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中)과 왜(倭)의 관계
크나큰 건덕(乾德)주 001은 만물이 이에 의지하여 비롯하며, 넓고 넓은 곤의(坤儀)주 002는 구주(九州)주 003
각주 003)
를 모두 싣는다. 지난날 선왕(先王)의 계보를 살펴보니 복희(伏羲)
주 004九州:『爾雅』 「釋地」에는 “兩河間曰冀州, 河南曰豫州, 河西曰雝州, 漢南曰荊州, 江南曰楊州, 濟河間曰兗州, 濟東曰徐州, 燕曰幽州, 齊曰營州九州”라고 하였고, 『周禮』 「夏官-職方氏」에는 “東南曰揚州, 正南曰荊州, 河南曰豫州, 正東曰靑州, 河東曰兗州, 正西曰雍州, 東北曰幽州, 河內曰糞州, 正北曰幷州”라고 하였으며, 『帝王世紀』에는 “冀, 兗, 靑, 徐, 揚, 荊, 豫, 梁, 雍, 九州, 顓帝所建”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堯舜(『帝王世紀』) | 夏(『書經』 「禹貢」) | 殷(『爾雅』 「釋地」) | 周(『周禮』 「職方氏」) |
冀州(帝都) | 冀州(帝都) | 冀州(兩河間) | 冀州(河內) |
兗州(濟河) | 兗州(濟河) | 兗州(濟河) | 兗州(河東) |
靑州(海岱) | 靑州(海岱) | - | 靑州(正東) |
徐州(海岱及淮) | 徐州(海岱及淮) | 徐州(濟東) | - |
揚州(淮海) | 揚州(淮海) | 揚州(江南) | 揚州(南東) |
荊州(荊及衡陽) | 荊州(荊及衡陽) | 荊州(漢南) | 荊州(正南) |
豫州(荊河) | 豫州(荊河) | 豫州(河南) | 豫州(河南) |
梁州(華陽墨水) | 梁州(華陽墨水) | - | - |
雍州(墨水西河) | 雍州(墨水西河) | 雝州(河西) | 雍州(正西) |
각주 004)
와 헌원(軒轅)
주 005伏羲:宓羲, 庖犧, 包犧, 伏戲라고도 하며, 犧皇, 皇羲, 太昊라고도 한다. 『史記』에는 伏犧라고 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인면사신의 존재로 누이인 女媧와 결혼하여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복희는 천지간의 음양변화의 이치를 터득하여 팔괘를 제작하였다고 하는데, 본문에서 “하늘을 받들어 만물을 다스렸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漢代 화상석을 보면 伏羲와 女媧가 각각 規와 矩를 손에 들고 천지를 주관하는 陰陽의 이치를 상징하는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女媧 대신 黃帝와 짝을 이루고 있다. 『淮南子』 「時則訓」 “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次, 槫木之地, 青土樹木之野, 太皞·句芒之所司者萬二千里”의 高誘注에 “太皞, 伏羲氏, 東方木德之帝也, 句芒, 木神”이라 하여 伏羲를 東方 木帝인 太昊라고 하여, 五帝 중의 하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뒷구절에 太昊가 다시 나오기 때문에 태호와 복희씨를 한 인물로 본 것 같지는 않다.
각주 005)
은 처음으로 하늘을 받들어 만물을 다스렸다. 또 선대 제왕 중에서 염제(炎帝)
주 006軒轅:『史記』 「五帝本紀」에 따르면, “黃帝者, 少典之子, 姓公孫, 名曰軒轅”이라 하여 헌원은 黃帝의 이름이라고 하고 있다. 姓은 公孫氏인데, 軒轅의 언덕에 살았기 때문에 軒轅이라 불렸다고 한다. 神農氏 시대에 천하가 혼란해지자 炎帝와 阪泉에서 싸워 승리하였고 蚩尤와 涿鹿에서 싸워 승리하여 제후들에게 천자로 추존되어 비로소 천하가 안정되었다. 그는 文字, 曆數, 音樂, 宮室, 衣裳, 指南車 등을 발명하여 백성에게 문명의 혜택을 준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본문에서 “하늘을 받들어 만물을 다스렸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각주 006)
와 태호(太昊)는 비로소 땅을 구획하고 강역을 나누었다. 관대(冠帶)주 007를 착용하여 제화(諸華)주 008임을 분명히 하고 요황(要荒)주 009炎帝:炎帝는 전설상 姜姓 부족의 수장이다. 전설에 따르면, 염제 어머니의 이름은 任姒인데, 華山에 놀러갔다가 신룡을 보고 감응되어 염제를 낳았다고 한다. 염제는 烈山의 石室에서 태어났고 姜水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烈山氏라고도 하고 姜姓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흔히 五帝 중 赤帝에 배치되며 일설에는 炎帝 神農이라고도 한다. 太昊伏羲(木帝), 炎帝神農(赤帝), 黃帝軒轅(土帝), 小昊金天(白帝), 顓頊高揚(黑帝)의 五帝 계통이 성립된 것은 司馬遷 이후 劉欽, 劉向 부자의 五行相生적 五帝신화에서 기인한다고 보는데(김일권, 2003), 본문에서는 炎帝와 神農을 동일 인물로 보지 않는 것이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炎帝가 인류에게 끼친 공헌에는 神農氏의 역할과 중첩되는 것이 많은데, 예를 들면 농사와 약초와 관련된 고사가 바로 그것이다. 본문의 “비로소 땅을 구획하고 강역을 나누었다(爰制地而疏疆)”라는 것은 염제의 일반적인 기능인 파종법, 악기제작, 활 제작, 방직술 등과 관련이 없다. 굳이 연계시키자면 쟁기를 제작하여 토지를 개간하여 농경을 가르쳤다는 것인데, 원래 신화상의 이야기와 중화와 제이를 구분하였다는 의미의 본문과는 딱히 맞지 않지만, 농경의 유무를 가지고 中華와 諸夷를 구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각주 009)
의 경계를 정하여 저 원방과 구별하였으니, 중(中)과 외(外)를 구분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구이팔적(九夷八狄)주 010要荒:고대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것 중 畿服제도가 있다. 王畿를 중심으로 파상적으로 500리마다 경계를 설정하는 이른바 五服제도이다. 五服제도에 대해서는 『國語』 「周語」에 “夫先王之制:邦內甸服, 邦外侯服, 侯衛賓服, 夷蠻要服, 戎狄荒服”이라고 하여 甸服, 侯服, 賓服, 要服, 荒服 등 5服을 말하고 있다. 『尚書』 「禹貢」에도 오복을 언급하고 있는데, ‘빈복’ 대신 ‘綏服’이라고 한 점이 다르다. 5복은 복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는데, 모두 오백 리이다. 『周禮』 「夏官·職方氏」에는 ‘五服’을 늘려 ‘九服’이라 하였는데, 侯服, 甸服, 男服, 采服, 衛服, 蠻服, 夷服, 鎮服, 藩服이다. 이처럼 要荒은 要服과 荒服을 말하며, 관용적으로 매우 먼 곳에 있는 나라 또는 지역을 의미한다.
각주 010)
은 동쪽 들녘에서부터 북쪽에 걸쳐 퍼져 있고 칠융육만(七戎六蠻)주 011은 서쪽에서부터 남쪽 끝까지 이어져 있다. 이들의 종족과 집락은 번다하고 군장도 각각 다르다. 도가 행해지는 세상을 만나면 때때로 성교(聲敎)주 012를 준수하기도 하지만, 전쟁으로 무도해진 세상을 만나면 서로 다투며 잔혹하게 죽이고 전란을 일으키니, 그것이 본디 그들의 본성이다. 옛날 선인들의 논의를 상세히 살펴보고 세심한 계책을 하나하나 열거해 보니, 기미(羈縻)하여주 013九夷八狄:九夷와 八狄은 각각 동쪽과 북쪽에 사는 이민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九夷八狄을 병칭한 예로는 『淮南子』 「修務訓」, “故秦·楚·燕·魏之歌也, 異轉而皆樂;九夷八狄之哭也, 殊聲而皆悲;一也”와 『爾雅』 「釋地」에 “九夷八狄七戎六蠻, 謂之四海”에 보인다. 九夷는 『論語』 「子罕」편에 “子欲居九夷”라고 하였고, 『後漢書』 「東夷傳」에는 “夷有九種. 曰:‘畎夷·於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라고 하여 9종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설에는 九夷가 玄菟·樂浪·高驪·滿飾·鳧更·索家·東屠·倭人·天鄙라고 하기도 한다(『爾雅』 「釋地」의 “九夷”疏). 八狄은 『墨子』 「節葬下」에 “昔者, 堯北教乎八狄”이라 하였고, 또 『淮南子』 「修務訓」, “故秦·楚·燕·魏之歌也, 異轉而皆樂;九夷八狄之哭也, 殊聲而皆悲;一也”에 보인다. 九夷처럼 9종족을 하나하나 열거한 예는 찾을 수 없는데, 뒤의 七戎六蠻과 마찬가지로 9, 8, 7, 6의 숫자는 실제 종족의 수를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나가 아닌 여러 종족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붙여진 것 같다.
각주 013)
사이(四夷)가 중화(中華)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예방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羈縻:굴레와 고삐를 말하며 여기에서 이민족을 ‘연계·포섭하다, ’ ‘조종·통제하다’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이러한 용례는 『漢書』 「郊祀志下」의 “方士之候神入海求蓬萊者終無驗……天子猶羈縻不絶, 幾遇其真, ” 顏師古注에 “羈縻, 繫聯之意. 馬絡頭曰羈也. 牛靷曰縻”, 司馬相如의 『難蜀父老』에 “蓋聞天子之牧夷狄也, 其義羈縻勿絶而已”, 또 『漢書』 「匈奴傳下」에 “其慕義而貢獻則接之以禮讓, 羈靡不絶”이라 하여 漢代에는 관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唐代 羈縻州가 설치되었는데, 羈縻州는 이민족의 풍속을 그대로 인정한 위에 통치한다는 점에서 일반 州縣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행정구역이 되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九州:『爾雅』 「釋地」에는 “兩河間曰冀州, 河南曰豫州, 河西曰雝州, 漢南曰荊州, 江南曰楊州, 濟河間曰兗州, 濟東曰徐州, 燕曰幽州, 齊曰營州九州”라고 하였고, 『周禮』 「夏官-職方氏」에는 “東南曰揚州, 正南曰荊州, 河南曰豫州, 正東曰靑州, 河東曰兗州, 正西曰雍州, 東北曰幽州, 河內曰糞州, 正北曰幷州”라고 하였으며, 『帝王世紀』에는 “冀, 兗, 靑, 徐, 揚, 荊, 豫, 梁, 雍, 九州, 顓帝所建”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堯舜(『帝王世紀』) 夏(『書經』 「禹貢」) 殷(『爾雅』 「釋地」) 周(『周禮』 「職方氏」) 冀州(帝都) 冀州(帝都) 冀州(兩河間) 冀州(河內) 兗州(濟河) 兗州(濟河) 兗州(濟河) 兗州(河東) 靑州(海岱) 靑州(海岱) - 靑州(正東) 徐州(海岱及淮) 徐州(海岱及淮) 徐州(濟東) - 揚州(淮海) 揚州(淮海) 揚州(江南) 揚州(南東) 荊州(荊及衡陽) 荊州(荊及衡陽) 荊州(漢南) 荊州(正南) 豫州(荊河) 豫州(荊河) 豫州(河南) 豫州(河南) 梁州(華陽墨水) 梁州(華陽墨水) - - 雍州(墨水西河) 雍州(墨水西河) 雝州(河西) 雍州(正西) -
각주 004)
伏羲:宓羲, 庖犧, 包犧, 伏戲라고도 하며, 犧皇, 皇羲, 太昊라고도 한다. 『史記』에는 伏犧라고 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인면사신의 존재로 누이인 女媧와 결혼하여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복희는 천지간의 음양변화의 이치를 터득하여 팔괘를 제작하였다고 하는데, 본문에서 “하늘을 받들어 만물을 다스렸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漢代 화상석을 보면 伏羲와 女媧가 각각 規와 矩를 손에 들고 천지를 주관하는 陰陽의 이치를 상징하는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女媧 대신 黃帝와 짝을 이루고 있다. 『淮南子』 「時則訓」 “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次, 槫木之地, 青土樹木之野, 太皞·句芒之所司者萬二千里”의 高誘注에 “太皞, 伏羲氏, 東方木德之帝也, 句芒, 木神”이라 하여 伏羲를 東方 木帝인 太昊라고 하여, 五帝 중의 하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뒷구절에 太昊가 다시 나오기 때문에 태호와 복희씨를 한 인물로 본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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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軒轅:『史記』 「五帝本紀」에 따르면, “黃帝者, 少典之子, 姓公孫, 名曰軒轅”이라 하여 헌원은 黃帝의 이름이라고 하고 있다. 姓은 公孫氏인데, 軒轅의 언덕에 살았기 때문에 軒轅이라 불렸다고 한다. 神農氏 시대에 천하가 혼란해지자 炎帝와 阪泉에서 싸워 승리하였고 蚩尤와 涿鹿에서 싸워 승리하여 제후들에게 천자로 추존되어 비로소 천하가 안정되었다. 그는 文字, 曆數, 音樂, 宮室, 衣裳, 指南車 등을 발명하여 백성에게 문명의 혜택을 준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본문에서 “하늘을 받들어 만물을 다스렸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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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炎帝:炎帝는 전설상 姜姓 부족의 수장이다. 전설에 따르면, 염제 어머니의 이름은 任姒인데, 華山에 놀러갔다가 신룡을 보고 감응되어 염제를 낳았다고 한다. 염제는 烈山의 石室에서 태어났고 姜水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烈山氏라고도 하고 姜姓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흔히 五帝 중 赤帝에 배치되며 일설에는 炎帝 神農이라고도 한다. 太昊伏羲(木帝), 炎帝神農(赤帝), 黃帝軒轅(土帝), 小昊金天(白帝), 顓頊高揚(黑帝)의 五帝 계통이 성립된 것은 司馬遷 이후 劉欽, 劉向 부자의 五行相生적 五帝신화에서 기인한다고 보는데(김일권, 2003), 본문에서는 炎帝와 神農을 동일 인물로 보지 않는 것이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炎帝가 인류에게 끼친 공헌에는 神農氏의 역할과 중첩되는 것이 많은데, 예를 들면 농사와 약초와 관련된 고사가 바로 그것이다. 본문의 “비로소 땅을 구획하고 강역을 나누었다(爰制地而疏疆)”라는 것은 염제의 일반적인 기능인 파종법, 악기제작, 활 제작, 방직술 등과 관련이 없다. 굳이 연계시키자면 쟁기를 제작하여 토지를 개간하여 농경을 가르쳤다는 것인데, 원래 신화상의 이야기와 중화와 제이를 구분하였다는 의미의 본문과는 딱히 맞지 않지만, 농경의 유무를 가지고 中華와 諸夷를 구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각주 007)
-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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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要荒:고대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것 중 畿服제도가 있다. 王畿를 중심으로 파상적으로 500리마다 경계를 설정하는 이른바 五服제도이다. 五服제도에 대해서는 『國語』 「周語」에 “夫先王之制:邦內甸服, 邦外侯服, 侯衛賓服, 夷蠻要服, 戎狄荒服”이라고 하여 甸服, 侯服, 賓服, 要服, 荒服 등 5服을 말하고 있다. 『尚書』 「禹貢」에도 오복을 언급하고 있는데, ‘빈복’ 대신 ‘綏服’이라고 한 점이 다르다. 5복은 복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는데, 모두 오백 리이다. 『周禮』 「夏官·職方氏」에는 ‘五服’을 늘려 ‘九服’이라 하였는데, 侯服, 甸服, 男服, 采服, 衛服, 蠻服, 夷服, 鎮服, 藩服이다. 이처럼 要荒은 要服과 荒服을 말하며, 관용적으로 매우 먼 곳에 있는 나라 또는 지역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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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0)
九夷八狄:九夷와 八狄은 각각 동쪽과 북쪽에 사는 이민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九夷八狄을 병칭한 예로는 『淮南子』 「修務訓」, “故秦·楚·燕·魏之歌也, 異轉而皆樂;九夷八狄之哭也, 殊聲而皆悲;一也”와 『爾雅』 「釋地」에 “九夷八狄七戎六蠻, 謂之四海”에 보인다. 九夷는 『論語』 「子罕」편에 “子欲居九夷”라고 하였고, 『後漢書』 「東夷傳」에는 “夷有九種. 曰:‘畎夷·於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라고 하여 9종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설에는 九夷가 玄菟·樂浪·高驪·滿飾·鳧更·索家·東屠·倭人·天鄙라고 하기도 한다(『爾雅』 「釋地」의 “九夷”疏). 八狄은 『墨子』 「節葬下」에 “昔者, 堯北教乎八狄”이라 하였고, 또 『淮南子』 「修務訓」, “故秦·楚·燕·魏之歌也, 異轉而皆樂;九夷八狄之哭也, 殊聲而皆悲;一也”에 보인다. 九夷처럼 9종족을 하나하나 열거한 예는 찾을 수 없는데, 뒤의 七戎六蠻과 마찬가지로 9, 8, 7, 6의 숫자는 실제 종족의 수를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나가 아닌 여러 종족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붙여진 것 같다.
- 각주 011)
-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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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3)
羈縻:굴레와 고삐를 말하며 여기에서 이민족을 ‘연계·포섭하다, ’ ‘조종·통제하다’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이러한 용례는 『漢書』 「郊祀志下」의 “方士之候神入海求蓬萊者終無驗……天子猶羈縻不絶, 幾遇其真, ” 顏師古注에 “羈縻, 繫聯之意. 馬絡頭曰羈也. 牛靷曰縻”, 司馬相如의 『難蜀父老』에 “蓋聞天子之牧夷狄也, 其義羈縻勿絶而已”, 또 『漢書』 「匈奴傳下」에 “其慕義而貢獻則接之以禮讓, 羈靡不絶”이라 하여 漢代에는 관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唐代 羈縻州가 설치되었는데, 羈縻州는 이민족의 풍속을 그대로 인정한 위에 통치한다는 점에서 일반 州縣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행정구역이 되었다.
색인어
- 이름
- 복희(伏羲), 헌원(軒轅), 염제(炎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