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림이 두 마음을 품고 머뭇거렸으나, 끝내 축량의 은혜에 감복하였다.
상림이 두 마음을 품고 머뭇거렸으나, 끝내 축량의 은혜에 감복하였다.
『후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순제(재위: 126~143) 시기에 일남[군] 상림[현] 변방의 만이 구련 등 수천인이 성과 관청을 불사르고 장리를 살해하였다. 이고의 논의를 받아들여, 축량을 배하여 구진태수로 삼고, 장교를 교지자사로 삼았다. [장]교가 [그곳에] 이르러 위무와 회유를 보이기 시작하니, 모두 항복하여 흩어졌다. [축]량은 구진에 도달해 수레 한 대로 적중에 들어가 방략을 말하고 위엄과 신의로써 초유하니, 항복하는 자가 수만 인이었다. 모두 [축]량을 위해주 001 관부를 쌓아 세우니, 이로 말미암아 영외가 다시 평정되었다.”
• 참고
『後漢書』 卷86 南蠻西南夷列傳76 永和二年 日南象林徼外蠻夷區憐等數千人攻象林縣 燒城寺 殺長吏 … 四府悉從固議 即拜祝良爲九眞太守 張喬爲交阯刺史 喬至 開示慰誘 並皆降散 良到九眞 單車入賊中 設方略 招以威信 降者數萬人 皆爲良築起府寺 由是嶺外復平