孫公主가 구조를 바라는 上書를 보내자, 烏孫에 사신으로 갔다. 뒤이어 漢이 다섯將軍의 大軍을 출동시켰을 때, 校尉로 임명되어 烏孫의 군대를 지휘하였다. 匈奴의 單于 父行과 名王 騎將 이하 3만 9천여 명의 首級을 얻어 귀환하였다. 이때 烏孫 사람에게 印綬節을 도둑맞아 誅殺될 위기에 처했으나, 다른 다섯 장군들이 아무 공로를 세우지 못한 것과 비교되어, 長羅侯로 封해지는 행운을 얻었다. 훗날 蘇武를 대신하여 典屬國, 右將軍 등으로 임명되어 外國관련 일에 공로를 세웠으며 元帝 때 사망하였다(『漢書』 권70 「傅常鄭甘陳段傳」 : 3003∼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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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1)
翕侯 : 月氏 내의 수령으로 보인다. 月氏는 大夏, 즉 박트리아 지역으로 이주한 뒤 그 땅을 5명의 수령들 내지는 翕侯(yabghu)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한다(그루세, 1998 : 77). 토하라어에서 ‘땅, 지방’을 뜻하는 yapoy 혹은 ype라는 말과 연관된 것이라고 한다. 대체로 학자들은 葉護(yabghu)를 옮긴 말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은 투르크계 국가의 官名으로, 葉護라고 한자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副王, 君長 등을 지칭하기도 한다. 본래 고대 쿠샨이나 인도-스키타이계 종족들에서 쓰였던 칭호로 그것이 투르크계 종족들에게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그루쎄, 1998 : 142). 이후 葉護는 突厥시대에 可汗 이하에서 西部의 영역을 담당하는 최고위의 관직으로 주로 可汗의 子弟들이 담당하였다.
색인어
- 이름
- 소제, 선제(宣帝), 전광명(田廣明), 범명우, 한증(韓增), 조충국(趙充國), 전순(田順), 상혜(常惠)
- 지명
- 한나라, 한, 한나라, 서하, 주천[군], 운중, 주천[군], 운중, 한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